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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31화 (231/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31화

231화

1441년 5월 초순 모일.

거솔도. 공험진.

양녕은 탁자 맞은 편에 앉은 금나라 훌룬부의 버일러, 도르호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조선의 양녕대군이오."

"나는 나라 가문 사람, 금나라 훌룬부의 버일러 도르호치요. 오랜만에 뵙는구려."

"오랜만이라니? 우리가 구면이었소?"

양녕의 물음에 도르호치가 웃으며 말했다.

"지난 전쟁에서 심양성이 함락당하던 날, 기병대를 이끌고 한을 구출한 게 바로 나였소. 그리고 말을 타고 쫓고 쫓기다가 잠시 멈췄을 때 한의 옆에 서 있던 것도 나였고 말이오. 서로의 얼굴은 그때 처음 보았을 것이오."

"정말 구면이었군. 처음 알았소."

"그럴 만하오. 그때 한과 대군께서 앞으로 나와 얘기를 하셨으니 나야 대군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지만, 그때 딱히 내가 훌룬부의 버일러라는 소개는 하지 않았으니 대군께서 내 얼굴을 기억하실 리가 없지."

"그런 거였군. 한께서는 잘 지내시오?"

"덕분에 잘 지내시오. 정말로 대군 덕분이지."

"무슨 뜻이오?"

"지난 전쟁에서 판차가 이끌던 오돌리부와 무타우타가 이끌던 호이파부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버일러도 잃었소. 하지만 강한 두 세력이 약해진 덕에 한께서 권력을 확고히 하실 수 있었지."

그 말에 양녕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물론 오돌리부와 호이파부를 궤멸시키고 두 버일러를 죽인 것이 조선이긴 하지만, 결국 요동 땅을 잃고 북쪽으로 천도하게 된 것도 사실이지 않소. 한에게 버일러들을 잃고 전쟁에서 진 책임을 물으려는 자가 없었단 말이오?"

"오돌리부는 속한 부족들이 전부 몰락한 데다가 기오로 가문의 대까지 끊겨 버렸고, 호이파부는 무타우타가 가지고 있던 버일러의 자리를 두고 수허 가문 안에서 내전이 일어났소. 한쪽은 책임을 물을 여력이 없고, 한쪽은 한에게 잘 보여서 버일러 자리를 얻으려 하는데 누가 책임을 묻겠소."

"버일러가 그 둘만 있던 것은 아니지 않소."

양녕의 그 말에 도르호치가 씨익 웃었다.

"나 말이오? 내가 왜 한에게 책임을 묻겠소? 그 전쟁 덕분에 훌룬부의 중심지였던 숭가리 강(송화강) 일대가 금나라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고, 훌룬부가 한의 훌리가이부 다음가는 자리를 차지했는데 말이오. 오히려 한에게 책임을 물으려 한 놈들이나 그 자리를 노리려던 놈들은 내가 먼저 나서서 제압해 버렸소."

"버일러께서는 욕심이 나지 않으셨소?"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소. 지금의 한이 가진 권력과 위엄, 지략과 대담함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오. 내가 그 자리에 올라 봤자 여진족들을 제대로 이끌 수 없겠지. 그러니 쇠약한 금나라의 한이 되는 것보다는, 강성한 금나라의 2인자가 되는 것이 훨씬 현명한 판단 아니겠소?"

'실제로는 금나라 내부가 혼란스러운데도 조선에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군. 하긴 그랬다면 진작에 분열되어 조선 편으로 붙으려는 이들이 나왔을 것이고, 이렇게 도르호치가 근거지 멀리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양녕은 도르호치의 말로부터 판단을 내린 뒤 입을 열었다.

"그 큰 패배를 겪고도 오히려 권력을 공고히 하다니, 실로 한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구려. 대단하오."

"고맙소. 그 칭찬은 내가 한께 전달해드리겠소. 자, 그럼 대군께 금나라 소식도 많이 들려드린 것 같은데,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어떻겠소?"

직설적인 그 말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야지. 교역을 다시 시작하지 않겠소? 아, 여진족으로서가 아니라 금나라로서 조선과 교역하는 것은 처음이니 새롭게 시작하자고 하는 게 맞겠군."

"교역이라니. 명나라 눈치가 보여 못 하는 것 아니었소?"

"눈치 보면서 계속 안 하고 있던 것은 맞소. 하지만 말이며 모피며 조선이 여진족과 교역해서 얻던 것들이 많았는데, 그것들이 끊기고 나니 여러모로 곤란해져서 말이요.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어서 몰래 교역을 하고자 하는 것이오."

"저번 전쟁에서 보니 조선 기병들도 좋은 말을 타고 있었고, 담비처럼 좋은 모피를 얻을 수 있는 짐승들이 사는 땅도 거의 다 조선 땅이 되었는데 그 둘이 부족하단 말이오?"

약간 의심스러워하는 도르호치의 말에 양녕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 말들을 우리가 누구를 통해서 들여 왔을 것 같소. 그리고 짐승들이 많이 살면 뭐하오, 사냥을 잘해야 모피가 생기지. 애초에 부족하질 않았다면 우리가 명나라에게 들키는 위험을 감수해 가며 교역을 하자고 하겠소?"

조선 각지에 말 목장이 있는 것을 모르는 데다가, 조선이 교역하고자 하는 본래 목적은 짐작도 하지 못한 도르호치는 그럴싸한 그 말에 수긍해 버렸다.

"하긴 우리 여진족들이 조선에 말을 많이 팔긴 했지. 해동청도 조선 땅에 살지만 잡기가 힘들어 우리에게서 사 갔었고 말이오."

"그렇소. 그래서 새롭게 교역을 시작해서 몽골의 달단마나 서역의 대완마, 각종 모피를 구하고자 하오."

"그 둘을 우리가 구해다 주면 조선에서는 무엇을 줄 수 있소?"

"철을 주겠소. 물론 좋은 철은 우리가 써야 하니, 조금 품질이 떨어지는 철을 덩어리 상태로 팔 것이오."

도르호치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 갑자기 이전부터 교역해 왔던 면포가 아니라 철로 교역을 하자고 하는 것이오? 이제는 우리가 철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알지 않소?"

양녕은 입꼬리를 올리며 물음에 답했다.

"면포는 몽골과 교역해서 들여올 것인데, 우리가 남의 장사에 끼어들면 안 되지 않겠소?"

도르호치의 눈썹이 놀라움에 꿈틀했다. 잠시 묵묵히 있던 도르호치는 숨길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지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알았소?"

양녕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 아는 방법이 있소. 다른 곳에 새어 나가지는 않았으니 안심하시오."

'실제로는 원래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윤봉에게서 알아낸 것 등등을 토대로 추측한 것일 뿐이지만, 저 반응을 보아하니 제대로 맞춘 모양이군.'

마른침을 삼키며 도르호치가 물었다.

"물론 우리가 몽골 쪽에서 면포를 들여오기는 하오. 하지만 조선에서도 들여온다면 더 풍족해질 것이오."

"물론 그렇소. 하지만 몽골 쪽하고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는 것 아니오? 정확하게는 북원 쪽하고 말이오."

다시 허를 찔려 입을 다문 도르호치를 보며 양녕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신뢰를 쌓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거래를 오래하는 것이오. 그러려면 조선에서 면포를 들여와 몽골과의 교역량을 줄이는 것보다는, 조선에서 철을 사다가 잘 가공해서 몽골에 팔아서 교역량을 늘리는 게 좋지 않겠소?"

그 말에 다시 도르호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우리가 북원과 철을 교역하는 것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설마 우리 상황이 전부……. 아니, 그건 아니겠지. 우리가 제철 기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걸로 예측했을 것이다.'

도르호치가 침착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지만 품질이 떨어지는 철이라면 기껏 사 가더라도 가공에 손이 더 많이 갈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 질문에 양녕은 대답 대신 탁자 위에 쇳덩어리 하나를 올려놓았다.

"이게 우리가 팔고자 하는 정도의 철이오."

그 쇳덩어리를 집어 들고 살피던 도르호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품질이 떨어지는 철이란 말이오?"

"그렇소. 조선에서 쓸 만한 철이라고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양녕은 그렇게 말하며 다른 쇳덩어리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도 집어 들고 두 쇳덩어리를 비교하며 살피던 도르호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철이 조선에서는 평범한 것이란 말이오?"

"그렇소. 품질이 떨어지는 철이라고 해도 조선 기준으로 품질이 떨어진다는 말일 뿐이오. 금나라에서 아무리 철을 생산한다고 하지만 그 정도 품질은 쉽게 낼 수 없지 않소? 게다가 좋은 철광석이 나는 것도 아니라서 사철이나 잘게 부순 철광석을 물에 일어서 선별하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그 품도 많이 들 뿐만 아니라 겨울에 강이 얼면 하기도 어렵지 않소."

"그건 그렇소만……."

"그러니 우리에게서 철을 사서 쓴다면 생산량뿐만 아니라 품질과 수고 면에서도 확실히 이득이 되지 않겠소? 실제로도 이미 일본에서는 이렇게 조선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낮은 품질의 철을 사 가서 잘 쓰고 있소. 하지만 금나라에서 교역하겠다고 하면 최대한 이쪽으로 수량을 돌려 주도록 하겠소."

양녕은 마치 금나라가 사 주지 않는다고 해도 일본에 팔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말해 도르하치를 압박했다.

사실 조선이 금나라와 교역하는 데 쓰고자 하는 낮은 품질의 철은 기존에 일본에 팔던 낮은 품질의 철과는 생산지가 달랐다.

'이건 회령군에 새롭게 생긴 제철감에서 만든 것이다. 경원부 일대에서 나는 석탄으로 소석탄을 굽고, 무산 지역의 거대한 노천 철광에서 철광석을 캐서 만든 것이지. 하지만 여기서 만들어진 낮은 품질의 철은 김해군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일본에 팔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이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애초에 김해군 제철감의 존재조차 모르는 도르호치가 그것을 가지고 흥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한참 고민하던 도르호치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명나라에 들키면 우리나 조선이나 귀찮아지는 것 아니오?"

이미 교역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도르호치의 그 말에 양녕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들켜서는 안 되오. 가까운 요동을 두고 굳이 먼 이곳까지 와서 만나자고 한 것 역시 명나라의 눈을 피하려고 한 것이고 말이오. 그러니 교역을 하게 된다면 역시 여기서 교역해야 할 것이오."

"알겠소. 그럼 우리는 달단마와 대완마, 모피를 팔겠소. 조선에서는 철에 더해서 소금도 팔아 줄 수 있소?"

"물론이오. 그거야 쉬운 일이지."

도르호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알겠소. 이 조건이면 아마 한께서도 수락하시겠지만 그래도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니, 일단 이 두 쇳덩어리를 가지고 상경부로 돌아가서 한과 상의해 보겠소. 상세한 교역량은 그 다음에 정하는 게 어떻겠소?"

"물론이오. 그리고 견본 겸 선물로 줄 쇳덩어리는 그 둘 말고도 더 챙겨 왔소. 그것도 가져가시오."

"고맙소. 다음번에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겠소."

"나도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소. 참, 이 교역은 몽골에나 명나라에나 비밀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당연하오. 명나라에 들키면 조선이 곤란한 만큼, 몽골에 들키면 우리 금나라도 곤란해지오. 여러 가지로 말이오."

그 말뜻을 이해한 양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북원과 금나라가 협력하는 것은 양쪽 다 주변에서 고립된 처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금나라와 조선이 교역한다고 하면 북원은 금나라를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좋소. 그럼 버일러께서도 어차피 오늘 바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니 하루 묵어야 하지 않소? 식사와 잘 곳을 마련해 두었소. 그리 풍요로운 지역이 아니라 좋은 음식과 편한 잠자리는 아니지만 말이오."

"그 정도면 충분하오. 고맙소, 대군."

"자, 그러면 자리를 옮깁시다. 지금쯤이면 상을 다 차려놓고 술도 데워 놓았을 것이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녕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게 진정한 이이제이라고 명나라에 보여 주고 싶을 정도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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