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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38화 (23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38화

238화

1443년 5월 하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사정전에는 이도의 부름을 받고 모인 양녕과 이유, 삼정승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도는 아직 오지 않은 데다가, 정확히 무슨 일로 부른 것이지 아직 제대로 듣지 못했던 탓에, 양녕과 이유는 조용히 사담만 나누고 있었다.

"원손께서 그리도 총명하시단 말인가?"

"예, 이미 말은 조리 있게 하시고, 글도 조만간 깨우치실 것 같습니다. 앉아계시는 모습도 어찌나 점잖으신지, 실로 원손의 풍격이 느껴집니다."

이제 겨우 세 살인 원손, 즉 세자 이향의 첫째 아들을 두고 원손의 풍격까지 논하는 이유의 모습에 양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실로 나라의 홍복이구나. 나도 바쁜 일이 끝나면 뵈러 가봐야겠다."

숙부인 이유가 신나서 자랑을 할 정도로 원손의 탄생은 왕실의 큰 경사였다. 원손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이도가 바로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도가 직접 그 교지를 읽는 도중에 월대 좌우에 두었던 큰 촛대의 촛불이 갑자기 크고 밝게 타오르는 일까지 있었다. 이것을 지극히 상서로운 징조로 여긴 이도는 기뻐하면서, 원손의 아명을 이 일에서 따서 널리 밝게 비춘다는 뜻의 홍위라고 지었다.

"동궁빈과 어마마마께서도 강건하시니 백부 말씀처럼 실로 나라의 홍복입니다."

세자빈인 권씨는 이홍위를 낳고 무사히 몸조리를 마쳤고, 세자빈 책봉을 우선하고 건너뛰었던 이향과의 가례도 정식으로 올렸다. 중전 심씨 역시 잠시 몸이 안 좋았으나, 좋아하는 음식인 설탕 과자를 먹으며 며칠 푹 쉬더니 쾌차한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군. 아주 좋은 일이야.'

그때 사정전 안쪽 문이 열리며 복잡한 표정의 이도가 걸어들어왔다.

"내가 좀 늦었구려. 많이들 기다리셨소?"

걸어온 이도가 옥좌에 앉자 양녕이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주상께서 저희 때문에 괜히 서두르시지는 않으셨나 걱정입니다."

"괜찮습니다. 하던 일은 다 마치고 왔습니다."

여전히 굳은 표정의 이도에게 영의정 황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이렇게 신들을 모으신 것을 보니, 혹시 무언가 중요한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그런 것은 아니오. 형님과 진양에게는 초문이겠지만 삼공께서는 이미 아시는 일인데, 나 혼자서 생각해서 판단하기 어려워서 조언을 구하고자 하오."

이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전 공주부윤이 장계로 올린, 성을 바꾸고 숨어 살던 왕씨에 관한 것이오."

삼공은 무슨 일인지 바로 알아들은 눈치였지만, 내막을 모르는 양녕이 이도에게 물었다.

"성을 바꾸고 숨어 살던 왕씨라면, 설마 전조 고려의 왕족입니까?"

"맞습니다. 본명은 왕미인데, 외가의 성인 제씨로 바꾸어서 살고 있었습니다. 땅 경계를 두고 다투던 이웃이 저자가 사실 왕씨이니 잡아가라며 관아에 밀고해서 알려졌습니다."

"과연, 그 처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신 것이군요."

이도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장계가 올라오자마자 대소신료들로부터 죽이거나 유배 보내라는 주청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아바마마께서 거두셨던 일을 제가 번복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방원 재위 기에 지금처럼 왕씨가 발각된 적이 있었지만, 이방원은 신하들의 반대를 꺾고 발각된 당사자를 석방했으며 숨겨 주었던 이들도 처벌을 감경해 주었다. 게다가 앞으로는 왕씨가 정체를 드러내거나 발각되더라도 오히려 생활을 보살펴 주라 명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요. 애초에 국초에 왕씨들을 제거한 것은 실제로는 태조대왕의 본심이 아니었으나, 신하들이 국초의 혼란을 틈타 멋대로 했던 것 아니었습니까. 그것을 아바마마께서 바로잡으셨는데도 오히려 아직도 백성들이 왕씨라 고변하고 신하들은 주살하라 하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양녕은 사관이 듣고 있음을 의식해서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태조대왕께서 지존의 자리를 이은 것은 아예 무력으로 얻으신 것도 아니고 피 흘리지 않고 선양 받으신 것도 아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공양왕을 어정쩡하게 꺾어 버린 불완전한 계승이었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끝까지 선양을 거부했고, 대신 왕대비 안씨가 공양왕을 폐하고 그 옥새를 이성계에게 주며 왕위가 계승되었다. 때문에 찬탈의 공포도 없고 선양의 권위도 없는, 언제 모반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거기다 명나라의 존재 역시 문제였다.

'중원 왕조에게 한반도 국가는 언제나 견제의 대상이었다. 제대로 된 명분이 없는 즉위를 약점으로 잡으려 드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아니, 실제로도 약점으로 잡았지. 태조대왕의 즉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 즉 왕이 아니라 고려국 지사 권한대행으로 취급했으니까.'

명나라가 약한 정통성을 약점으로 조선을 쥐고 마음대로 흔든다는 것은, 여차하면 그 정통성을 부정하고 다시 왕씨를 복위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왕씨가 명나라의 도움으로 복위한다면 그 뒤로는 정말로 명나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질 터였다.

남은 것은 도덕도 정당성도 없는 최악의 수. 그 주체가 모반 세력이건 명나라건 간에 복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왕씨를 모두 없애는 것이었다.

"사성 받은 왕씨들은 모두 원래 성으로 되돌리고, 왕손이 아닌 이들은 외가 성을 따르게 했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던 왕씨라면 왕손이겠군요."

"맞습니다. 고려 현종의 후예라 합니다."

그 말에 양녕의 쓴웃음을 지었다.

"대소신료들의 주청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군요."

소열제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는 방계 중의 방계였지만, 황족인 유씨라는 것만으로도 정통성을 갖고 한나라의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고려 현종의 먼 후예라면 충분히 조선에 위협이 될 수 있던 것이다.

'500년 된 왕조를 무너뜨리고 불안한 정통성 위에 세워진, 이제 갓 50년이 넘은 왕조의 위태로움이란 그런 것이지.'

민감한 문제인지라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가운데 좌의정 하연이 말했다.

"일단 태종대왕께서 피를 흘리지 않는 쪽으로 정하신 일입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를 번복할 수는 없습니다."

우의정 황보인이 이어서 말했다.

"예. 하지만 왕미라는 자의 존재가 위험이 되는 것은 또 사실이니, 그것이 또 어려운 일입니다."

그때 한참 생각하던 양녕이 말했다.

"아예 그자에게 벼슬을 주고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삼공과 이유는 물론이고 이도까지 놀란 눈으로 보는 가운데 양녕이 말을 이었다.

"이미 모반을 꾀할 만큼 무력을 갖춘 이들은 전국 어디에도 없습니다. 게다가 명나라의 간섭도 걱정할 것이 되지 않습니다. 명나라 내부의 상황이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조선과 명의 관계가 이미 잘 자리 잡았는데 괜히 왕씨를 이용해서 약점을 잡겠다고 했다가는 관계가 아예 틀어져 버릴 수 있으니, 불온한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요."

명나라를 두고 불온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이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 왕조의 후손에게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은 옛 성인들이 남긴 전례일 뿐만 아니라, 조선이 정당히 고려를 계승했음을 드러낼 수도 있겠습니다. 왕씨 대우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있다면 그것도 좀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예. 그리고 하나 더. 공식적으로 모든 왕씨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그들이 과거도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양녕의 말에 황희가 깜짝 놀라 말했다.

"대군, 그게 무슨……."

"마침 왕실에 경사가 이어지고 있지 않소. 모반을 꾀하던 왕씨들은 모두 적발되어 죽은 지 오래니 그들의 친족이라 하더라도 연좌해서 죄를 묻지 않을 것이고, 원래 성을 쓰며 벼슬에도 나갈 수 있게 사면한다고 하면 명분은 충분하오."

"하지만 사면령은 몰라도 벼슬길도 여는 것은 너무 급하지 않습니까?"

이도의 말에 양녕은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오히려 벼슬길도 열어야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본래 탄압이 결집을 만드는 법인지라, 아마 숨어 사는 왕씨들은 서로에게 동질감을 가지고 뭉쳐 있을 것입니다. 사면령만 내려지고 벼슬길은 막혀 있다면 별 차이가 없겠지요. 하지만 벼슬길이 열린다면 다릅니다. 벼슬에 나가 출세하고자 하는 왕씨와 조선의 벼슬은 하지 않겠다는 왕씨로 나뉘겠지요. 아마 서로를 뒤처진 이들과 배신자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왕씨가 분열하는군요."

"예. 둘째로 왕씨를 그리워하는 이들, 정확히는 개성부의 민심도 바뀝니다. 개성부에서 왕씨는 그 탄압받던 마지막 모습만이 기억에 남아 연민의 대상이고, 그들을 탄압한 조선은 분노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왕씨가 다시 숫자가 늘고 벼슬도 하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배신자로 여기는 분노의 화살이 벼슬한 왕씨들에게도 향하겠군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본래 숫자가 늘어나면 모든 집단이 그렇듯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탄압받던 마지막 모습을 덮어버릴, 사고를 치고 패악을 부리는 왕씨들도 나타나겠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저러니 고려가 망했지, 하는 말이 개성부 안에서도 나오게 될 것입니다."

양녕의 말에 한동안 좌중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처음으로 깬 것은 이도였다.

"그렇게만 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이 됩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백성들이 기억하는 고려와 지금의 조선을 생각해보십시오. 왜구에 시달릴 일도 없고, 자식이 명나라로 끌려갈 일도 없어졌습니다. 각종 세금의 괴로움도 덜해졌고 온갖 물산이 오가지요. 그리고 정음이 퍼지면서 배움의 길도 열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천명이 굳건한데 주상께서는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백성들의 이로움을 천명으로 빗대는 양녕의 말에 이도가 환하게 웃더니 말했다.

"알겠습니다. 형님께서 조언해 주신 대로 하겠습니다. 반대하는 이들은 형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들어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김에 몇 가지 더 하고자 합니다."

양녕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 * *

며칠 뒤.

한성부. 집현전.

집현전을 찾은 양녕은 정인지와 최만리를 불러 탁자에 같이 둘러앉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을 펼친 양녕이 말했다.

"오늘 집현전을 찾은 것은 이것 때문이오. 조금 전 주상께 윤허를 받은 일이지."

양녕이 펼친 종이를 보던 최만리가 물었다.

"사당을 지으려는 계획 같군요."

"그렇소. 조선이 계승한, 삼한 땅에 있던 옛 나라들의 국조를 모시는 사당들을 각지에 설치하려는 것이오."

"이미 몇 곳 있지 않습니까?"

정인지의 질문에 양녕이 대답했다.

"있긴 하오. 하지만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당이 있는가 하면 가문에서 관리하는 사당이 있고, 그 이름과 격식도 다 따로일 뿐만 아니라 모셔진 사당이 없는 국조도 있소. 그것을 모두 바로잡으려는 것이오."

"그래서 사당의 이름이 전부 숭령전, 숭인전, 숭덕전 하는 식으로 맞춰진 것이겠습니다."

"그렇소. 그렇게 해서 총 열두 국조. 단군, 기자, 해모수, 동명, 온조, 혁거세, 탈해, 미추, 수로, 양고부, 그리고 발해 고왕과 고려 태조를 모실 것이오."

"총 열둘이로군요. 조선이 계승한 열두 천명이라……."

정인지는 사당의 숫자를 열둘로 맞춘 이유를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제후의 면복은 9류 면류관에 9문 장복이지만, 천자의 면복은 12류 면류관에 12문 장복이지.'

"그런데 이걸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자신의 질문에 양녕이 대답 대신 씨익 웃자, 최만리는 익숙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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