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27화
227화
1439년 6월 초순 모일.
한성부. 서운관.
서운관 안에는 다른 관원들은 하나도 없이 양녕과 이순지, 최만리와 정인지만이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다. 이순지도 연회에 참석해서 사신에게 천문에 관한 것을 묻는 것을 이도가 흔쾌히 승인하기는 했지만, 사신을 연회 내내 붙잡아두고 질문할 수는 없었기에 중요하거나 도움이 될 질문만 몇 가지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통역은 어찌 되어가고 있소?"
문득 던진 양녕의 질문에 최만리가 답했다.
"신 교리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내가 배워 보라고 시키기는 했지만, 사실 그 두 나라 말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니 어려운 일이지 않소."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생각에도 그 두 나라 말을 바로 배우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우선 녹주부 노인들의 일본어 사투리를 배워 보라 했습니다."
"아, 그런 방법이 있군. 하긴 중간 과정만 몇 단계 줄어들어도 훨씬 통역이 빨라지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며칠 지나더니 녹주부 노인들과 농담까지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며칠 뒤에는 녹주부 노인들에게서 유구어를 배웠다면서 써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벌써 말입니까?"
놀란 이순지의 말에 최만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네.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이르네. 어느정도 하는 지도 모르는데 바로 사신들하고 대화를 시켜볼 수는 없는 일이라, 우선 조와국 사신들을 따라온 이들 가운데 유구어를 할 줄 아는 이들하고 대화를 해 보라고 했지."
"어떻게 되었습니까?"
"며칠 동안 그들하고 붙어 다니더니 유구어를 통해서 조와국 말까지 배웠네."
그 말에 양녕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 짧은 사이에 일본어에 유구어, 조와국 말까지 다 배웠단 말이오?"
"예. 저희도 너무 믿기지 않는 일이라서 같은 내용을 한 번은 기존 방법대로 몇 사람을 걸쳐서 통역하고, 한 번은 신 교리에게 통역을 시킨 다음 그 내용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소?"
"똑같았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몇 사람 걸쳐서 통역한 쪽에 생긴 자잘한 오역을 신 교리가 고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섬라곡국 말도 배우라고 보내 놓은 상태입니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정인지가 말했다.
"정말 대단한 인재입니다. 비록 엄청 유창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며칠 만에 여러 나라의 말을 익히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덕분에 사신과도 능히 막힘없이 통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 지금 조와국 사신들하고 소통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고, 아마 곧 섬라곡국 사신들하고도 빠르게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연회에 사람을 더 데려가서 천문에 관한 것을 묻는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지요. 그런데 대체 본인도 모르고 있던 재능을 대군께서는 어떻게 바로 아셨던 겁니까?"
원래 역사에서의 신숙주는 당시 조선에 알려져 있던 거의 모든 외국어를 할 수 있었고, 역관들이 공부할 교재를 직접 만들어 낼 정도로 언어에 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그걸 말할 수도 없고, 애초에 예상하던 것 이상의 재능이었기에 양녕은 그저 미소 지으며 말할 뿐이었다.
"서운관에서 일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쪽에 재능이 있는 듯하여서 시켜보았을 뿐이오. 그리 뛰어난 인재일 줄은 나도 예측하지 못했소."
"정작 신 교리가 속한 집현전의 대제학과 부제학인 저희가 알아채지 못한 재능을 알아보시다니, 역시 대군께서는 비범하신 분이십니다."
양녕이 대답 대신 슬쩍 웃는데 옆에 있던 이순지가 말했다.
"그렇다면 통역의 어려움이 없어졌으니 조금 더 많이 물어볼 수 있겠군요. 하지만 아쉽습니다. 말이 쉽게 통하게 되었는데도 연회장에서 잠깐 대화를 나누는 정도가 고작인 것 아닙니까. 생각 같아서는 사신을 아예 서운관에 데려와서 천문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듣고 배우고 싶습니다."
낙담한 이순지의 표정을 본 양녕이 말했다.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사신이 이번만 오고 안 올 것은 아니지 않소. 올 때마다 조금씩 물어보면 되는 일이오. 게다가 두 나라가 천축에 가깝고 회교도가 많다고 하지만, 천축과 서역의 천문학은 이미 조선에도 전해진 지 오래요. 지금이 그 먼 옛날처럼 하늘이 둥글고 땅이 사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아니니, 어쩌면 사신에게 배울 것이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소."
땅은 사각형 판이고 둥근 판처럼 생긴 하늘이 그 위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고대 중국의 우주관인 개천설은 이미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갈 무렵 논파된 지 오래였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부터가 하늘이 둥근데 땅이 네모나다면 모서리는 어떻게 덮냐며 비판했을 정도이니, 제대로 된 유학자라면 천원지방이 실제 우주의 모습이라고 믿을 리가 없었다.
그저 항성이 실제로는 구형임이 밝혀진 뒤로도 오각별이 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계속 쓰이는 것처럼, 천지를 상징하는 기호로만 쓰일 뿐이었다.
"하긴, 나후성과 계도성도 전부 천축에서 온 것이긴 하지요."
나후성와 계도성, 즉 라후와 케투는 실제 전체가 아니라 인도 천문학에서 황도와 백도의 교차점을 칭하는 말이었다. 하늘에서의 위치가 계속 변하는 데다가 일월식과 관련이 있는 탓에, 계산의 편의를 위해 일종의 보이지 않는 천체로 간주한 것이다.
"그리고 천문에 관한 것을 너무 많이 물어본다면 분명히 사신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야. 사신들이 중국식 이름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명나라와도 교역을 하는 모양인데, 만에 하나라도 조선이 천문관측을 하는 것 같다는 소문이 명나라에 흘러 들어가고, 명나라가 그걸 트집 잡으면 천문관측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네."
정인지의 말에 이순지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안되지요."
"그렇소. 그러니 이번에는 중요한 것 몇 개만 물어보고, 만약 더 배울 것이 있을 것 같으면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될 것이오. 혹시 아시오? 이번에 물어본 것만으로 큰 성과가 있을지."
그렇게 대답한 양녕이 미소 지었지만, 그저 이순지를 위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탓에 좌중의 누구도 거기에 담긴 오묘한 표정을 읽어 내지는 못했다.
* * *
며칠 뒤.
한성부. 경복궁 경회루.
"조선에서는 황도 12궁을 반씩 나누어 총 24개의 지점을 정하고, 태양이 각 지점을 지나는 때를 기준으로 계절을 파악하고 농사에 참고합니다. 지금 이 누각을 받치는 돌기둥이 총 48개인데, 가장 바깥쪽을 두른 24개의 기둥이 바로 그 24개의 지점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양녕의 말을 들은 신숙주는 잠깐 생각하더니 조와국 사신에게 조와국 말로 말했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들은 조와국 사신이 무어라 말하자, 다시 신숙주가 양녕 쪽을 보고 말했다. 외국어에 흥미가 붙은 신숙주가 중요한 일이니만큼 더 정확하게 번역하겠다며 천문에 관한 것도 자발적으로 익혀 둔 덕에 통역 속도는 놀랄 만큼 빨랐다.
"흥미롭습니다. 조선에서도 황도 12궁을 쓰는군요."
자연스럽게 천문에 관한 주제로 내용이 돌려지자, 주변에 앉은 이순지와 최만리, 정인지가 긴장한 가운데 양녕이 다시 말했다.
"물론입니다. 며칠 전에는 24개 지점 가운데 씨앗을 뿌리는 지점을 지났는데, 쌍둥이자리를 절반으로 나눈 중간 지점에 해당하지요. 참, 조선에서는 쌍둥이자리를 음양 자리라고 부릅니다."
다시 통역을 거치고 신숙주가 양녕에게 말했다.
"재밌군요. 대군께서는 천문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배를 타고 나라 곳곳을 다닌 적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바다에서 위치를 잡으려면 별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양녕의 그 말을 신숙주가 옮기자마자 조와국 사신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신숙주가 양녕에게 말하는 동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대군께서도 바다와 별에 익숙하신 분이시라니 반가운 기분이 듭니다. 그럼 혹시 조선에서도 이것을 씁니까?"
사신이 내민 것은 구리로 된 원판 같은 물건이었다.
'천문관측의, 흔히들 아스트롤라베라 부르는 물건이로군.'
양녕은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짐짓 모르는 척 말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조선에서는 안 쓰는 모양이군요. 구리로 된 원판 여럿을 겹친 물건입니다. 이렇게 판을 움직여서 별의 위치를 찾기도 하고, 그 별의 위치로 지금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아내기도 하는 도구입니다. 먼 바다 위에서 길을 찾을 때에는 이만한 것이 없지요."
사신이 겹쳐진 원판을 이리저리 돌리며 시범을 보이는 것을 양녕 옆에서 보던 이순지가 작게 말했다.
"들고 다닐 수 있는 혼천의 같은 것이군요. 조선에서도 저런 것을 만들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양녕이 아주 작게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리 작은데 정밀한 측정이 가능하다니 대단합니다. 매우 귀중한 것이겠군요."
"그렇게 엄청 귀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낡기도 했고 귀국하려면 꼭 있어야 하는 물건이라 드릴 수가 없으니, 다음번에 조선에 올 때 새것을 하나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대군께서 배를 타고 다니시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와국 기준으로 만든 것이라 조선에서 써도 잘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숙주가 통역해 준 그 말을 듣자마자 양녕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조선 기준으로 위치를 수정하면 됩니다. 북극성의 고도를 기준으로 수정하면 될 것 같은데, 조와국에서 잰 북극성의 고도는 얼마입니까?"
신숙주의 통역을 들은 조와국 사신이 웃으며 무언가 말했지만, 정작 신숙주는 당황한 표정이 되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순지가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는가? 혹시 잘 못 알아듣겠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저 제가 맞게 들었는지 모르겠어서 그럽니다."
양녕이 모르는 척 말했다.
"맞게 들었는지 다시 확인하고 말해주면 되지 않겠는가. 학문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니 사신께서도 이해해주실 걸세."
그 말에 다시 사신에게 확인해본 신숙주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에 들은 것이 맞았습니다."
"다행이군. 그래, 조와국의 북극성 고도는 몇이라 하시는가?"
"고도가 없습니다. 조와국에서는 북극성이 땅 아래로 내려가서 보이지 않고, 배를 타고 한참을 북쪽으로 가야 겨우 보이기 시작한다 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순지와 정인지가 놀란 표정으로 굳고, 뒤이어 최만리도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들을 슬쩍 살핀 양녕이 놀란 척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북극성이 보이지 않으면 무엇으로 방향을 찾는단 말인가. 물어봐 주게."
다시 사신에게 물어본 신숙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북극성이 보이지 않는 먼 남쪽에서만 보이는 마름모꼴 별자리가 있어서 그것으로 방위를 잡고, 세 형제의 별이 동쪽에서 떠서 하늘 꼭대기를 지나 서쪽으로 내려가기에 그 또한 참고로 삼는다고 합니다."
이상해진 분위기에 사신이 신숙주에게 무언가 말하자, 대충 눈치로 파악한 양녕이 웃으며 먼저 말했다.
"별다른 일은 아니고 그저 먼 남쪽 나라 별자리의 이야기를 들으니 신기하고 놀라워서 그런 것입니다. 흥미가 생겨서 그러는데, 혹시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남쪽 나라의 신기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신숙주의 통역을 들은 사신이 안심한 표정으로 웃고는 무언가를 말하는 동안, 양녕 옆에 앉아있던 이순지가 멍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북극성이 보이지 않고 남쪽에서만 보이는 별이 보이며, 삼형제성이 머리 위를 지나간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땅이 평평한 것이라 아니라 공 모양이라는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