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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33화 (23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33화

233화

1441년 6월 하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늦여름 더위에 다시 등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이도와 양녕은 정음에 관해서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 삼한 말을 기록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한자의 소리를 정확하게 규정하시는 데에도 정음을 쓰시려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한자는 글자만 보고는 읽는 법을 알기 어렵습니다. 대체적으로 규칙을 따르지만 예외도 많지 않습니까. 그 탓에 중국에서도 한자의 소리가 잘못 전해지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쌓여서 한 글자에 발음이 여럿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 일본도 비슷합니다. 심지어 일본은 발음이 제대로 전해져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삼한을 통해 들어온 한자어는 당시의 삼한 발음이, 당나라 때 들어온 한자어는 당나라 때의 발음이, 송나라 때 들어온 한자어는 송나라 때의 발음이 전부 그대로 남은 탓에 한 한자에 읽는 법이 하나만 있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지경입니다."

"역시 일본도 그렇군요. 다행히 삼한은 중국과 가깝고 교류도 꾸준히 한 데다가, 반절법을 써온 덕인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읽는 법이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지요. 그렇게 읽는 법이 여럿인 한자는 정음으로 표기하면 형태가 전부 달라져 원 뜻을 알아보기 어려워지니, 차라리 한자로 쓰는 게 낫습니다. 한자로 쓰더라도 상황마다 읽는 법이 다르니 새로 학문을 배우려고 하는 이들에게 큰 장벽이 되지요. 이런 게 남아 있다면 절대로 한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도의 말에 양녕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역사에서도 한자 발음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일본은 21세기에 이르러서도 한자를 버릴 수 없었고, 결국 '중국어'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언어 가운데 유일하게 한자를 상용하는 언어로 남아 버렸다.

"그래서 음을 나타내는 글자인 정음을 써서 한 한자에 한 발음만을 정확히 규정하시려는 것이로군요."

"예. 그렇게 규정한다면 한자 대신 정음으로만 표기하더라도 큰 혼란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정음은 모아서 쓰는 글자이니 한자로 쓰나 정음으로 쓰나 글자수도 똑같지요. 한자를 써놓고 옆에 정음으로 발음을 달거나, 정음으로 써놓고 옆에 한자로 뜻을 달거나 길이의 차이가 없습니다. 장차 정음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반이 되겠지요."

그 말에 양녕이 감탄하며 말했다.

"정음으로 한자를 대신할 수 있으려면 한자의 음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한자의 음을 통일하는 데에 정음을 쓴다니, 실로 오묘한 일입니다. 시작과 끝이 같은 것이 꼭 정음의 첫소리와 끝소리는 같은 글자를 쓰는 것과 닮았군요."

그 말에 무언가 문득 떠오른 양녕이 앞에 펼쳐진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상, 정음은 첫소리와 끝소리는 글자가 같고, 중간소리는 다른 글자를 쓰지 않습니까?"

"예. 첫소리와 끝소리는 소리 내는 기관의 모습을 딴 글자고, 중간소리는 천지인의 형상을 딴 글자지요.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첫소리와 끝소리를 묶어 자음이라 하고, 중간소리를 모음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첫소리와 끝소리가 비어도 소리는 날 수 있지만, 중간소리 없이 첫소리와 끝소리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수는 있어도 자식이 홀로 태어나지는 않는 것과 같으니 말입니다."

양녕의 말을 듣고 잠시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내려다보던 이도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음과 모음이라. 과연 그렇게 묶으면 첫소리와 끝소리가 같다는 것을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되고, 그 성질 또한 잘 나타낼 수 있겠습니다."

기뻐하는 이도를 보고 흐뭇하고 웃던 양녕의 눈에 문득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런데 주상, 종이 왼편에 따로 적어놓은 이 자음들은 무엇입니까?"

펼쳐 놓은 종이 왼편, 즉 문서 뒷부분에 따로 적힌 것은 특이하게 생긴 자음들이었다.

"아, 쓰이지 않는 자음들을 따로 모아놓은 것입니다."

"쓰이지 않는 자음이요?"

양녕의 질문에 이도는 종이 오른편에서는 ㄹ을, 왼편에서는 ㄹ 밑에 ㅇ이 적힌 자음을 양손으로 각각 짚고는 말했다.

"예. 이 두 자음은 소리가 다르고, 삼한 말에서도 둘 다 발음됩니다. 하지만 서로 바꿔서 쓴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달라지지 않지요. 그래서 하나만 남겼습니다."

이도가 말한 것이 R과 L의 발음임을 바로 알아차린 양녕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른 자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ㅅ에서 파생된 다섯 자음의 왼쪽 아래 획을 길게 하거나 오른쪽 아래 획을 길게 한 자음들이었다.

"그럼 이것은 무엇입니까?"

"아, 그 자음들은 중국 말을 적기 위한 것입니다. 삼한 말에서는 쓰이지 않고, 발음도 다 비슷비슷하게 들리지만 중국 말에서는 구분되어 쓰이는 소리들이지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획 길이를 다르게 해서 만든 자음들입니다."

"중국 말을 나타내는 방법은 정음에 부수적으로 딸려 오는 것일 뿐이군요."

"물론입니다. 삼한 말을 나타내기 위한 글자니까요."

그렇게 대답한 이도가 자신있게 미소 짓는데, 양녕이 문득 궁금해진 것을 물었다.

"그러고보니 정음의 형상은 소리 내는 기관과 천지인의 모양을 딴 것이라 하셨는데, 글자의 모양이 직선과 동그라미인 것은 전서체의 서체를 따오신 것입니까?"

"맞습니다. 그 모양을 간결하고 쉽게 만들어서, 백성들이 배우고 읽고 쓰기가 쉽고, 설령 지필연묵이 없더라도 흙바닥에 나뭇가지로도 쓸 수 있게 하기 위함이지요. 그리고 다른 뜻도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도가 야심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서체는 모든 서체 중에 가장 오래된 서체입니다. 그 글자에 위엄과 권위가 모두 담겨있어서 도장과 비석에 지금까지도 널리 쓰이지요. 이 정음은 비록 갓 만들어진 글자이나 거기에는 전서체만큼, 어쩌면 그 이상의 힘과 위엄이 있습니다. 전서체와 비견될 글자이니 전서체의 서체를 따라야지요."

"역시 주상께서는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대체 뭐가 부족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들딸과 형님들께 이리 도움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도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양녕은 오히려 더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이도를 보았다.

'이미 이 시대에 가능한 언어학과 음운학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훈민정음이다. 그런데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니, 정말로 시대마저 뛰어넘은 재능이야.'

"정음을 더 낫게 만들 방법이 몇 떠올랐습니다."

그 말에 이도가 화색을 띠며 물었다.

"무엇입니까?"

'내가 언어학이나 음운학에 정통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래 역사에서 당연하게 쓰던 것들이 언어학과 음운학에 통달한 수많은 학자의 노력의 성과인 것은 알고 있지. 그 결과물을 쓸 것이다.'

"우선 정음으로 삼한 말을 적을 때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이 드러나는 모양으로 적는 것입니다."

양녕의 말에 이도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형님께서도 그 생각을 하셨군요."

의외의 반응에 양녕이 물었다.

"주상께서도 생각하셨던 것입니까?"

"예. 저도 처음에는 소리 나는 대로가 아니라 뜻이 드러나는 모양으로 적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진양에게 물어보니 조금 다른 의견을 내더군요.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글자인데 정작 백성들이 익히기 어려워지고, 잘못 쓰는 이들이 많아지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양녕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하긴 원래 역사에서도 단어의 원래 모양을 몰라 들리는 대로 쓴 탓에 우스꽝스러워지거나, 반대로 차라리 들리는 대로 썼으면 맞았을 것을 괜히 복잡하게 써서 틀린 것들이 인터넷에 유머로 돌아다니곤 했지. 대학생들조차 그랬을 정도이니, 이 시대의 백성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차라리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것을 표준으로 삼아 버리면 그럴 걱정은 없지.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정음을 배우고 쓰기는 쉬워질지 몰라도 그 이상을 깨우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중국 말과 달리 삼한 말은 같은 말이라도 앞뒤로 오는 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소리 나는 대로 쓴다면 같은 말이라도 모양이 다 달라져 버릴 수 있지요. 한자 발음이 여럿이라 생겼던 문제가 삼한 말에서도 그대로 생길 수 있습니다."

"예. 그래서 일단은 소리 나는 대로 쓰는 법을 먼저 가르치고, 백성들이 충분히 정음을 익히고 나면 뜻을 살려 쓰는 법을 가르쳐 바꾸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양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이미 적응되어 버리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니, 맨 처음에 잘 퍼뜨려야 합니다."

양녕이 딱 잘라 안된다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 중국이 간체자 보급에 성공한 다음 2차로 더욱 간략하게 만든 간체자로 대체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 이미 처음 보급된 간체자가 너무 자리 잡은 탓에 바꾸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지.'

물론 그 사례를 그대로 들 수 없으니 다른 비유가 필요했다.

"백성들은 더 간편하고 좋은 농법이 있더라도 기존의 불편한 농법을 쉽게 버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먹고 사는 것에 직결된 농법도 아니고 글자를, 그것도 쉬운 것을 먼저 가르쳐놓고 어려운 것으로 바꾸려 한다면 당연히 잘되지 않을 것입니다."

"두고두고 문제가 되느니, 차라리 백성들에게 가르칠 때 조금 더 힘을 들이더라도 처음부터 뜻이 드러나는 모양으로 적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낫지요. 형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역시 제가 처음 했던 생각이 맞았다는 확신이 드는군요.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이도가 다시 양녕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방법이 몇 개 떠올랐다고 하셨으니 이게 다가 아니겠군요. 다음 방법은 무엇입니까?"

"언문으로 적을 때 말과 말 사이를 띄어 적는 것입니다."

"말과 말 사이를요? 정확히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아예 생소한 띄어쓰기라는 개념에 이도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물어보자 양녕이 설명했다.

"한문으로 적은 것은 한자 하나하나가 뜻을 가지고 나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끊어 읽는지에 따라 문장 내용이 달라져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하물며 정음은 뜻이 아니라 소리를 나타낸 글자이고, 삼한 말은 여러 소리가 모여서 한 뜻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전부 붙여서 쓴다면 분명 읽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문에서 끊어 읽으라는 뜻으로 구절이 끝나거나 문장이 끝날 때 점을 찍는 것처럼 점을 찍어서 표시해도 되지 않습니까?"

"정음은 선과 점으로 된 글자입니다. 점을 찍어서 나누면 그 점이 글자의 일부인지 끊어 읽으라는 표시인지 혼동될 수 있습니다. 혼동이 되지 않을 정도로 글자와 점 사이 간격을 띄운다면, 결국 점 없이 띄우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요."

"그렇군요. 흥미롭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봐야겠군요. 혹시 또 방법이 있으십니까?"

"예. 마지막으로는 삼한 말의 규칙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중국 말은 모양은 변하지 않고 위치에 따라 쓰임과 뜻이 달라지지만, 삼한 말은 모양이 변할 수 있고 위치가 달라지더라도 모양에 따라 뜻이 그대로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중국 말과는 다른 삼한 말의 규칙이 있을 것이니, 이것을 명확히 정리해야 합니다."

삼한 말의 문법 정리라는 새로운 개념을 처음 접하고 눈을 빛내는 이도를 향해 양녕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진양에게 맡겨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양녕은 이유에게 걸어 볼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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