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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35화 (23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35화

235화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최만리가 입을 열자 좌중에 적막과 긴장감이 흘렀다. 물론 집현전의 수장은 대제학인 정인지고, 실제로도 정인지는 집현전 내에서도 이론과 실무를 모두 아우르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은 정인지가 특이한 것이고, 원래 대제학은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다. 결국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은 최만리인데, 그런 최만리의 의견은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우리 조선은 태조대왕께서 왕업을 여셨을 때부터 상국을 지극히 섬기고 그 제도를 본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처음 전하께서 글자를 만드셨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매우 놀랐습니다."

반대파와 신중파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이었다.

"하오나 신이 거듭 생각하여 보니 이 글자는 정음이라는 이름대로 실로 올바른 글자이니, 전하께서 뜻하신 대로 하시는 것이 옳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좌중의 그 누구보다도 집중한 양녕의 시선을 받으며 최만리가 말을 이어갔다.

"물론 조선이 사대를 지켜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대는 작은 나라가 현명해서 하는 것이고 사소는 큰 나라가 어질어서 하는 것이니, 이는 살아남기 위한 방책이지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태조대왕께서도 명나라가 조선을 핍박할 때 요동을 칠 계획을 세우시려던 것 아니겠습니까."

조선이 명나라를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던 사례 중 가장 강한 것이 거론되자 몇몇 신하들이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게다가 사대를 한다 해서 꼭 제도까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옛것을 따라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살펴보면 옛 제왕들의 업적은 그 전에 없던 이로운 것을 새로 만든 것도 있고, 오래 이어져 왔으나 그른 습속을 폐지한 것도 있습니다. 하물며 이미 조선에 성인이 여럿 나셨는데, 글자를 새로 만드는 것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잠시 최만리의 말이 멈추자 집현전 응교 정창손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오나 중화의 문물이 발달했고 그 제도가 문명의 중심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들을 받아오려면 오히려 중화에 더 가까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물과 제도라 하였는가? 목화는 중국에서 들여온 작물이지만 명나라 조정에서 귀히 여기는 것은 조선의 면포이고, 종이는 채륜이 발명한 것이지만 천하에 이름난 것은 조선의 종이일세. 누가 누구의 문물을 받아 가고 있는가? 제도도 마찬가지야. 황제의 무덤에 산 사람을 죽여 묻는 나라와 옛 예법대로 석회만을 써 간소하게 능을 꾸미는 나라. 누가 더 중화의 제도를 따르고 있고, 누가 누구를 배워야 하겠는가?"

그 말에 정창손이 조용해지자 최만리는 다시 이도에게 말했다.

"또한 맹자께서 이르시길 중화로서 오랑캐를 변화시킬 수는 있으나 오랑캐로서 변화시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이미 남으로 칠주도를 얻고 북으로 넓은 땅을 얻어 그곳의 야인들을 교화했습니다. 이것은 조선의 법식이 오랑캐의 것이 아니라 문명의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자께서 조선을 교화하신 이후로도 상투를 틀고 흰 옷과 바지를 즐겨입는 삼한의 풍속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기자께서도 이것이 삼한의 풍속이 교화해야 할 오랑캐의 것이 아니라 문명의 것이기에 그냥 두셨을 것이며, 말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글자를 지어 말과 쌍을 이루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 교화를 완성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삼한의 말을 나타내는 글은 이미 이두가 있고, 그 역사도 오래지 않습니까?"

직제학 신석조의 말에 최만리의 눈이 번뜩였다.

"이두는 오래된 것이나 그 근원이 한자인데, 어떤 것은 음에서 따서 읽고, 어떤 것은 뜻에서 따서 읽는 통에 오히려 처음 배울 때 혼란스럽기 마련이네. 게다가 글자마자 한자를 그대로 쓰니 바로 보아서는 이것이 이두로 쓴 것인지 문장의 일부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워. 그러나 정음은 소리만을 읽는 것인데다 한자와 생김이 다르니 아무리 섞어 써도 그럴 일이 없고, 한자의 소리를 쉽게 익히는 데에도 도움이 되네. 처음부터 한문을 익히게 하는 것이 한 길 높이를 바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라면, 정음부터 가르치는 것은 계단을 놓는 것과 같으니, 오히려 백성을 가르치는 데에도 더 뛰어나네."

"하지만 그렇다면 정음만 익혀도 글이 통하니 거기서 만족하고 멈추는 이가 생길 것입니다. 또 정음만으로 관리가 되고 업무를 본다면 분명 옛 성현들의 글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백성들은 당연히 정음만 익혀서 써도 충분할 것이고, 관리를 뽑을 때 한문도 시험을 보면 되는 것 아닌가? 애초에 전하께서는 정음만으로 관리를 뽑겠다는 말씀은 하신 적이 없네."

말문이 막힌 신석조를 똑바로 보며 최만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정음이 있다면 관리가 백성들에게 소식을 전하거나 가르치고, 의견을 듣는 데에도 훨씬 수월하네. 28자로만 되어 있고 그 구조가 명쾌하니, 영리한 자라면 하루아침이면 다 익힐 수 있어서 익히느라 시간을 잡아먹지도 않아. 정음은 백성들보다도 관리들이 반겨야 할 걸세."

"그 말씀이 맞습니다."

신석조가 순순히 인정하자 최만리는 만족스러운 듯 작게 끄덕였다.

"조금 전에 말과 글이 같다 하여 명나라에 억울한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는 반만 맞는 말입니다. 한문은 변함없이 이어왔지만 중국인들이 일상에서 쓰는 말은 계속 바뀌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을 백화문이라 하여 구분하는 것 아닙니까. 삼한 말과 한문만큼은 아니지만 백화와 한문도 차이가 있고, 처음 배우는 이에게 한자가 어려운 것은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결국 명나라에서 일어나는 억울한 일도 말과 글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최만리가 먼저 입을 열어 선수를 쳤다.

"물론 제도로서 해결해야 하는 억울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과 글을 통하게 하면 억울한 일 열 건을 다섯 건으로 줄일 수 있는데, 다섯 건이 남는다 해서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반대로 제도만으로 열 건을 모두 없앨 수 있겠습니까?"

최만리의 말을 흥미롭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도가 말했다.

"조금 전에 너무 급하게 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소. 그것은 어찌 생각하시오?"

"급하게 하여 문제가 된다고 하는 것은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고 시행부터 했을 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잘 살피지 않고 만든 법은 허술해서 조령모개(朝令暮改)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음은 전하께서 오래 숙고하시어 만든 지극히 현묘한 것 아닙니까. 이미 완성된 것인데 굳이 시간을 더 들일 것 없습니다. 물론 정음을 더 낫게 고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최만리와 이도가 거의 동시에 좌중을 슬쩍 둘러보자 반대 혹은 천천히 진행하자는 의견을 내던 신하들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최만리는 그 광경에 피식 웃지도 않고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음은 훈민정음이라는 이름대로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가르침이란 본디 백 년 뒤를 내다보고 하는 것입니다. 당장 지금 시행하더라도 다다음 세대까지도 그 결과를 온전히 볼 수 없을 것인데, 이미 다 완성된 것을 두고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번 일에 세자도 같이 참여시킨 것이 문제가 된다는 의견도 얼핏 나왔던 것 같소."

"지극히 그른 말입니다. 동궁께서는 나라의 동량입니다. 진시황은 나라에서 쓰이는 글자가 저마다 달라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자 승상 이사를 시켜 소전체를 정리했습니다. 문자에 관한 일이란 이처럼 황제가 지시하여 승상이 맡을 정도로 중요한 것인데, 지존과 동궁께서 함께 하셨다고 해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음을 다루는 일에 동궁께서 빠지셨더라면 차라리 그것이 문제라 했어야 옳을 것입니다."

최만리가 말을 마치자 다시 좌중에 적막이 찾아왔다. 다른 의견도, 질문도 더 나오지 않자 최만리가 정리하듯 말했다.

"저는 분에 넘치게도 관직에 들어서면서부터 양녕대군을 따라 여러 곳을 다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지금도 비록 자리는 부제학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모자란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신의 관견으로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정음이 곧 온 조선을 바꾸리라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찬성이나 반대도 아니고, 의견도 아니고 예측이라니 의외로구려."

이도의 말에 최만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전하께서 마음을 굳히고 모든 것을 준비하셨을 것인데, 설령 부제학인 제가 찬성하건 반대하건 어심에 조금의 흔들림이라도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설령 반대하고 막으려 든다 해도 정음은 사람의 힘으로 틀어막을 수 있는 글자가 아닙니다. 그저 제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전하께서 정음으로 이루실 위업에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최만리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듣던 양녕은 흐뭇한 표정으로 최만리를 바라보았다.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람이 교육과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냐고 물었지. 그리고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환경을 접해보라고도 했고 말이야. 그 뒤로 자네가 어떤 사람이 될지 20여 년을 지켜보았네.'

양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지금 돌아왔군.'

한편 사정전 안은 아까의 소란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고요했다. 집현전 대제학인 정인지는 시작부터 정음에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뜻을 밝혔고, 부제학인 최만리는 논거와 전례를 들어가며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반대한들 소용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양녕도 자리에 있었으니, 이들 전부를 말로 이길 자신이 있거나, 괜히 찔러 볼 정도로 정신이 없지 않은 다음에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더 의견도 없는 것 같고, 다들 정리가 된 듯 하니 다음으로 넘어가겠소. 훈민정음의 반포는 며칠 전 내가 말했던 대로 진행할 것이오. 다만 오늘 몇 가지 생각한 바가 있어서 몇 가지 바꾸고자 하오."

그 말에 일말의 희망을 품은 몇몇 신하들의 기대는 이어지는 이도의 말에 바로 무너졌다.

"훈민정음의 반포는 물론이고 연구와 한자음 정리, 서적 편찬, 인쇄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업무를 총괄할 관청을 새로 만들고, 그 이름은 정음청이라 할 것이오. 정음청에는 업무를 총괄할 도제조를 한 사람 둘 것인데, 이것은 문형께서 겸임하시오."

이도의 말에 정인지가 대답했다.

"예, 전하."

"그리고 도제조를 도울 제조를 세 사람 둘 것인데, 정음청이 할 일이 많으니 업무의 경계를 따로 두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하길 바라오. 우선 양녕대군."

"예, 전하."

"다음으로는 진양대군."

이유는 자리에 없었기에 이도는 바로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부제학께서 겸임하시오."

"예, 전하. 신 최만리, 성심을 다하여 정음으로 이루실 위업을 돕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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