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37화
237화
1442년 8월 하순 모일.
금나라 모처.
원래도 외진 지역인 데다가 산과 언덕에 가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이곳에는 임시로 지어진 천막이 하나 있었다. 그 천막 안으로 만둘이 들어오자, 먼저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야르하치가 말했다.
"어서 오시오. 오는 길은 괜찮았소?"
만둘은 의자에 앉아 모자를 살짝 들고 땀을 닦으며 말했다.
"편했는지를 묻는 거라면 안 편했소. 내가 외진 곳에서 몰래 보자고 했으니 당연히 오기 편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안 되지. 한께서 위치를 아주 잘 잡으셨소. 안 들키고 잘 왔는지를 묻는 거라면 그것도 걱정하실 것 없소."
"다행이오. 그래서, 상경부에 당당하게 올 수 있는 교역이라는 구실이 있는데도 이렇게 몰래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내가 자리를 비우면서 그 이유를 정탐하러 가는 것이라 해놓아서, 당당하게 갈 수가 없었소."
"정탐?"
야르하치의 물음에 만둘이 끄덕이며 대답했다.
"에센 놈이 화약에 관심을 보였소. 지금 장성은 다 무너져서 흙무더기 정도로만 남았고 뚫린 곳도 많아서 우리가 넘어 다니기 쉽지만, 명나라가 작정하고 장성을 벽돌로 보강해 버리면 뚫기가 어려우니 화약이 필요하다더군. 그러더니 우리가 금나라와 가까우니 화약 제조 기술을 빼내 오라고 하였소. 그런 지시가 있었던 직후에 당당히 한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소. 그래서 정탐하러 간다고 하고 몰래 만나자 한 것이오."
"명나라를 화약으로 상대한다니, 에센이 꿈도 크군. 그나저나 몽골은 이미 화약 기술이 있지 않았소?"
"이런, 당신도 모르는가 보군."
만둘의 말에 야르하치가 되물었다.
"모르다니, 무슨 얘기요?"
"몽골이 온 세상을 정복할 때 화약을 썼던 것은 사실이오. 먼 서쪽을 정복할 때도 유용하게 썼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기술을 가지고 있던 게 아니라,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었소."
"중국에서?"
"그렇소. 정확히는 중국인을 통해서 들여온 것이라고 하는 게 맞겠군. 몽골이 점령하기 전까지 화북은 옛 금나라의 땅이었고 그전에는 송나라의 땅이었잖소. 화북에 살던 중국인 화약 기술자들을 통해 금나라가 화약 기술을 익혔듯, 우리도 화북을 점령하면서 그들을 통해 화약 기술을 익혔지."
"그런 일이 있었구려. 정작 여진족들은 그런 내막을 아는 이가 없소."
"화약은 시대와 나라를 가리지 않고 중요한 기밀인 데다가, 여진족이 화북에서 밀려나고 오랜 시간이 지났잖소. 당사자인 우리 말고는 잊을 만하지."
"그랬군. 그러면 몽골도 우리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화약 기술을 잃은 것이오?"
"맞소. 우리는 화약 기술을 직접 배운 게 아니라, 기술자들을 끌고 와서 만들고 다루게 시켰소. 그런데 중원에서 밀려나 초원으로 후퇴하면서 기술자들을 몇 사람 못 데려왔지. 거기에 그렇게 쫓겨난 초원에선 부족 간에 싸우더라도 기병전이 중심이 되어 버리니, 화약을 만들고 쓸 일이 많이 없어지면서 기술이 사라져 버렸소. 지금은 겨우 대포 몇 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
"그리된 것이로군. 하지만 화약 제조법을 알려 줄 수는 없소."
"그건 알고 있소. 아무리 협력하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것을 덜컥 가르쳐 줄 수는 없지."
야르하치는 슬쩍 웃더니 말했다.
"협력하는 사이라도 안 알려 주는 게 아니라, 협력하는 사이기 때문에 안 알려 주는 것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화약의 제조법은 생각보다 간단하오. 우리 역시 요동에서 끌고 온 중국인 기술자 몇 사람을 통해서 다시 제조 기술을 습득했을 정도요. 그리고 서역에도 화약 기술이 퍼져 있다 하니, 우리가 알려 주지 않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서역에 가서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면 차라리 우리가 기술을 알려 주면서 대가를 받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
"그럼 어째서 안 알려 준다는 것이오?"
"지금 몽골의 권력을 잡은 것은 오이라트잖소. 그들이 화약 제조 기술까지 얻어서 더 권력을 굳히게 하고 싶소?"
그 말에 만둘이 놀라 말했다.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오."
"바로 그것이오. 다시 황금씨족이 몽골의 실권을 잡은 다음이라면 모를까, 지금 화약 제조 기술을 넘겨준다면 그대들이 위험하오."
"하지만 화약 제조 기술을 얻지 못해도 문제요. 아마 오이라트 놈들도 우리가 금나라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소. 그래서 우리에게 화약 제조 기술을 빼내 오라 시키고, 만약 못 빼내 오면 의심해서 뒷조사를 하거나 우리가 실패했으니 자신들이 나서겠다는 구실로 교역과 외교에 끼어들려 하는 것이지. 그래서 이렇게 한을 몰래 만나서 상담하려던 것이었소."
만둘의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던 야르하치가 입을 열었다.
"화약 제조 기술을 얻어가도 문제, 못 얻어가도 문제인 상황이로군. 하지만 해결책이 없지는 않소."
"그게 무엇이오?"
"일단 화약 사용법을 알려 주겠소."
"제조 기술 없이 사용법만 알려준단 말이오?"
의아해하는 만둘에게 야르하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소. 어차피 그쪽은 사용법도 없어졌을 것 아니오. 제조 기술만큼은 아니라도 제법 괜찮은 성과지 않소?"
"그건 그렇소."
"화약 제조 기술을 못 얻으면 의심을 받고, 얻으면 오이라트가 강해지지 않소. 하지만 사용법만이라도 얻어서 간다면 의심하기도 어렵고, 화약 사용법은 알아도 제조를 못 하니 오이라트가 그렇게 강해지지도 않소."
야르하치는 흥미롭게 듣는 만둘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사용법을 알아냈으니 조금만 더 하면 제조 기술도 빼내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금나라에서도 사용법이 새어 나간 것을 알고 더 경계할 수도 있으니 괜히 끼어들어서 일을 망치지 말라고 하면 교역이나 외교에 끼어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오. 어떻소?"
"오호라. 그거 괜찮군. 에센이 화약 기술에 탐을 내고 있으니, 기술을 얻어 낼 가능성을 보여 준다면 정말로 끼어들지 못할 것이오."
"대신 조건이 있소."
"조건? 무엇이오?"
"화약 사용법을 배우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오. 그러니 화약 기술을 빼내러 몰래 보낸다는 명목으로 영리한 이들 몇을 금나라에 보내시오. 그들을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숨겨두고 화약 사용법을 가르치겠소. 그리고 다 가르치면 돌려보내되, 몇 사람은 남겨 두겠소. 이것이 조건이오."
"역시 볼모가 있어야 하긴 하지. 알겠소."
진지한 만둘의 말에 야르하치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게 아니오. 우리가 가르쳐달라는 쪽이 아니고 가르쳐주는 쪽인데 왜 볼모를 잡겠소. 차라리 화약 사용법을 다 가르친 다음 이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대가를 내놓으라며 인질 삼으면 모르겠지만, 가르쳐서 돌려보내면서 몇 사람만 남기는 것이니 그런 것도 아니오."
"어…… 그럼 어째서요?"
"어디까지나 그들은 몰래 기술을 빼 오라고 보낸 첩자이지 않소. 그런데 첩자들이 아무리 화약 사용법만 알아냈다고는 하지만 전부 무사히 돌아오면 그게 오히려 의심스럽지 않겠소? 그러니 몇 사람 남겨 두어서, 사용법만 겨우 알아낸 다음 탈출에 성공했지만 몇 사람은 소식이 끊겼다고 하는 것이지."
"그럼 그 몇 사람은 붙잡혀서 못 돌아오는 게 되는 것이오?"
"그것도 아니오. 기술을 빼내러 온 첩자들이 잡혔다는 것은 몽골이 화약 기술을 빼가려 했던 것을 우리가 알았다는 말이 되는데, 그 상황에서 교역을 계속하면 이상한 상황이 되지 않겠소? 남겨 둔 몇 사람은 나중에 돌려보낼 것이오. 화약을 조금 들려서 말이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만둘이 말했다.
"무사히 추격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화약을 가져오는 데에도 성공한 것이 되겠군. 그런데 화약 조금 가져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소?"
"입수한 화약 사용법이 사실인지 실제로 확인해 볼 수 있소. 그리고 그 위력도 확인할 수 있지. 그렇게 되면 화약을 사 올 수 있게 될 것이오."
"화약을 사 온다니?"
"화약의 유용함도 알았고, 사용법도 알지만 만드는 법은 모르는 상황이지 않소. 차라리 아예 사용법도 못 얻었고 위력도 모른다면 모르지만, 화약의 위력까지 봤다면 그 에센이라는 자는 화약에 더 탐을 낼 것이오. 그때 우리한테서 화약을 사는 것이지."
야르하치의 말에 만둘이 당황하며 말했다.
"팔아 줄 것이오? 다른 것도 아니고 화약인데 위험하지 않소? 그보다 우리가 갑자기 화약을 산다고 하면 사용법을 빼갔다는 걸 들키지 않겠소?"
"사용법은 원래 알고 있던 것처럼 하면 그만이오. 아까 내가 물어봤던 것처럼, 몽골은 화약 기술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보통일 것이오. 화약 쓸 일이 많아서 생산량으로 감당이 안 되니 좀 팔아 줄 수 있냐고 하고, 우리가 알겠다고 하고 팔아 준다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소."
야르하치는 여전히 긴장한 표정의 만둘에게 말을 이었다.
"요동에서 데려온 화약 기술자에게 듣기로도 옛날에는 조선도 명나라에서 염초를 많이 사 갔고, 그 판매량을 제한해서 명나라가 조선을 견제하기도 했다고 하오. 시간이 지나서는 염초 만드는 기술이 생겼는지, 아니면 일본 해적들이 줄면서 쓸 일도 줄어서 그런지 안 사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말이오."
"사용법도 알고 제조 기술도 있지만 화약을 사 온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닌 것이로군."
"그렇소. 그리고 우리가 화약을 팔기 시작하면 괜히 제조 기술을 빼내려다가 금나라에 발각되면 아예 화약 수급이 끊길 수 있는 상황이 되니, 그때부터는 기술을 빼내려는 척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또 화약 수급에 교역과 외교가 중요해지니 북원 부족들의 중요성은 더 올라갈 것이오."
"어차피 화약 제조 기술이 있어도 생산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니, 차라리 돈을 주고 사 오는 게 나은 상황이 되는구려."
"그렇소. 그리고 몽골은 화약 생산을 못 하니, 화약 가격은 파는 쪽에서 마음대로 정할 수 있지."
만둘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오이라트는 명나라하고 교역하면서 말값을 크게 불러 이득을 보고있소. 그것을 금나라가 몽골에 화약으로 똑같이 하는 것이오?"
"맞소. 정확하게는 몽골에 똑같이 하는 게 아니라 오이라트에게 똑같이 하는 것이고, 이득은 금나라만이 아니라 그대도 보게 될 것이오."
그 말에 만둘의 눈이 빛났다.
"이해했소. 어차피 화약을 필요로 하는 것도, 돈을 내는 것도 전부 오이라트지. 화약값을 최대한 높게 불러서 오이라트가 돈을 많이 내게 한 다음, 실제로는 그것보다 낮은 값으로 교역해서 우리에게도 이윤을 떼어주는 것이로군."
"맞소. 우리도 이득이고 그대들도 이득이지. 게다가 화약은 우리도 필요한 것이라 많이 팔 수 없다는 이유로 교역량을 조절할 수 있소. 화약은 쓰면 없어지는 물건인 데다가 잘못 보관하면 못쓰게 되니, 새롭게 파는 양을 잘 조절하면 오이라트가 보유한 화약의 양을 우리가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오이라트의 권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소."
"오이라트의 화약 보유량은 그럼 우리가 알려주면 되겠군. 아주 좋소. 그럼 조만간 똑똑하고 믿을 만한 이들을 추려 첩자로 보내겠소. 잘 가르쳐 주시오."
"물론이오. 기대하고 있겠소."
대화를 마친 두 사내는 마주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지만, 그 속내는 조금 달랐다.
'금나라에는 화약 보유량을 속이고 오이라트에는 화약값을 속인다. 그러면 화약과 군자금을 모두 비축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오이라트가 권력을 잡건 북원 부족이 권력을 잡건 화약으로는 우리에게 종속되리라는 것을 눈치 못 챈 모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