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30화
230화
1441년 2월 하순 모일.
한성부 인근 누각.
몇 달 전, 현 명나라 황제인 정통제의 조모인 태황태후 장씨가 죽었다.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난 다음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면서, 조선이 태황태후의 극락왕생을 비는 의미로 대장경 인쇄본을 바쳤던 것을 기특하게 여겨 상을 내리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말을 순진하게 그대로 믿는 사람은 조선 조정에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태황태후께서 평소 불교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헤아리고 대장경을 바친 조선의 갸륵함에 감동하신 폐하께서 저를 보내어 칙서와 하사품을 전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만 말하더라도 대군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씨익 웃으며 한 윤봉의 말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태황태후마저 돌아가시고 이제 황제 폐하를 가까이에서 도와드리는 것은 사례감 태감만 남으셨지 않습니까. 안심하십시오. 조선에서도 당연히 상국을 보좌할 것입니다. 그 뜻을 태감께서 조선을 대신해서 잘 전해 주십시오."
정통제가 즉위하며 태자 시설 스승이던 환관 왕진은 사례감 태감으로 임명되었다. 황제의 스승이었던 데다가 모든 환관 조직을 통솔하는 사례감의 우두머리인 사례감 태감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그야말로 권력의 중심부에 서게 된 것이다.
'아마 이번 사신 자체가 왕진이 보내자고 해서 보내게 된 것이겠지. 기특하게 여겼다는 것은 명분일 뿐이고, 조선이 명나라 정세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 본 목적일 것이다.'
즉 조금 전 윤봉과 양녕의 대화를 직설적으로 바꾼다면 이런 것이었다.
'태황태후가 불교에 관심이 많던 것까지 아는 것을 보면 명나라에 대해 제법 아는 것 같아서 확인하러 왔다. 지금 명나라의 권력 상황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가?'
'물론 왕진이 실권을 잡은 것을 알고 있다. 조선에서는 그 권력을 인정해 줄 뿐만 아니라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줄 의향도 있다. 대신 조선에도 많은 이익이 있도록 윤봉 당신이 다리를 잘 놓아 달라.'
양녕의 말뜻을 파악한 윤봉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대군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물론 잘 전달해 드려야지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뭔가 태감을 도울 게 있겠습니까?"
새롭게 실권자가 된 왕진이 윤봉을 사신으로 보낸 것은 단순히 조선 출신이고 사신으로 갔던 적이 많아 조선에 대해 잘 안다는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역사에서 윤봉이 이 이후로도 명나라와 조선 사이의 다리로서 많은 권세를 누렸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그래서 왕진의 권력 구조에 윤봉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봉을 잘만 이용하면 조선도 왕진의 권력 덕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양녕의 말에 윤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윤봉의 권세는 명나라의 최우방국이자 강국인 조선과의 관계에서 나온다. 그 점을 살려서 조선을 통해 명나라에, 정확히는 왕진의 권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면 자신의 입지도 더 커질 것이니 심사숙고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윽고 윤봉이 입을 열었다.
"요즘 오이라트 놈들이 교역을 요청하면 어지간하면 들어주곤 합니다. 변방에서 소란을 부리게 두는 것보다는 교역으로 달래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요. 거기에 혹시 도움이 될 게 있겠습니까?"
"조공으로 보내는 면포의 수량을 늘려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면포라……. 원래도 조선에서 처녀 진헌을 대신해서 바친 면포가 오이라트를 통제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면포는 워낙 질 좋고 귀한 것인지라 오이라트 놈들이 그 늘어난 양을 다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윤봉은 오이라트의 구매력이 문제인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조선에서 조공을 늘리면 명나라에서 내려주는 회사품도 그만큼 늘어나야 했다. 반대로 오이라트에겐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 제값보다 헐하게 팔아 줘야 한다. 결국 명나라의 지출만 커지니 그래서는 윤봉의 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게 된다.
그 속내를 읽어 낸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기존에 조공하던 상등품 면포 일부를 중등품 면포로 대체하는 대신 수량을 늘려서 조공으로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중등품 면포 정도 가격이면 오이라트 놈들도 살 만하지 않겠습니까?"
양녕의 제안에 윤봉이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대답했다.
"그러면 되겠습니다. 추가로 조공으로 보내던 해동청을 좀 줄이고 그 역시 중등품 면포로 대체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폐하께서나 왕 태감이나 사냥을 그리 즐기지 않으셔서 말이지요."
궁에서 쓸 상등품 면포 일부만을 남기고, 딱히 필요가 없어진 나머지 상등품 면포와 해동청을 중등품 면포로 대신한다면 명나라의 지출은 거의 그대로지만 오이라트와 교역할 면포의 수량은 늘릴 수 있다.
윤봉이 조선 상황을 살피러 사신으로 가서 뜻밖의 좋은 성과를 올린 게 되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태감께서 명나라에 돌아가셔서 잘 말씀해 주십시오. 결정이 나는 대로 다음 조공부터는 그렇게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군. 대군께서 이 부족한 몸을 항상 도와주시니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아닙니다. 조공이 그렇게 바뀐다면 저에게도 또 이로운 일이니, 오히려 태감께서 저를 도와주신 것이지요. 자, 한 잔 받으시지요."
흐뭇한 표정으로 윤봉에게 술을 따라주며 양녕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이자는 자기가 명나라의 힘을 깎아 조선을 도운 거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 뭐, 알아도 자기 이득만 지켜진다면 별 신경 안 쓰겠지만 말이야.'
* * *
며칠 뒤.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적당히 얻을 것을 다 얻은 윤봉이 돌아간 후, 사정전에서는 양녕이 윤봉에게서 알아 낸 것들을 두고 명나라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환관들이 득세하게 된 것입니까?"
예조판서 권제의 질문에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삼양(양영, 양사기, 양부의 세 명신)도 모두 관직에서 물러난 것 같소. 황제가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사실상 환관인 왕진이 섭정이 된 셈이오."
"허, 참. 한족들은 나라를 세우면 환관들에게 권력을 쥐어 주는 전통이라도 있나 봅니다. 한나라 때부터 그랬으니 정말 유서 깊은 전통이로군요."
권제의 그 말에 피식 웃은 이도가 말했다.
"뭐, 우리에게는 기회 아니겠소. 그나저나 오이라트에 팔 면포가 필요하다라……. 윤봉은 오이라트가 소란을 부리게 두는 대신 교역으로 달래주는 게 낫다는 식으로 말했다지만, 그건 아마 정세를 숨기고자 한 소리 같소."
이도의 말을 들은 영의정 황희가 말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원나라 시절만 생각하고 북원을 너무 강하게 판단한 나머지 오이라트를 과하게 지원해 줬겠지요. 그러다가 결국 오이라트가 몽골을 장악해 버렸지 않습니까. 이제 견제하기 버거워졌으니, 교역으로 비위를 맞춰 주면서 사고만 치지 말아 달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오이라트가 크게 문제를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환관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수많은 신하가 왕진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할 테니 말이오. 다른 것도 아니고 황실에서 쓸 상등품 면포와 해동청의 수량을 깎아서 오이라트를 얌전하게 만들 중등품 면포로 대신하고, 그것을 윤봉이 왕진 밑에서 입지를 키울 수단으로 삼는 것을 보면 확실하오."
그때 양녕이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그런데 명나라가 오이라트를 지원한 것은 지극히 오래된 일입니다. 그저 지금 오이라트가 몽골을 장악하면서 중요해졌을 뿐, 교역 자체는 오래전부터 하던 것을 이어서 하는 것뿐이지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오이라트가 몽골을 장악했다고 해서 북원계 부족들이 모조리 몰살당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일부는 오이라트의 우세를 인정하고 그 아래로 들어갔겠지요. 그렇게 오이라트 밑으로 들어간 부족들은 명나라와 교역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양녕의 말에 이도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오이라트는 명나라와 교역하면서 힘을 모아 몽골을 장악했는데,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북원계 부족들에게 그 이익을 나누어줄 리가 없지요."
"예. 반대로 북원은 금나라와 협력하고 교역을 해왔기에 최대한 버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이라트로서는 북원계 부족들이 명나라와 교역해서 부를 쌓는 것도, 교역을 아예 통제해서 반발을 사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기존에 접점이 있는 금나라와의 교역을 맡길 것입니다."
"교역을 막은 것이 아니니 불만도 크지 않을 것이고, 애초에 북원은 명나라와 교역을 한다고 해도 껄끄러울 것입니다. 반대로 오이라트는 금나라와는 서먹한 사이인데 기존에 교류가 있던 북원계 부족들을 쓰면 간접적으로나마 교역할 수 있지요."
"맞습니다. 교역을 제한한 것도 아니고 기존에 하던 교역을 그대로 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불만이 쌓이지 않으면서도, 명나라와 금나라는 국력 차이가 크니 북원계 부족이 교역으로 아무리 힘을 쌓으려 한들 오이라트 세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겠지요."
양녕의 말에 이도가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혹시 모르니 감시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왜 그러십니까?"
"그렇게 명나라가 오이라트와만 교역하는 상황이 된다면 결국 오이라트가 더 힘을 키워서 정말로 몽골을 완전히 지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겠지요. 몽골이 다시 통일된다니, 상상만 해도 두렵습니다."
"예. 명나라는 몽골을 두려워해서 그들이 물러난 것을 두고 쫓아냈다고 하고, 아직 북원이 멀쩡한데도 원나라가 멸망했다며 부랴부랴 원사를 편찬했을 정도입니다. 그래놓고는 정작 자신들이 이이제이를 제대로 쓰지 못해서 몽골을 다시 뭉치게 해 주는 멍청한 짓을 했지요. 그 피해는 장차 조선에도 오게 될 것입니다."
양녕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이 대신 제대로 된 이이제이를 써서 혹시 모를 후환을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우의정 최윤덕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양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금나라와 교역을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조선에서는 원래 여진족들을 교역으로도 통제했는데, 놈들이 금나라를 세운 이후로 끊어진 지 오래지 않습니까."
그 말에 권제가 놀라 말했다.
"금나라와 말씀이십니까? 명나라가 분명히 문제 삼을 것입니다."
"당연히 명나라에는 비밀로 하고 진행해야 할 것이오."
"하지만 비밀이 지켜진다고 하더라도 금나라와 교역해서 조선에 딱히 이득이 될 것은 없습니다. 이미 전국의 목장에서 수많은 준마들을 키워내고 있고, 여진족 출신 조선인들이 많아 해동청을 잡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지 않습니까."
"이득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이제이를 쓰려는 것이지. 우리가 직접 북원계 부족을 지원해 오이라트를 견제하게 할 수는 없소. 하지만 북원계 부족과 교역하는 금나라와 교역해서 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는 있지 않겠소?"
이도가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하더니 말했다.
"심요도의 요새들도 거의 다 완성되고 백성들도 많이 정착했으니, 금나라가 조선과 다시 교역해서 힘을 기른다 한들 심요도를 쉽게 넘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금나라를 통해서 북원계 부족을 지원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조선이 지난 전쟁에서 놈들의 수도를 점령하고 요충지를 모두 빼앗고 버일러를 둘이나 죽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과연 조선을 믿고 대화에 나와줄지 모르겠군요."
"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가면 분명 만나 줄 것입니다."
양녕이 직접 가겠다는 말에 다들 놀란 표정으로 양녕을 보았지만, 본인은 여유롭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