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39화 (239/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39화

239화

"각 사당의 설명을 잘 보시오."

양녕의 말에 최만리와 함께 계획이 적힌 종이를 읽던 정인지가 말했다.

"숭령전과 숭인전은 평양목에 이미 있던 단군 사당과 기자 사당을, 숭의전은 마전현의 왕씨 사당, 숭덕전도 경주목 오릉의 사당을 그대로 잇되 이름을 바꾸고 격식을 맞추어 증축하는 것이군요. 제주목에는 삼성혈에 양고부의 사당을 새롭게 세우고 말입니다. 그런데 부여의 해모수와 발해의 고왕을 모시는 두 사당은 어째 지역명조차 없습니다?"

"그거야 능침은 물론이고 도성의 위치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그런 것 아니겠……."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최만리는 드디어 불안감의 정체를 알아채고 천천히 양녕을 보았다. 양녕은 기다렸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주상께서 그 두 사당을 세우기 합당한 위치를 집현전을 시켜 알아내라 하셨소."

"마전현도 딱히 고려 태조와 연고가 있는 땅은 아니지 않습니까?"

"개성부에 왕씨의 사당을 세우기에는 민심이 민심이니 어쩔 수 없지 않소. 그 역시 나중에 여건이 되면 마땅히 개성부로 옮겨야 할 것이외다."

업무량이 늘어날 예감에 불안해하는 최만리와 달리, 정인지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사당은 마땅히 연고가 있는 곳에 세우는 것이 옳지요. 그런데 부여와 발해는 깊이 상고하여도 그 도읍이나 능침이 정확히 알려진 적이 없어 제대로 알아낼 수 있을지가 걱정입니다."

"그것은 전조 고려 때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잃고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오로지 서책으로만 상고할 수 있었던 탓이오. 이제 북방이 조선의 땅이 되어 쉽게 오갈 수 있으니, 지금 직접 가서 살핀다면 더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소."

"그건 그렇습니다. 게다가 지금 여러 일로 전국의 서책을 조사하고 있으니, 부여나 발해에 관한 책이 새로 발견된다면 그것으로도 상고할 수 있겠군요."

"그렇소. 조금 오래 걸릴 수도 있으나 최대한 많고 정확하게 알아내 주시기 바라오. 그리고 알아낸 다음 직접 가서 확인하고 사당 지을 자리를 정하는 것 말인데, 나 혼자 가기에는 좀 그러니……."

일부러 말을 흐린 양녕은 최만리의 불안한 표정을 보고 껄껄 웃더니 이어 말했다.

"문형과 부제학께서는 이미 맡은 일이 많은데 그것까지 따라나설 수는 없겠지. 대신 집현전에서 관원을 둘 정도 데려갈까 하오."

그 말에 드디어 최만리가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대군께 도움이 될 만큼 영특한 이들로 뽑겠습니다."

"이미 마음에 둔 이들이 있소. 그저 그들이 뱃멀미를 하는지만 확인해 주시오."

양녕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양녕이 일부러 말을 흐려 자신에게 장난을 쳤다는 것을 알아챈 최만리가 당했다는 표정으로 웃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정인지도 껄껄 웃기 시작했다.

* * *

1443년 9월 하순 모일.

경원부. 비우진 북쪽.

"이런 곳이 있었군."

흥미로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양녕의 말에 안내하던 경원부윤이 대답했다.

"예. 장계에도 올렸지만, 원래 아무것도 없던 땅이었는데 지난여름에 비가 많이 내렸을 때 불어난 두만강물에 흙이 쓸려 나가며 드러났습니다. 그 중요성이 밝혀지자마자, 비가 또 많이 오더라도 손상되지 않도록 가까운 쪽 두만강을 따라 제방을 쌓았습니다."

부윤의 말에 양녕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가까운 곳에는 줄지어 나란히 놓인 주춧돌과 그 아래의 석축 기단이 남아 있었고, 약간 떨어진 곳에는 무너져 낮아진 토축 성벽이 보였다.

"이렇게 때마침 모습을 드러내다니, 실로 하늘이 이 일을 돕는 것만 같군. 어때, 자네들 생각에도 여기가 옛 발해의 동경용원부가 맞는 것 같은가?"

양녕이 뒤돌아보며 묻자, 흥미로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집현전 교리 성삼문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대답했다.

"예. 신당서에 이르길 발해는 옛 예맥의 땅에 동경을 두고 용원부라 하였고, 그 동남쪽에 바다가 있는데 곧 일본으로 가는 길이라 하였습니다. 그 내용과 모두 들어맞는 곳이니 틀림없습니다."

이어서 집현전 응교 신숙주도 말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성터가 똑바른 사각형이니 필시 사면으로 문이 있었을 것이고, 지금 여기 보이는 주춧돌과 기단이 크고 장엄하며 남쪽을 향한 것을 보니 분명히 궁궐의 터일 것입니다. 이곳은 분명이 궁성일 것이고, 이 위치에 있을 궁성은 발해의 동경용원부뿐입니다."

양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렇군. 그렇다면 여기에 고왕을 비롯한 발해의 역대 임금을 모시는 사당인 숭현전을 지어야겠어."

"하지만 여기가 동경용원부가 맞다면 동북쪽에서 발견된 성터는 상경용천부가 확실해집니다. 그곳이 가장 오랫동안 발해의 도읍이었고 마지막 도읍이기도 한데, 위치도 밝혀졌으니 거기에 사당을 짓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성삼문의 질문에 양녕이 대답했다.

"물론 가능하다면 그게 좋겠지. 하지만 지금 비우진이 이 정도로 번성한 것도 겨우 이뤄 낸 일이야. 여기서 한참 북쪽에 있는 거솔도의 큰 고을인 거양성만 하더라도 백성들이 거의 없고, 공험진에는 아예 주둔하는 병사들만 있을 뿐이네. 하물며 거기서 더 서쪽으로 간 상경용천부의 옛터라면 말할 것도 없지."

"사당을 짓더라도 보살필 사람이 없는 것이로군요."

"그렇네. 게다가 그냥 외진 게 아니라 금나라에 가깝고 여진족들이 돌아다니는 곳일세. 그런 곳에 사당을 둘 수는 없어."

대화를 듣던 경원부윤이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행입니다. 저는 대군께서 직접 사당 지을 터를 살피러 오신다기에 상경용천부의 옛터에 지으시려는 줄로만 알고, 어떻게 사당을 관리하고 지킬지 걱정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숭현전은 여기 자리 잡겠군요."

신숙주의 말에 양녕이 미소 지었다.

"그래. 일단은 말이지."

"일단이라 하시면?"

"아바마마 때 지킬 여건이 되지 않아 훗날을 기약하고 남쪽으로 물렸던 고을과 국경을 주상께서 되찾으시어 이룬 것이 이곳 경원부 아닌가. 사당도 그 전례를 따르기로 했네. 지금은 여건이 되지 않아 이곳에 짓지만, 언젠가는 상경용천부로 제자리를 찾아 옮기는 것이지."

"상경용천부가 온전히 조선의 강역에 들어올 그날을 기약하는 것이군요."

"그렇네. 해모수 사당도 마찬가지야. 부여의 첫 도읍으로 여겨지는 곳은 서책으로 상고하였으나 요하 서쪽인지라 사당을 짓기는커녕 건너가는 것조차 명나라의 눈치가 보이고, 이름이 남아 있는 곳인 부여성은 금나라의 땅이라 아예 가는 것 자체가 어려워. 그래서 일단 심양성에 해모수 사당인 숭조전을 짓고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네."

"심요도에서는 관찰사가 알아서 할 것이니 경원부에만 가서 살피면 될 것이라 하신 게 그 때문이었군요."

"그래. 내가 자네들을 데리고 간들 요하를 건널 수도, 부여성까지 갈 수도 없잖은가."

양녕과 신숙주의 대화를 듣던 경원부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숭현전을 잘 관리하고 있겠습니다."

"고맙소."

그때 성삼문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양녕에게 말했다.

"대군, 저쪽에서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양녕이 돌아보자 정말로 한 노인이 손에 버들고리를 들고 다가오다가, 양녕의 반당(나라에서 지급한 호위병)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정말이군. 아마도 내게 용무가 있는 것 같으니, 이리 데려오게."

잠시 후 반당들에 둘러싸여 양녕의 앞에 온 노인은 옆에 버들고리를 내려놓고 양녕에게 넙죽 절을 올렸다.

"자네는 누구인데 갑자기 나에게 이리 절을 하는가?"

약간 당황한 양녕의 질문에 노인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성저십리에 살다가 대군마님께서 길을 열어 주셔서 이곳 경원부로 이주한 신백정입니다. 여기 와서 더는 다른 이들 눈치도 안 보고, 재주를 살려서 일하게 된 데다가 농사짓는 보람도 알게 되었지요. 거기다가 아들이 말 타는 솜씨를 인정받아 군인이 되었는데, 아 글쎄 이번에 부교에서 정교로 승진했습니다."

"오호라, 잘된 일이로군."

"그런데 대군 마님께서는 저 멀리 한성부에 계시니 제가 은혜를 갚으려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대군 마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던 버들고리를 들어 양녕의 앞에 놓았다.

"이게 뭔가?"

"얼마 전에 이 근처 밭을 갈다 나온 것입니다. 집에 고이 모셔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음 달에 큰물이 지더니 여기가 옛날 나라님이 사시던 곳이라고 하고, 또 여기를 살피러 대군 마님께서 오신다지 뭡니까? 그래서 아, 부처님께서 이 노인에게 은혜 갚을 기회를 주신 것이로구나 해서 가져왔습니다."

그 말에 경원부윤과 성삼문, 신숙주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보는 가운데, 양녕이 자세를 낮추어 앉더니 버들고리를 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북방의 백성에게는 비단보다도 귀한 물건일 고운 면포로 정성스럽게 싸인 것을 풀던 양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버들고리 안에 있던 것은 높이가 한 자 정도 되는, 돌로 만든 불상이었다. 말없이 불상을 한참 보던 양녕은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노인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맙네. 이것은 실로 귀중한 물건일세. 자네가 나에게 은혜를 갚았을 뿐만 아니라, 주상전하와 이 나라에도 아주 큰 공을 세웠어."

그 말에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정말로 부처님께서 가피를 내리셨나 봅니다."

즐거이 집으로 돌아가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양녕에게, 옆에서 지켜보던 성삼문이 물었다.

"저렇게 생긴 불상은 처음 봅니다만, 저게 그렇게나 귀중한 것입니까?"

양녕은 다시 버들고리 안의 불상을 내려다보았다. 불상은 대좌 하나에 두 부처가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있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귀중하고말고. 이것이 바로 발해의 불상일세."

그 말에 신숙주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가 정말로 발해의 동경용원부가 확실한가 봅니다. 발해의 역대 임금을 모시는 사당을 지으려 할 때 이처럼 이곳이 발해의 옛 도읍이 맞다는 증거가 알아서 나타나다니, 실로 놀랍고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하늘이 도우셨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주상께서도 기뻐하실 걸세."

양녕의 그 말에 어딘가 위화감을 느낀 경원부윤이 작게 물었다.

"노인을 칭찬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정말로 나라의 귀중한 보물이 될 만한 물건이란 말입니까?"

"그렇소. 물론 나는 불교를 크게 따르는 것도 아니고, 괴력난신을 믿지도 않소. 절묘한 순간에 나타난 불상이라고 해서 귀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오."

그때 옆에서 신숙주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저 역시 불교는 잘 모르지만 대군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알 것 같습니다. 조선이야말로 옛 나라들의 천명을 모두 아우르는 나라임을 나타내는 신이한 증표라는 말씀이시지요?"

"정답일세. 정확하게는 신이한 증표로 삼을 수 있는 물건이지. 한성부로 돌아가서가 기대되는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