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22화
222화
1436년 9월 초순 모일.
탄고노쿠니. 잇시키 가문 저택.
잇시키 가문의 영지인 탄고노쿠니에는 중요한 지역이 둘 있었다. 하나는 조선이 척동상단을 이용해 구입한 동부의 전변항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변항의 서쪽, 잇시키 가문의 거점이 있는 요사 지역이었다. 그 요사 지역의 중심부에 있는 잇시키 가문 저택에서는 가독인 잇시키 요시츠라가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척동상단에게 지금까지도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 또 이렇게 큰 신세를 지는구려."
요시츠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척동상단 대행수 권람이 웃으며 말했다.
"별 대단한 것 아닙니다. 전변항을 팔아 주신 덕분에 저희도 이득을 많이 보았으니, 이 정도는 해 드려야지요."
요사 지역에는 잇시키 가문의 원찰인 지코지(자광사)가 있었다. 유력 가문의 원찰치고는 그리 세가 크지 않은 사찰이었는데, 이번에 척동상단에서 자비를 들여 증축했던 것이다.
"전변항 일대를 비싸게 구입해 주어서 급한 군자금 걱정도 덜었고, 그 이후로도 전변항에서 나오는 각종 이익을 나누어 주었으니, 오히려 이득은 우리가 더 많이 보지 않았소. 정말 고맙소.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는지."
"하하하. 괜찮습니다. 잇시키 가문에 경사가 있어서 저희가 드리는 선물로 받아 주십시오. 사실 지코지가 다 증축된 다음 봉안될 대장경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선물이라 할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아, 대장경은 인쇄가 다 되어 간다 합니다. 다 만들어지면 저희가 가져오겠습니다."
척동상단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지코지를 증축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잇시키 가문은 최근에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많은 회사품을 받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장경판으로 직접 찍어 낸 대장경이었다.
그런데 막상 잇시키 가문 원찰인 지코지에는 대장경을 봉안할 곳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을 안 척동상단에서 나서서 증축해 주고 있던 것이다.
'물론 잇시키 가문이 조공을 바치게 유도한 것, 조정에서 대장경을 하사한 것, 우리가 지코지를 증축해주는 것 전부 대군께서 계획하신 것이지만, 이들이 그걸 알 도리는 없겠지.'
"고맙소. 이 한미한 가문에 대장경이라는 큰 보물을 하사해 주시니. 조선국 황제 폐하의 은덕이 참으로 크시오."
이도를 황제 폐하라 부른 요시츠라였지만, 권람은 지적하거나 정정해주기는커녕 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부터도 큐슈의 호족들이나 오우치 가문은 조선에 수시로 조공을 바쳤고, 그럴 때면 조선의 임금을 황제 폐하라 부르곤 했다. 조선으로서는 높여서 불러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 그냥 두었던 탓에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맞습니다. 실로 천하의 성군이시지요."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일본 호족들은 미카도의 신하이니, 미카도 외의 군주를 폐하라고 불러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카도는 하는 일 없는 상징이 된 지 오래고, 쇼군의 권위와 권력도 무너져 가는 시대에 그런 것은 하등 의미 없는 것이었다.
조선의 군주가 왕이고 존칭은 전하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황제 폐하라고 부르고 조공의 이득을 더 볼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난세의 생존법이었다.
"참, 이번에 우리가 오우치 가문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지 않았소? 그들에게도 마땅히 감사를 표해야겠지만 내가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대행수께서 나를 대신해서 선물과 감사의 말을 전달해주실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어차피 가는 길에 들러야 하니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고맙소. 그나저나 참 생각할수록 묘한 인연이오. 우리 잇시키 가문은 지금 쇼군인 아시카가 가문의 먼 방계고, 오우치 가문은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이오. 게다가 영지가 이어진 것도 아니고 처한 상황도 다른데, 이렇게 두 가문이 협력하게 되다니 누가 예상이나 했겠소?"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렇기에 오히려 협력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권람의 말에 요시츠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도 그렇소. 영지가 떨어져 있어 싸운 적도 없고, 상황이 다른 만큼 서로가 필요한 것도 다르니 쉽게 협력할 수 있던 것이겠지."
"예. 오우치 가문에게 잇시키 가문은 숙적인 야마나 가문을 동쪽에서 견제해주면서 미야코와 교역로를 이어주는 존재이고, 잇시키 가문에게 오우치 가문은 조선에서 오는 여러 물자를 우선적으로 제공해 주는 존재니까요."
"그렇소. 사실 물자라고 해도 필요한 것은 거의가 군수품이지만 말이오."
요시츠라는 술잔을 비우고는 이어 말했다.
"대행수께서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잇시키 가문은 권력에 가까웠던 탓에 그게 오히려 독이 되었소."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요시츠라는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일본은 지금 누구나 권력을 노리고자 하는 난세요. 가문과 가문간의 전쟁은 물론이고 가문 안에서도 내전이 일어났고, 우리 잇시키 가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지."
"영지가 멀리 떨어져 있고, 영지 없이 조정 관직만 있는 가문원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게다가 잇시키 가문의 가독 자리를 이어받은 내가 차남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었지. 멀리 떨어진 영지를 대신 관리하던 호족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영지를 탐내고, 조정에 있던 형님과 조카가 내 자리를 노리기 시작했소. 하나같이 명분으로 내 가독 자격을 들먹이더군."
"그래도 지금은 안정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전변항 일대를 팔아 얻은 군자금으로 호족들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만들고, 전변항에 도착한 교역품들을 미야코로 운반하는 일을 하며 조정에서 나를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들었소. 게다가 이제 대장경에 더해서 이것까지 얻었지."
요시츠라는 옆에 두었던 옻칠된 상자를 열더니, 그 안에서 구리 도장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흡족한 표정으로 그 도장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피던 요시츠라가 인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후국백지인이라. 또 보아도 참 기분이 좋소. 물론 물건이 물건인지라 다른 이들에게 자랑은 못 하겠지만 말이오. 하하하!"
잇시키 가문, 정확히는 잇시키 요시츠라가 조선에서 받은 회사품 가운데서 대장경보다도 더 귀한 것이 바로 이 백작 작위였다. 요시츠라는 탄고노쿠니를 그대로 조선식으로 읽은 단후국의 백작으로 책봉되었고, 조선에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칠 권리도 얻게 된 것이다.
"자랑은 못 하시더라도, 이제 든든한 상국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다른 호족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방심하게 두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아무것도 모르고 함부로 내게 덤볐다가 된통 당하면 다른 놈들도 섣불리 덤비지 않겠지. 사실 다른 놈들이 알아도 상관없소. 전변항까지 물자가 오는 것은 오우치 가문과 척동상단의 일이지만, 그 물자를 미야코로 보내는 것은 잇시키 가문이 틀어쥐고 있소. 괜히 조선에서 백작으로 책봉된 것을 들먹여 우리 심기를 건드렸다가 내전에서 패배하기 싫다면 가만히 있어야 하지 않겠소?"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조선의 봉신이자 일본의 슈고라는 지위를 독점적으로 누리던 오우치 가문이, 잇시키 가문도 조선의 봉신이 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이유였다.
지금까지 조선과의 교역을 독점해 막대한 이익을 보던 오우치 가문이었지만, 일본이 내전에 휩싸이며 기존의 교역로가 쇠퇴해 버렸다. 다행히 척동상단의 도움을 받아 수운으로 전변항까지는 갈 수 있었지만, 거기서 육로로 미야코까지 가는 것은 척동상단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온갖 물자의 수요가 가득한 미야코를 포기할 수도 없었던 오우치 가문에게, 미야코 북부를 영지로 가진 잇시키 가문은 최고의 협력 대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냥 전변항을 찾아오는 상인들을 대상으로만 거래해도 되겠지만, 이미 미야코 상인들과 바로 거래하며 큰 이득을 보던 오우치 가문이 거기에 만족할 리가 없지. 게다가 은광을 개발하며 체급이 과하게 커진 탓에, 그랬다가는 이익이 줄어든 호족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잇시키 가문과 협력해서 미야코 상인들에게 바로 파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권람이 속으로 미소 짓고 있는데, 도장을 다시 조심스럽게 상자에 넣던 요시츠라가 물었다.
"참, 대행수께 물어보려던 게 있소. 양녕대군께서는 축자국의 후작이시고, 오우치 가문은 계응국의 후작이고, 녹주 심씨 가문은 녹주부의 백작이라 알고 있는데 맞소?"
"맞습니다. 물론 축자국은 이미 조선에 통합되고 대군께는 축자후라는 작위만 남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나도 백작이니 영지가 단후국이 아니라 단후부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나야 급이 높으면 좋지만, 녹주 심씨 가문에서 불만을 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구려."
권람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대군께서 축자국의 후작이시기에 녹주 심씨 가문은 격을 하나씩 낮추어 녹주부의 백작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축자국과 녹주부는 둘 다 조선 땅 안의 봉토, 즉 내번이고, 계응국과 단후국은 조선 땅 밖의 봉토인 외번이니 그 예법이 다르다고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역시 예법이란 어렵군. 그렇다면 문제는 없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책봉 사실이 일본 조정에 알려졌을 때의 파장을 줄이려면, 설령 예법상 단후부가 맞더라도 예외적으로 단후국이라 하였을 것입니다."
"그건 그렇소. 계응국하고 달리 여기는 미야코하고 매우 가까운 탓에 들킬 가능성도 큰데, 이 도장의 한자만 봐서는 일본의 지역인 탄고노쿠니인지, 조선의 봉토인 단후국인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오."
"예. 게다가 백이라는 글자는 조선에서는 지방관의 미칭으로 쓰이곤 합니다. 여차하면 조선에서 잇시키 가문이 탄고의 슈고임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내린 도장일 뿐이라고 우겨도 되지요."
걱정이 해결된 요시츠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역을 나라라 부르는 일본의 이상한 예법이 이런 때에는 도움이 되는구려."
한반도와 일본열도 모두 고대에는 지역별로 작은 국가들이 많았다. 그러나 통합을 거듭해서 삼국시대에 이르면 국가들의 이름만 기록에 남다시피 했던 한반도와 달리, 지리적으로 산과 섬이 많아 통합이 어려운 일본에서는 그 작은 국가들이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며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나라를 뜻하는 쿠니라는 일본어가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코지를 증축하며 장보고 대사의 사당도 짓겠다고 했을 때 매우 반기셨지요. 무언가 연이 있으셨던 겁니까?"
이미 양녕에게 대강 들어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모른 척 하고 던진 권람의 질문에 요시츠라가 대답했다.
"연이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잘 알고는 있소. 미야코의 동북쪽 히에이산에 엔랴쿠지라는 사찰이 있고, 거기에 장보고 대사를 모시는 적산선원이라는 작은 사당이 속해 있소.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
"산사인데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는 이유가 있습니까?"
"원래 동북방과 서남방은 귀신이 드나든다는 귀문방이지 않소. 조선이나 명나라는 어떤지 몰라도, 일본에서는 이 귀문방을 매우 흉한 것으로 여기오. 그래서 귀문방을 막기 위해 사찰이나 사당을 세우지."
"아, 그 말씀을 들으니 알겠습니다. 엔랴쿠지의 적산선원이 동북방의 귀문방을 막는 사당이니, 장보고 대사가 귀문방의 재액을 막아 주는 신령으로 여겨지는 것이군요."
"맞소. 그래서 나도 미야코에 머물 때면 자주 찾아갔었지."
"사당을 지코지 동북쪽에 세우자는 말씀도 이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귀문방을 사찰이나 사당으로 막는다라. 일본에는 그런 풍습이 있군요."
자신이 원하는 대화 주제로 요시츠라를 끌어낸 권람이 속으로 웃으며 다음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지코지 서남방에도 무언가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