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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25화 (22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25화

225화

1438년 9월 중순 모일.

몽골 초원 동부. 칭기즈 칸 사당.

오이라트의 타이시인 에센은 칭기즈 칸의 사당에 흙발로 들어서며 말했다.

"여기로 달아난다고 내가 못 쫓아올 줄 알았나? 하긴, 부하들도 다 잃었으니 어차피 다른 데로 도망갈 방법도 없었지. 그 잘난 북원의 칸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에센이 비웃음 섞인 시선을 보내는 곳에는 피가 흐르는 배를 붙잡고 기둥에 기대어 주저앉아있는 장년의 사내가 있었다. 바로 북원의 칸인 아다이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명색이 북원의 칸인데 오이라트 놈들한테 죽게 된 것을 보니, 북원이 엄청나게 몰락하기는 했나 보구나."

자신이 패배한 것은 오이라트가 잘나서가 아니라, 북원이 엄청나게 몰락해서라며 비꼬는 그 말에 에센은 미간을 찡그렸지만, 곧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껏 떠들어라. 그나저나 너희는 괜히 여진족 놈들하고 협력한답시고 조선군에 덤볐다가 된통 당하기도 했고, 너의 타이시였던 아룩타이도 조선군의 손에 죽지 않았느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지금까지 버틴 거지?"

"조선에 당했으니 버틸 수 있었던 거다. 이전 같으면 너희에게 밀리더라도 초원 동쪽으로 물러나면서 버틴다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요동을 조선이 아예 장악하면서 동쪽으로 물러날 곳이 없어졌고, 타이시까지 잃었으니 이를 악물고 힘을 키우며 훈련을 한 것이지. 비슷한 처지인 금나라하고도 더 협력했고 말이다."

"하하하! 그 상황에서 협력했다는 게 고작 여진족이냐? 그런 놈들 도움까지 필요로 한 걸 보니 네 말대로 북원이 몰락하긴 했구나."

조금 전의 비꼼을 되돌려 주려 한 에센이었지만, 아다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몽골이 세를 키우기 훨씬 전부터 하나로 뭉쳐서 금나라를 세우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냈던 게 여진족이다. 얼마 전에는 다시 금나라를 세웠고, 조선에 대패했으면서도 여전히 버티고 있지. 그런 힘을 가진 이들을 쉽게 무시하는 걸 보니 역시 오이라트 놈들은 어쩔 수가 없구나."

"뭐야?"

"하긴 너희 오이라트나 여진족들이나 비슷하게 숲에 터를 잡고 살던 놈들이지. 너희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했으면 여진족을 얕볼 수도 있겠어. 너희가 생각보다 자기 주제를 잘 파악하는 모양이구나."

에센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재밌게 보던 아다이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너무 무시하지는 말아라. 네 아비인 토곤을 죽인 화살촉이 바로 금나라에서 사 온 것이니까. 그나저나 죽일 때 멀리서 보니까 토곤한테 꽂힌 화살 개수가 내 화살통에 꽂을 수 있는 최대 화살 개수보다 많던데, 그거 다 뽑느라 고생 좀 했겠구나. 내 저승에 가면 토곤한테 다음 생에는 타이시 말고 화살통으로 태어나서 재주를 살리라고 전해 주마."

"이 새끼가!"

평정심을 잃은 에센은 바로 옆에 있던 도자기 접시를 아다이 쪽으로 집어 던졌다. 백 년 넘게 칭기즈 칸의 사당에 놓여 있던 도자기가 기둥에 맞고 박살 나며 그 파편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지만, 아다이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결국 내가 숨겨 둔 옥새도 못 찾았고, 괜히 비아냥거려보려다가 본전도 못 찾았으니, 이겨도 기분은 별로 좋지 않겠구나."

그 말에 에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 그 잘난 옥새 말이냐? 그런 건 나도 있다!"

그 말에 아다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너희에게도 있다고?"

"그래. 진시황이 만든 전국옥새가 난리 통에 사라진 이후로 옥새는 둘 중 하나였다. 옛 권위를 가져오고자 이것이 전국옥새라며 만든 가짜거나, 자신이 그 옛날 진시황만큼의 권위를 가졌다는 의미로 새롭게 만든 옥새들이지. 아마 중원은 빼더라도 몽골 초원에만 원나라 때 새롭게 만든 옥새가 다섯 개는 넘을 거다."

에센은 이어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비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 초원에서 지배자를 결정하는 것은 잘 깎은 낡은 돌덩어리를 누가 가졌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다. 그걸 잊고 옥새 같은 소리나 하다니, 대를 이어 중원에 오래 살더니 머릿속도 중국인이 되었느냐?"

"초원 전체로 보면 그렇지만 몽골에서는 하나 더 있지. 칭기즈 칸의 혈통인 황금씨족인가도 지배자를 결정하는 요소다. 아, 너희한테는 없는 것이라서 빼고 말했느냐?"

역으로 도발 당해서 얼굴이 시뻘게진 에센이 말했다.

"오이라트에도 황금씨족인 타이순 칸이 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아무리 황금씨족을 허수아비로 세워놓더라도 네가 칸을 칭하는 날은 절대 안 온다는 걸 알지 않느냐?"

"비록 나는 아닐지라도, 내 조카에게는 황금씨족의 피가 흐른다!"

아다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 조카가 보르지긴 가문이지 초로스 가문이냐? 아무리 발악해도 너희 초로스 가문은 기껏해야 부마 가문일 뿐이지 황금씨족은 절대로 될 수 없어. 만일 그게 가능했다면 서쪽의 절름발이 테무르 놈도 칸이 되었을 것이고, 동쪽 고려의 왕들도 칸이 되었을 것이다."

"두고 봐야 알 일이지 그건."

그렇게 말하고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드는 에센에게 아다이가 말했다.

"그래. 말로 못 이기면 칼이라도 뽑아야지. 그런데 정말로 칭기즈 칸의 사당에 그 자손의 피를 뿌릴 셈이냐?"

"너희 황금씨족끼리 서로 흘린 피가 이미 많은데 그런 걸 뭘 상관하겠느냐? 설마 여기로 도망치면 죽이지는 않을 줄 알았느냐?"

"그럴 리가 있겠느냐? 얼마나 추한 놈인지 마지막으로 확인이나 해 보려고 했을 뿐이야. 너는 내가 설령 이 근처에서 항복하거나 붙잡혔더라도 나를 사당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죽였을 놈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근거 없는 소리는 집어치워라."

에센의 굳은 표정에서 오히려 확신을 얻은 아다이가 말했다.

"근거가 없기는. 넌 스스로 칸이 되고 싶어하지만 혈통 때문에 불가능하다. 너에게 칭기즈 칸은 되고 싶은 존재지만, 그걸 막는 족쇄이기도 한 것이지. 네놈이 아무리 힘을 얻더라도 칸이 될 가능성은 어중이떠중이 황금씨족보다도 낮으니, 열등감이 안 생기겠느냐?"

"닥쳐라!"

에센이 소리를 지르자, 아다이는 오히려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에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그래서 여기서 황금씨족의 칸인 나를 죽여서, 그 열등감과 분노를 칭기즈 칸을 향해 분출하려는 것이지. 칭기즈 칸의 사당에서 그 후손을 죽여서, 황금씨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힘이 있는 네가 칸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틀렸느냐?"

"닥치라니까!"

"와하하하하! 화내는 걸 보니 내가 맞췄구나. 자, 어서 날 죽여라. 날 죽여서 내가 맞췄다는 걸 마저 증명해다오."

에센이 분노와 수치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다가와 손에 든 칼을 높이 들어 내리치는 그 순간까지도 아다이는 비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 *

1439년 3월 초순 모일.

성저십리. 남산 서남쪽.

도성 밖인 남산 서남쪽에는 환구단이 있다. 임금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중요한 시설이지만, 전통적으로 환구단은 남교, 즉 남쪽 교외에 짓는 것이었기에 이것이 오히려 예법에 맞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쪽 교외에서도 한성부에 온 명나라 사신의 눈을 피하기 좋은, 예법과 실리를 동시에 잡는 위치에 지어져 있었다.

새롭게 지어지는 천문대도 명나라 사신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는 것은 환구단과 마찬가지였기에, 환구단 옆에 지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아다이 칸이 죽었으니, 칸은 타이순 칸만 있게 되었구려."

새롭게 지어지는 천문대, 즉 관상대의 건설 상황을 살피러 온 예조판서 권제는 먼저 와있던 양녕과 나란히 서서 최근 심요도 관찰사가 올린 장계 내용을 두고 대화 중이었다.

"예. 그리고 타이순 칸을 옹립한 오이라트가 몽골 전체를 지배하게 될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아마 쉽지는 않을 것이오. 보통 북원이라고 묶어 부르지만 정확히는 수십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들이오. 타이순 칸을 인정하는 부족도, 인정하지 않는 부족도 있겠지만, 오이라트에 속하는 에센의 허수아비인 타이순 칸을 인정하지 않는 부족이 더 많을 것이오."

"그렇다면 그들을 회유하건 무력으로 복속시키건 시간은 걸리겠군요. 그나저나 어째 예조판서인 저보다 대군께서 더 몽골의 정세를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권제의 말에 양녕이 슬쩍 둘러댔다.

"회경군을 따라 금나라를 치러 갔을 때 보고 듣고 했던 것들일 뿐이요. 내가 돌아온 뒤로도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나보다도 얼마 전 회경군이 해산되며 돌아온 우상(최윤덕)이나 대사마(황보인)께서 최근 상황을 정확히 아실 것이오."

"그렇군요. 그럼 조만간 두 분께도 조언을 구해야겠습니다."

"그게 좋을 것이오. 그리고 회경군도 해산되었고 심요도 관찰사는 일이 바쁘니, 앞으로는 차라리 심요도 일대를 자주 오가는 척동상단을 통해 소식을 모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오."

"척동상단……. 예. 생각해 보겠습니다."

양녕이 척동상단 얘기를 꺼내자 권제가 미묘한 반응을 보인 것은 권제가 바로 권람의 부친이었기 때문이었다. 권제는 학식과 업무능력은 뛰어나지만 행실은 좋지 않아서, 기생과 첩에 빠져서 처자식을 홀대하고 구타하곤 했다. 그런 부친이 싫어 한명회와 어울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권람이 지금은 척동상단에서 대행수로 일하고 있으니, 권제가 껄끄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나저나 결국 이렇게 북원이 쇠퇴하고 오이라트가 강력해지면 이이제이가 아니게 되지 않습니까? 이런 실책을 저지르는 것을 보니 명나라의 영리함도 다 흐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주제를 다른 데로 돌리는 권제였지만, 양녕은 모른 척하고 받아 주며 말했다.

"여진족들이 금나라를 세우게 만들었을 때부터 이미 조짐이 보이지 않았소. 새 황제가 즉위하면서 더 심해졌을 뿐이지."

"판단이 흐려져서 조선에 많은 신경을 못 쓰게 될지, 금나라에 이어 오이라트의 위협도 커졌으니 조선을 더욱더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 할지, 조선도 금나라나 오이라트처럼 명나라에 대들 것을 걱정해 견제하려 들지, 전혀 예측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어찌 되건 환구단과 관상대는 잘 숨겨야 하오. 명나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들킨다면 우리가 불리해지오."

"물론입니다. 여차하면 환구단과 관상대를 둘러싸는 가짜 사찰을 짓는 것도 생각 중입니다. 사신이 오면 승려들을 채우고 건물마다 불상을 놓아 사찰로 위장하는 것이지요."

"괜찮은 방법이오. 하지만 환구단과 관상대 외에도 시계도 잘 숨겨야 하오."

"선공시의 장 부정이 최근에 완성한, 기계시계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권제의 질문에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물론 시간을 재는 도구가 있다는 것이 트집이 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사신이 그 내부를 보고 구조를 간단히나마 파악해서 명나라로 돌아가기만 하더라도 명나라의 기계 기술은 급격하게 발전할 것이오. 어쩌면 조선을 순식간에 뛰어넘어버릴지도 모르지."

"그래서는 안 되지요. 아쉽습니다. 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기계시계를 명나라의 눈에서 숨겨야 한다면 무리겠군요."

"해보고 싶은 것? 무엇이오?"

"지금 길거리에 해시계를 두어 백성들도 볼 수 있게 했지만, 시간을 확인하려면 맑은 날 낮에 직접 와서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종각 옆에 크게 누각을 짓고 큰 기계시계를 두어 시계각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멀리서 보고도 시간을 알 수 있고, 종각에서 제시간에 종을 치기에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명나라 사신에게 너무 바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시대를 앞서간 권제의 발상을 들은 양녕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은 생각이오. 지금 당장은 못 하더라도 언젠가는 할 수 있지 않겠소? 아니, 언젠가는 해야 할 것이오. 내 장담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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