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23화
223화
"서남방에도 말이오? 서남방도 귀문방이니 막으면 좋긴 하오. 미야코에도 동북방에 적산선원이 있는 것처럼 서남방에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을 두어 재액을 막고 있으니까."
"역시 서남방에도 사찰이나 사당을 지어 재액을 막는 풍습이 있군요. 그럼 지코지 서남방에도 하나 짓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지만, 누구를 모시는 건물을 지을 것이오?"
"원효대사입니다."
"잇시키 가문의 원찰에 원효대사를 모실 수 있단 말이오?"
조금 전까지의 침착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가고 반색하는 요시츠라의 모습에 오히려 권람이 되물었다.
"원효대사가 일본에서도 명성이 대단하다는 것은 들었는데, 제가 생각하던 것 이상인 모양입니다."
"대단하고말고. 더 칭송하는 말이 없어서 대단하다고만 할 수 있는 게 아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미야코에 원효대사를 모시는 사찰이 한둘이 아니고, 그중에는 초상화와 의복까지 모시는 경우도 많소. 원효대사께서 쓰신 여러 책은 학승이라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것이고 말이오."
"그 정도였군요."
"일본만 이런 것이 아니오. 내가 알기로는 중국은 물론이고 천축과 서역까지, 대승의 가르침이 퍼진 땅이라면 원효대사의 가르침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배우지 않는 자가 없소."
"실로 대단하군요. 그렇다면 지코지에 새로 지을 조사당에도 그냥 위패만 모실 수는 없지요. 조선에도 원효대사와 연이 깊은 사찰에는 필시 원효대사의 초상이 전해 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 초상을 모사해서 조선식 족자로 만들어 올 테니 그 족자를 봉안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요시츠라가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이오?"
"예. 물론 고려 말이 워낙 혼란스러웠던 탓에 어쩌면 전해지는 초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조선 조정의 문관 중에 원효대사의 후손이 계시니, 그분의 친필이라도 받아오겠습니다."
"정말 고맙소. 그런데 혹시 조금만 더 부탁해도 괜찮겠소?"
"무엇입니까?"
요시츠라가 약간 머뭇거리며 말했다.
"지코지는 임제종에 속하고, 세부적으로 따지면 미야코의 묘신지(묘심사)를 본산으로 삼는 묘신지파에 속하오. 그러니 혹시 괜찮다면 초상 모사본이나 친필을 한 부 더 부탁드려도 되겠소? 한 부는 지코지에 봉안하고, 한 부는 묘신지에 시주할까 해서 말이오."
미야코에 잇시키 가문과 조선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나마 키울 수 있는 일이라 권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리 해드려야지요. 그나저나 본산까지 신경 쓰시는 것을 보니 공께서 불심이 매우 깊으신 모양이군요."
"그리 보아 준다면 고맙지만, 사실은 불심보다도 내 사심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오."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요시츠라에게 권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언가 일이 있었나 보군요."
"그렇소. 사실 우리 잇시키 가문과 오우치 가문이 접점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오. 묘신지를 통해서 아주 작은 접점이 있었지."
요시츠라는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우고 이어 말했다.
"지금 오우치 가문 가독인 모치요 공의 부친인 요시히로 공이 저저번 쇼군인 요시미츠의 견제를 견디다 못해 거병했고, 결국 토벌당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예. 대군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묘신지는 그 거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당시 주지께서 요시히로 공과 친한 사이였다는 이유만으로 쇼군에게 법난을 당했소."
"그게 무슨……. 부추긴 것도 아니고 동조한 것도 아닌데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연좌해서 책임을 묻는단 말입니까?"
"책임을 물은 정도가 아니오. 사찰 자체를 몰수해서 기엔이라는 승려에게 주었소. 주지께서는 기엔이 주지로 있는 사찰에 유폐 당하셨지."
"기엔?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군요."
"들어 봤을 것이오. 요시미츠의 아들 중 한 사람인데, 지금은 환속해서 자기 세력을 이끌고 내전 중이지."
그 말에 권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찰을 몰수해서 자기 아들을 주었단 말입니까? 그럼 결국 자기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연좌해서 책임을 묻고, 그걸 빌미로 탄압한 것이지 않습니까."
"맞소. 기엔은 그렇게 받은 묘신지를 다른 임제종 종파에 주어 버렸소. 천태종에 속한 자기가 계속 가지고 있다면 탄압해 빼앗은 것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니, 일단은 임제종에 돌려준 모양새를 취한 것이지."
권람은 요시츠라가 역대 쇼군들을 경칭조차 없이 이름으로 부르던 이유를 알겠다는 듯 말했다.
"묘신지를 받은 임제종 종파는 쇼군의 눈치가 보여서 묘신지를 독립시켜 줄 수 없고, 묘신지도 그 상황을 아니 차마 뭐라 할 수 없고, 졸지에 종파 아래의 종파가 되어 버린 묘신지파 사찰들은 위신이 떨어졌겠군요. 영악하고 악독한 수법입니다."
"그러게나 말이오. 그러다가 저번 쇼군인 요시모치가 죽고 나서 드디어 그 임제종 종파에서 묘신지를 독립시켜주었소. 한때 이름마저 바뀌면서 끊겼던 법맥을 다시 이을 수 있게 된 것이지. 그게 4년 전의 일이오."
"얼마 안 되었군요."
"그렇소. 그래서 아직 이전의 위신을 되찾지 못한 상태요. 그런데 아무리 잇시키 가문의 원찰이라고 해도 일개 말사가 본산인 묘신지보다도 먼저 조선에서 건너온 원효대사의 초상을 봉안한다면 그 위신은 더 떨어질 것이오. 반대로 묘신지가 조선에서 건너온 원효대사의 초상을 봉안한다면, 지극히 귀중한 것을 모시게 되어 그 위신이 높아질 것이오."
"그리고 그 귀중한 것을 시주한 잇시키 가문의 위신도 높아지겠군요."
요시츠라는 다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소. 그래서 불심보다도 사심에서 나온 말이라 했던 것이오."
'대군께서 일본의 귀족들 대다수는 임제종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셨다. 그리고 쇼군이 탄압하려고 들 정도면 묘신지파도 제법 규모가 되는 종파겠지. 이건 기회로군.'
"세속의 사람이 어찌 불심만으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공께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그렇게 일본에서도 원효대사를 존경한다면, 조선에 널리 퍼진 원효대사의 가르침도 같이 들여오면 어떻겠습니까?"
"일본에 전해지지 않는 원효대사의 가르침이 있소?"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법이지요."
권람의 말에 요시츠라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염불 한 번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 동시에 들어가다니, 신기하군."
"원효대사께서 직접 만드신 염불입니다.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내세의 복락을 빌고, 관세음보살에 귀의하여 현생의 평안을 비는 염불이지요. 원효대사께서 이것만 일심으로 외우면 누구나 극락왕생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다니신 덕분에 신라에서는 불교가 백성들에게도 널리 퍼질 수 있었습니다."
"허허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가 보오."
"인연이라니요?"
"지코지의 본존은 성관음보살이오. 육도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의 여섯 모습 가운데 지옥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이지. 그리고 관세음보살이 머리에 쓴 보관에는 작은 아미타불의 상이 있소. 지코지의 성관음보살상에도 당연히 있지."
"그렇다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이 지극히 자연스럽겠습니다."
"그렇소. 그 염불이 단후국에 널리 퍼진다면 가깝게는 이 일대의 백성들이 지코지를 자주 찾아 융성하게 될 것이고, 멀게는 단후국 백성들이 이상한 소리에 휩쓸리지 않게 될 것이오."
"이상한 소리라니요?"
"아, 대행수께서는 모르시겠군. 최근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는 종파가 몇 있소. 하나는 정토종에서 나온 것인데, 자신들의 가르침이 진실이라 하여 진종이라 자칭하오."
"정토종에서 나온 것이면 염불이 중심인 종파입니까?"
요시츠라는 작게 고개를 젓고 말했다.
"그랬으면 갈라져 나오지 않았겠지. 아미타불에 귀의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이미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이 확정되는 것이고, 염불은 그 감사의 마음을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는 종파요."
"수행도 좌선도 염불도 없이, 믿는 마음이 곧 구제라는 것입니까? 엄청 급진적이로군요."
"그렇소. 다른 하나는 니치렌이라는 승려가 개창한 일련종이라는 종파요. 이곳 역시 법화경만이 옳은 경전이니, 법화경에 귀의하는 것만으로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권람은 약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백성들의 불심이 깊어지면 좋은 것 아닙니까?"
"급진적이라 문제요. 좌선은커녕 염불조차 하지 않고 그저 마음먹는 것만으로 성불할 수 있다니, 그렇다면 성불의 단계가 성문, 연각, 보살로 높아져 가는 구분이 어찌 있고, 근기에 따른 가르침이 어찌 있겠소?"
그 말에 순간 권람의 눈썹이 아주 작게 꿈틀했다. 요시츠라의 말에는 미카도와 귀족, 무사와 평민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계급사회를 불보살과 연각, 성문으로 정당화하고, 아랫것들은 쉽게 성불할 수 없는, 혹은 그래서는 안 되는 낮은 존재로 여기는 인식이 묻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역겹군.'
아무리 조정이 아니라 척동상단에서 일하고 있고 권력과 재물에도 욕심이 많다지만 권람은 대학자 권근의 손자이며 유학자다. 사람은 누구라도 노력하면 군자가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는 유학자에게 요시츠라의 말은 지극히 역겨울 수밖에 없었다.
권람은 양녕이 자신에게 맡긴 일을 떠올리며 경멸감을 꾹 참고 내색하지 않을 뿐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요시츠라는 계속 입을 열었다.
"만일 그런 이상한 소리가 널리 퍼진다면 필시 백성들이 무사들 머리 위에 올라서려 들 것이오. 그리되어서는 안 될 일이지."
"그렇군요. 하지만 복잡한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염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염불은 바로 성불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극락정토에 태어나 그곳에서 수행해서 성불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않소. 그런데 진종은 현세에서는 자력으로 수행한들 그 누구도 성불할 수 없고 내세에 극락정토에 태어나야만 성불할 수 있다는 소리를 하고, 그 과정에서 염불조차 필요 없다는 소리를 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오. 일련종 또한 법화경에 귀의하면 극락정토도 거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 바로 성불할 수 있다고 하니 문제지."
"그 둘도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겠습니다."
요시츠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 아시는구려. 뭐 어찌 되었건, 열심히 염불을 외어 극락정토에 태어나자는 것은 그런 이상한 소리에 비하면 지극히 옳은 가르침이오. 물론 천태종, 특히 엔랴쿠지 쪽에서는 염불만 열심히 왼다고 쉽게 성불할 수 있는 게 말이 되냐며 그마저도 싫어하지만 말이오. 그건 너무하지 않소?"
요시츠라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된 권람이 자신의 말에 동감한다 생각하고 물어본 것이었지만, 권람의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아랫것들이 염불도 열심히 외지 않고 극락정토에 나는 꼴은 못 봐주겠고, 염불을 외더라도 현세에 부처가 되어 자기보다 앞서가는 꼴도 못 봐주겠다는 소리를 하기에 내 앞에 있는 이놈이 천하의 추악한 놈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는 더한 종자들도 있는 모양이군.'
"그래서 백성들이 그 소리에 현혹될까 걱정인데, 그렇다고 임제종의 가르침을 따르는 내가 정토종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권유할 수도 없지 않소. 하지만 원효대사께서 만드신 그 염불이라면 종파를 뛰어넘은 가르침이니 아무 부담 없이 권유할 수 있을 것이오."
"잘 되었습니다. 마침 전변항에는 군승 출신으로 의술에 능한 승려들이 많습니다. 조사당까지 짓고 나면 그 승려들이 교대로 와서 머무르며 아픈 백성들을 치료해 주게 하겠습니다."
"오, 그러면 아픈 백성들이 지코지에 고마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원효대사의 염불도 퍼뜨릴 수 있겠구려. 정말 고맙소. 자, 한 잔 받으시오. 하하하!"
요시츠라가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권람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더러운 놈. 그래, 그렇게 좋다고 받아들인 조선의 사상이 너희 일본을 속에서 터뜨릴 화약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 때까지는 마음껏 좋아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