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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34화 (23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34화

234화

1441년 9월 중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연생전.

강녕전의 동쪽, 복도로 연결된 부속 건물인 연생전에는 양녕과 이유만이 있었다. 삼한말의 문법을 정리하는 것은 양녕의 건의대로 이유가 맡게 되었지만 혼자서 다 할 수는 없으니 양녕이 도와야 했다. 그런데 밖에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훈민정음 관련 작업을, 그것도 대군 둘이서 이목을 피해서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침전 부근 말고는 딱히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문법, 그러니까 말의 규칙을 따져가며 보니 정말로 삼한말은 한문과는 엄청 동떨어져 있습니다. 백부께서 주신 자료를 토대로 비교해보니 삼한말은 차라리 여진말이나 몽골말과 더 닮았고, 가장 닮은 것은 일본말인듯합니다."

이유는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탁자 위 가득한 종이들을 살피고 있었다. 추천했던 양녕이 오히려 놀랄 정도로, 이유는 문법에 관해서는 재능과 의욕을 모두 보였다. 어찌나 의욕이 넘쳤는지 평소 즐기던 승마마저 줄이고 그 시간을 전부 문법 연구에 쓸 정도였다.

'원래 역사에서 석보상절과 같은 빼어난 국어 작품들을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고 추천한 것인데, 내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언어 쪽 능력이 뛰어나다. 게다가 내가 추천하고 주상이 승인한 것이니, 인정받고 싶던 두 사람에게 동시에 동기부여를 받은 셈이다. 의욕이 안 넘칠 수가 없지.'

양녕은 이유가 제대로 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해내고 이도에게 인정을 받아 자신감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법 정리를 이유에게 맡기자고 건의한 것이고 이도 역시 그 속내를 알고 승인한 것이었는데, 생각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실제로도 정동군이나 회경군 병사들은 일본 말과 여진 말을 쉽게 배우곤 했다. 네 말대로 문법이 비슷해서 그런지도 모르겠구나."

이미 아는 사실임에도 양녕이 모르는 척 칭찬해주자 이유가 신나서 말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일본인과 여진족들도 삼한 말을 쉽게 배웠겠습니다."

"맞아. 물론 그들에게는 삼한 말을 할 줄 알아야 조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큰 동기가 있기도 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역시 그랬군요. 그리 생각하니 조금 아쉽습니다. 정음이 세상에 일찍 나왔더라면, 칠주도를 정벌하고 동북면을 수복한 다음 그곳에 사는 일본인과 여진족들에게 삼한말을 가르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이미 그렇게 쓰기에는 늦은 감이 있지요."

이유의 그 말에 양녕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혹여 주상께서 칠주도 정벌 때 이미 정음을 완성하셨더라도 세상에 내보이지 않으셨을 게다."

"어째서입니까?"

의아해하는 이유의 질문에 양녕은 탁자 위에 펼쳐진, 여진 말과 몽골 말, 일본 말 등등이 정음으로 적힌 종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종이들을 보거라. 정음은 본래 삼한말을 적기 위해 주상이 만드신 것이지만, 다른 말을 적는 데에도 능히 쓸 수 있다.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인지라 그냥 적으면 그만이니 어려울 것도 없지."

그 얘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던 이유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해했습니다. 삼한 말을 가르치기 위해 정음을 가르치면, 그들이 정음으로 자신들의 말을 적고 남길 수도 있게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일본 말과 여진 말 모두 한자에 기대지 않고서는 적을 방법이 마땅치 않은 탓에, 지금 조선이 그러하듯 말과 글이 맞지 않는 불편함이 있다. 그런데 말은 입 밖으로 나오면 흩어져서 남지 않고, 글은 어차피 한문으로 적으니, 그들이 원래 쓰던 말을 버리고 삼한 말을 하게 되더라도 흔적이 남지 않아. 하지만 만약 그들이 정음을 알았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말을 그대로 글로 남길 수 있고, 배우기 쉽고, 기록하기 쉽다는 정음의 장점이 다른 말에도 그대로 적용되겠군요. 게다가 일본 말이나 여진 말은 발음이 복잡하지 않으니, 오히려 삼한 말을 적을 때보다도 간결하고, 배우고 쓰기도 쉽겠습니다."

양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칠주도의 일본 말과 동북면의 여진 말은 더 오래 남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들을 조선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은 더 어려웠겠지. 그러니 주상께서 만약 정음이 오래전에 완성하셨더라도 지금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보이셨을 것이다."

양녕은 냉정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칠주도와 동북면을 확보하고 조선인들을 이주시킨 다음, 원래 말을 쓰던 이들은 조선인들 사이에 최대한 흩어지고 섞여 살게 해 동화시켰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고을에서 삼한 말만이 쓰이지. 이 상황에서는 정음이 널리 퍼지고, 원래 쓰던 말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가 정음을 익히더라도 원래 말을 기록하는 데에 쓸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 주변에서 삼한 말만이 쓰이니 원래 말을 기록해 봤자 쓸모가 없을뿐더러, 차라리 그 필기구를 삼한 말을 기록하는 데에 쓰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원래 말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비록 기록으로는 일부 남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죽은 말의 기록이니 의미가 없을뿐더러, 여차할 때 없애기도 쉽겠지."

"비록 일본과 금나라가 남아 있으니 두 말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뭔가 아쉽고 아까운 기분이 듭니다."

이유의 말에 양녕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겠나. 나라의 일이란 그런 것이야. 오래되었고 특이한 것이라 하여 무작정 전부 남길 수도 없고, 반대로 당장의 필요가 없다고 함부로 없앨 수도 없지. 그런 수많은 가치를 저울에 달아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 곧 정사를 돌보는 것이야. 그래서 어려운 것이지."

"실로 막중한 일이군요."

심란해하는 표정의 이유를 보던 양녕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말이 사라진다는 얘기를 하니 생각이 난 것인데, 우리가 삼한 말의 문법을 정리한다고 해도 정확하게는 지금 쓰이는 말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그렇지요?"

"그렇다면 아무도 쓰지 않게 된 옛 삼국의 말. 말 그대로 진짜 삼한 말이 세월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 말과 문법을 책으로 정리해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미 사라진 부분도 많겠지만, 그래도 더 사라지기 전에 남겨두는 게 좋으니 말이야."

그 말에 이유는 조금 전의 심란한 표정은 어디론가 가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실로 좋은 생각이십니다. 정음을 쓰면 그 소리도 남길 수 있을 것이고, 책으로 정리하고 인쇄해서 여러 부를 만들면 더 사라지지 않겠지요. 그렇게 옛것을 남겨 두는 것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혹여 옛 삼국의 책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 그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이다."

"그리고 정음을 써서 소리를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옛 삼국의 말만이 아니라 지금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 역시 그대로 남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양녕은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전에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그것으로 주상과 동궁을 보좌해 달라 하면서, 예로부터 백성들의 노래를 모아 책으로 정리하던 것이 바로 백성들의 삶과 생각을 잘 알고자 하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하려는 것을 보니 다행히 내가 이 아이를 잘 이끌고 있는듯하구나.'

"물론이다. 마침 주상께서 음의 높낮이는 물론 길이까지 기록할 수 있는 악보도 만드셨으니, 네 말대로 백성들의 노래를 정음과 악보로 남긴다면 천년이 지난 후에라도 그대로 부를 수 있겠구나."

칭찬에 신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들뜬 표정으로 이유가 말했다.

"그리고 정음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또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지금 조선 땅 곳곳에 옛 왕들이 쓰던 물건, 명필이 남긴 글씨와 그림, 절의 건물과 불상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진귀한 것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몽골과 전쟁하다가 타 버리거나 왜구들에게 약탈당한 것이 많음에도 이 정도이니, 원래는 더욱더 많았겠지요."

"그랬겠지. 황룡사의 탑도 주춧돌만 남아 있으니 말이다."

"그런 것들은 삼한이 그 역사가 깊고 문화가 뛰어남을 보여주는 것이자, 옛것을 배워 새것을 만드는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번 훼손되거나 사라지면 그것으로 끝나버리지요. 이러한 나라의 보물들을 나라에서 잘 살피고 관리해서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어쩌면 서예가 취미이고 불교에도 관심이 많기에 가능했을, 시대를 앞서간 그 말에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주 좋다. 그리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 될 것이고, 세상 많은 것이 바뀌겠지. 하지만 우선은 정음에 관한 일부터 끝내자꾸나. 그다음에는 네가 하고자 하는 것들 전부 다 내가 도와주마."

* * *

그로부터 반년 뒤.

1442년 3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사정전은 대소신료들로 가득했다. 무언가 논의할 일이 있으면 수시로 신하들을 모으던 이도인 만큼 그 자체로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오늘은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신하들은 술렁이고 있었고, 옥좌에 앉은 이도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만 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양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이렇게 될 수밖에 없군.'

발단은 며칠 전이었다. 훈민정음이 완성되자 이도가 신하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바로 반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임금이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글자 자체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고, 또 바로 반포하라는 말에 신하들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의견이 있는 신하들이 모여 이도를 알현하기로 했고, 이도도 의견은 들어보겠다며 수락했지만 거기에 또 문제가 있었다.

"한자 아닌 문자를 새로 만들어서 쓴다면 명나라에서는 이것을 자신들의 편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트집을 잡아서 심요도를 다시 뺏어가려 할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중화는 문명의 근원입니다. 한자를 널리 가르쳐 다가갈지언정, 오히려 다른 글자를 만들어 멀어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앞선 문물을 받아오기 어려워지는 것 아닙니까."

"전하께서 아예 한자를 버리시려는 것이 아니지 않소. 한문도 쓰고 새 글자도 쓰면 되는 것이오. 몽골도 따로 말과 글자가 있지만 명나라와 외교할 때는 한문을 쓰지 않소."

"맞습니다. 오히려 새 글자는 한자를 익히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알현하러 온 신하들의 의견들도 저마다 다 달랐던 탓에, 알현이 갑자기 토론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저는 새 문자는 찬성이지만, 너무 급하게 하신 것 아닌가 합니다. 빠른 것이 능사가 아니니, 갑작스럽게 반포하시기보다는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천천히 진행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 하셨는데, 그것은 제도로써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말과 글이 같다 하여 명나라에 억울한 일이 없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찬반을 넘어선 의견까지 나오면서 토론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어디선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좌중의 시선을 받으며, 오늘 사정전에 온 이후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한 사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신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아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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