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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26화 (22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26화

226화

1439년 5월 하순 모일.

한성부. 서운관.

천문에서 기상관측, 역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하늘을 보고 해야 하는 거의 모든 일을 맡아서 하는 관청인 서운관은 만들어진 이래 최대로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서운관에 이리 사람도 많고 할 일도 많으니, 판사께서 아주 바쁘시겠소."

양녕의 말에 서운관의 수장인 서운관 판사 이순지가 웃으며 말했다. 선이 가늘고 말수가 적은 이순지답게 힘없어 보이는 엷은 미소였지만, 그 눈만은 총명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역법 제정은 주상전하께서 제 능력을 믿고 맡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장차 조선에 큰 도움이 될 일이니, 바쁘더라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니 다행이오. 관원들은 어떻소?"

"다들 뛰어납니다. 머리도 좋고 배우는 것도 빠르고, 열정도 있고 부지런하기도 하지요."

이순지의 대답에 양녕은 끄덕거리며 서운관 안을 둘러보았다. 역법 제정은 나라의 중요한 일인 데다가 이도가 직접 추진한 일인 만큼 조정에서의 지원도 커서, 서운관으로 파견된 집현전 관원의 숫자가 원래 서운관 관원의 숫자와 비슷할 정도였다. 파견된 관원들 역시 박팽년이나 하위지처럼 이미 집현전에서 일하던 학사들 말고도, 작년에 새로 급제한 성삼문처럼 갓 벼슬아치가 된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서운관에 파견된 관원들 말고도, 대군께서도 이처럼 자주 찾아오셔서 도와주곤 하시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하하. 나는 이 판사에 비하면 천문이나 산술에서 한참 부족한데 뭐 그리 도움이 되겠소. 나보다는 차라리 문형께서……."

"으헉!"

양녕의 말은 갑자기 밖에서 들려온 쿵 소리와 뒤이은 외마디 비명에 끊겼다. 말이 끊긴 양녕은 물론이고 일하던 관원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가운데, 이순지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침 오셨나 봅니다."

"그러게 말이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서운관 문이 열리며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가 한쪽 어깨를 붙잡고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작게 한숨을 쉬며 정인지에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멀쩡하게 걸어가다가 기둥에 어깨를 들이받는단 말인가."

"그러게 말일세. 분명히 난 똑바로 걸어간 것 같은데, 갑자기 기둥이 내 어깨를 때리지 뭔가. 참 이상한 일이야."

"똑바로 걸어간 게…… 아니, 아닐세."

정인지와 최만리의 대화에 피식 웃은 양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공들께서는 오늘도 여전하시구려. 문형(대제학)께서는 괜찮으시오?"

양녕을 본 정인지와 최만리가 인사하며 말했다.

"예, 괜찮습니다. 오늘은 그렇게 세게 안 들이받았습니다."

"오늘은 대군께서 먼저 와 계셨군요. 혹시 저희가 조금 늦었습니까?"

"아니오. 내가 시간이 남아서 많이 일찍 와 있었을 뿐이오. 자, 이쪽으로 오시오."

양녕 쪽으로 다가와 탁자에 앉으며 최만리가 말했다.

"새삼스럽지만 대군께서 저희에게 공대를 하시니 뭔가 어색합니다."

"하하하! 이제 두 분 모두 당상관에 올랐으니 마땅히 그리해야 하는 일이오. 사실 나도 좀 어색하긴 하지만, 그보다도 기분 좋은 것이 더 크오."

"기분이 좋으시다니요?"

정인지의 질문에 양녕이 답했다.

"내 두 분과는 관원이 된 초기부터 같이 일을 해오지 않았소. 특히나 부제학께서는 급제하고 바로 다음 해부터 내가 칠주도를 정벌하는 것을 도왔고 말이오. 그런데 그런 두 분이 어느새 당상관의 자리에 올랐으니, 어찌 감개가 무량하지 않겠소."

양녕의 말에 최만리가 조금 쑥스러운 듯 말했다.

"다 대군 덕분입니다. 대군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접하고 배우지 않았으면 이 자리에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하하.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소. 자, 그럼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흐뭇한 표정으로 웃은 양녕은 탁자 위에 쌓인 종이를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오늘 해야 하는 부분은 이것들이오. 칠정(일곱 주요 천체) 가운데 화성과 금성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것과, 그것을 중국의 옛 관측 기록과 비교하는 것이지."

두툼하게 쌓인 종이를 슬쩍 본 정인지가 말했다.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 금방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이 판사와 함께 움직임을 계산해서 정리하겠습니다."

"좋소. 그럼 부제학은 나와 함께 옛 기록을 살핍시다."

"알겠습니다, 대군."

* * *

한참 뒤.

정인지와 이순지가 엄청난 속도로 계산 결과를 정리해 나가는 가운데, 옆 탁자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펼쳐놓고 들여다보던 최만리가 맞은편에서 같이 들여다보던 양녕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며칠 뒤면 저희나 대군이나 서운관 일을 도울 시간이 없을 것이니, 오늘 조금 많이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며칠 뒤에 무언가 있소?"

처음 듣는다는 듯한 양녕의 말에 최만리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 아직 못 들으셨군요. 섬라곡국(현 태국)과 조와국(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엄청 오랜만에 온 것이라서, 크게 잔치를 열어 환영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호라. 아바마마께서 재위하실 때 이후로 한동안 안 왔으니 정말로 엄청 오랜만에 온 것이오. 환영할 만하지. 그래서 그 잔치에 두 분과 나도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양녕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역사에서는 동남아 일대 나라의 사신들은 국초에 몇 번 조선에 온 뒤로는 더는 오지 않았다. 조선과 계속 교역을 하려는 의사는 있었지만, 당시 기술로는 계절풍을 타더라도 유구국과 큐슈를 거쳐야 조선에 올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큐슈가 문제였다.

이웃의 강국인 조선과 명나라 해안까지도 거리낌 없이 약탈하던 대마도의 왜구들이 호위도 없이 온 먼 나라의 교역선을 그대로 둘 리가 없었고, 결국 올 때마다 왜구들에 시달렸던 것이다.

'당시 대마도주와 그 휘하의 왜구들은 그렇게 해적질한 물건을 조선에 바치면서 당당하게 약탈한 물건이라고 밝힐 정도로 분간되는 것이 없던 놈들이다. 교역품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제정신인 나라라면 교역선을 계속 보낼 리가 없지.'

"그런데 섬라곡국과 조와국 사신이 같이 온 것이오?"

"예. 왜구가 두려워서 못 오고 있다가, 우연히 유구국 사람에게서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왜구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칠주도를 아예 조선 땅으로 삼아 평화롭게 다스리고 있다는 그 소식에 조선에 다시 교역선을 보냈다는군요. 하지만 혹시라도 왜구가 남아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두 나라 사신단이 뭉쳐서 같이 왔다고 합니다."

"하하하! 하지만 왜구는커녕 환대까지 받으며 안전하게 한성부까지 왔겠구려. 이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하고 부제학께서는 무조건 잔치에 참석해야겠소."

"주상전하께서도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구들을 토벌하고 칠주도를 정벌한 축자후와 그 승상을 만나는 것이 두 나라 사신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라 하셨지요."

"그럴 것이오. 그리고 그렇게 좋은 인상을 주어야 앞으로도 두 나라가 조선을 자주 찾을 것이고 말이오."

"예. 이번에는 혹시라도 약탈당할 것이 두려웠는지 포목이나 후추 같은 것만, 그것도 그리 많지 않게 챙겨왔을 뿐이지만, 장차 교역이 활발해지면 계피나 사인, 육두구와 같은 약재를 구하는 것이 더 쉬워질 것입니다."

최만리는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해도 대화를 하려면 한세월이 걸린다는 것이겠지요."

"대화에 한세월이 걸린다니? 무슨 문제라도 있소?"

"가까이에 사는 섬라곡국 사신과 조와국 사신은 서로의 말을 알아서 소통이 됩니다. 하지만 조선과 그 두 나라는 너무 멀리 떨어진 탓에 서로의 말을 아는 이가 없지요. 그래서 예전에 그들이 사신으로 왔을 때에도 두 나라 말을 아는 왜인과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을 데려다 두고 이중으로 통역해서 겨우 대화했다 합니다."

"이런. 지금은 더 심해졌겠구려."

"예.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진 탓에 이번에 온 두 나라 사신은 유구어만을 겨우 할 줄 압니다. 하지만 조선에서 유구어가 능한 사람은 녹주부의 노인 몇 사람뿐인데 그들은 나이가 들어서 조선인이 된 탓에 조선말에 서투릅니다. 게다가 그 노인들은 일본어도 사투리가 심해서 다른 지역과 잘 통하지 않지요. 결국 통역이 몇 사람이나 앉아서 말을 건네 주지 않으면 소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여러 과정을 거치면 시간이 걸리는 것도 문제지만, 중간에 잘못 뜻이 전해지면 자칫하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소."

"맞습니다. 그래서 한 번 통역을 거칠 때마다 검토를 몇 번씩 합니다. 결국 시간이 더 걸리지요."

그렇게 말하고 최만리가 쓴웃음을 짓는데, 양녕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법이 있을 것 같소."

"방법이라니요? 설마 대군께서 저 먼 섬라곡국 말까지 아실 것 같지는 않고, 혹시 유구어를 아시는 겁니까?"

"허허허. 그럴 리가 있겠소."

웃으며 말한 양녕은 서운관 한쪽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가더니 한 청년에게 말했다.

"자네 혹시 바쁜가?"

갑자기 양녕이 말을 걸자 놀란 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급한 일은 다 끝냈습니다."

"다행이군."

짧게 대답한 양녕이 뒤를 돌아 이순지를 보며 말했다.

"판사, 며칠 뒤에 나와 문형, 부제학이 전부 사신을 접대하러 가면 한동안은 서운관 일도 잘 안 돌아가지 않겠소?"

양녕의 질문에 이순지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예? 예. 그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운관은 며칠 쉬고, 판사께서도 같이 사신을 만나면서 천문에 대해 들어보는 것은 어떻겠소?"

"사신에게 말입니까?"

"그렇소. 먼바다를 항해하려면 천체를 잘 읽어야 방향을 잡을 수 있으니, 사신 본인은 아니더라도 같이 온 이들 중에는 천문에 능한 자가 분명 있을 것이오. 그런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배우는 것이 있지 않겠소?"

양녕의 말에 이순지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남방 먼 나라에는 회교도들도 많이 산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침 지금 역법을 제정하는 데에 서역의 역법인 회회력이 큰 도움이 되고 있는데, 어쩌면 그들 중에 잘 아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제 생각에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기왕이면 관원 몇 사람도 데려가서 같이 배우면 좋겠군요."

정인지의 말이 끝나자 최만리가 걱정과 의아함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하면 좋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대군, 통역이 오래 걸리는 것을 해결하시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사람을 더 데려가면 통역할 내용이 많아져서 오히려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걸 해결하려고 이 관원을 데려가려는 것이오."

갑자기 양녕의 지목을 받은 청년이 당황하며 말했다.

"통역을 말입니까? 저는 외국어는 하나도 못 합니다."

"외국어를 배워 본 적은 있는가?"

"그건…… 배워 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해본 것 아닌가. 이참에 배워 보게."

막무가내와도 같은 그 말에 청년은 물론이고 다른 관원들에서 정인지에 이르기까지 서운관 안의 모든 사람이 당황해하는데, 양녕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참. 혹시라도 내가 얼굴과 이름을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으니 그건 확인해야겠군. 자네 이름이 무언가?"

이어진 청년의 대답을 들으며 양녕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집현전 교리 신숙주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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