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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21화 (221/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21화

221화

"본디 나라를 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삶과 생각을 잘 알아야 한다. 예로부터 나라에서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를 모아 책으로 정리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백성들의 노래에는 삶과 생각이 전부 담겨 있으니까 말이다."

양녕은 온화한 표정으로 이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구중궁궐에서 백성들의 삶과 생각을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주상과 동궁은 뛰어나신 분이지만 일이 바쁘고, 궁을 벗어나 암행을 다니시는 것도 쉽지 않지. 네 아우인 안평은 시서화에 능하지만, 시서화란 본디 사대부의 취미인지라 어울리는 이들도 전부 사대부들뿐이다. 백성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살피기에는 맞지 않아."

"하지만 백부, 저 역시 백성들과 어울리는 재주는 없습니다."

"어울려 본 적이 없는 것이지 어울리는 재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백성들은 시서화에 능한 대군보다는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대군을 더 가깝게 여길 것이다. 또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불교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니, 불교에 능통한 대군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 재능을 살려서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그것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데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양녕의 말이 끝나고도 이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양녕도 아무 말 없이 기다리기를 잠시. 드디어 이유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는 아바마마를 닮아 모든 면에서 다 뛰어나십니다. 명나라 사신들이 감탄할 만큼 용모가 수려하고 키도 훤칠하고, 인품이 자애로우시며 무예도 뛰어나고, 역사에서 병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에 능통하시지요. 신하들도 입을 모아 이런 분이 동궁이신 것이 조선의 큰 홍복이라 말하며, 아바마마의 일을 도울 때도 저보다 형님께서 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무언가 북받치는 듯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제가 글씨를 잘 쓴다고 하여 활자와 인쇄 일을 맡았지만, 제 아우인 안평은 글씨는 물론이고 그림에도 더 뛰어납니다. 그 명성이 명나라에도 퍼졌는지, 사신들이 오면 꼭 안평을 만나 글이나 그림을 받아 가려 하지요. 그래서 저는 학문과 무예로는 형님께, 시서화로는 안평에게 밀립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저는……."

고개를 숙이고 말하던 이유가 얼굴을 들자,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는 항상 저에게도 형님과 안평보다 잘 하는 것이 있다고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막 이루어졌습니다."

원래 역사에서 이유는 이도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능력의 한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통받았다.

그 간격이 만들어 낸 뒤틀림은 결국 조선 역사상 최악의 찬탈로 이어졌고, 형인 이향의 왕릉을 파헤치고 아우 안평대군에게 사약을 내리는 끔찍한 일을 일으키고서야 겨우 잠잠해질 수 있었다.

"주상께서도 너의 능력은 알고 계신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칭찬하는 것이 과하면 오히려 자식을 망치는 법인지라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을 뿐이야. 대신 주상께서는 너의 능력을 천천히 키워 나갈 수 있도록 하나씩 준비를 하셨지."

"아바마마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렇기에 네가 활자와 인쇄 일에 참여해 관청의 일을 익히게 하셨고, 종이 제조 기술 만드는 것을 도우며 백성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익힌 것들을 정말로 백성들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간경도감을 맡기시는 것이다."

그 말에 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이유가 말했다.

"그런 것이었군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사실 정말로 주상께서 이런 생각이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진양에게 주상은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을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해. 그리고 나는 세자의 자리를 스스로 버리고 수많은 업적을 이룬 해동의 오 태백으로 여겨지지. 그렇다면 내가 주상을 성군으로 인정한 것이니, 나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간접적으로 주상의 인정을 받는 것이라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권위를 가진 양녕이 해석한 이도의 의도 역시, 이유에게는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질 것이었다.

"진양아. 지금 내가 열심히 주상과 동궁을 보좌하고자 하나 나도 사람인지라 부족한 점이 많고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니 나와 함께 주상과 동궁을 보좌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이유는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는 말했다.

"물론입니다. 아바마마도, 형님도, 백부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그 모습에 양녕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내가 널 돕게 될 것이다. 네가 원래 역사에서 올라갔던 자리에 절대로 올라갈 수 없도록.'

* * *

1436년 4월 초순 모일.

한성부. 척동상단 본부.

겨울이 지나고, 오랜만에 척동상단 본부에서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양녕이 한명회에게 말했다.

"자네가 돌아온 지는 제법 되었지만, 그간 일이 좀 있어서 이제야 이렇게 만날 기회가 생겼군."

"저도 심요도에서 돌아오고 나서 밀려 있던 몇몇 일을 처리하고 다시 본부업무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바빴었습니다. 그런데 대군께서는 아직도 종이 만드는 기술로 바쁘신 겁니까?"

"그건 이미 내 손을 떠난 지 오래일세. 지금은 시계 만드는 일을 돕고 있어."

"시계를 말입니까?"

"그래. 선공시의 장 부정이 시계를 만들고 있네. 테두리에 톱니를 낸 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 움직이고, 줄에 매달린 추가 땅으로 내려가려는 힘을 동력으로 삼은 시계일세."

"듣기만 해도 복잡하군요."

"아직 설계 중이라 더 복잡해질 수도 있네. 완성까지 대략 2년에서 3년 정도를 보고 있을 정도니까."

"3년짜리 계획이라니, 대군께서도 장 부정께서도 힘드시겠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 괜찮네. 특히나 장 부정은 일이 마음에 드는지 등청할 때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할 정도야. 선공시에서 숙식을 해결해 가며 시계를 만들려고 하는 통에, 주상께서 제때 퇴청할 것을 명하셨을 정도네."

양녕의 그 말에 껄껄 웃던 한명회가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무언가 보고받으러 오신 겁니까?"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자네 얼굴도 볼 겸, 몇 가지 들으려고 온 걸세."

"무엇입니까?"

"사찰과 사당 일이 잘되어가고 있나 해서 말이야."

양녕이 여순항과 금주위, 복주위 일대의 관우와 마조 신앙을 불교로 약하게 하고 장보고 신앙으로 흡수해 없애는 것이 잘 되어 가는지 묻자, 한명회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예. 아주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니 별다른 문제도 없는 모양이군. 뭔가 묘수라도 쓴 겐가?"

"조선 백성들이 이주해 올 때에 맞춰서 척동상단에서 자체적으로 승려들을 모집했습니다. 심요도에서 세를 넓힐 기회라 생각했는지 종파마다 적극적으로 나오더군요."

"그 승려들을 써서 기존의 사찰들을 장악했군."

"맞습니다. 이제 심요도가 조선 땅이 되었으니 심요도에 있던 사찰들 역시 조선 조정에서 인정하는 일곱 종파 중의 하나에 속해서 승록사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명분을 썼습니다. 그리고 종파마다 사찰을 하나씩 할당해 조선 승려들을 사찰 높은 자리에 앉혔지요."

"반발이 있지는 않았는가?"

"반발이 나오기도 전에, 사찰이 낡았으니 보수를 해야겠다며 척동상단에서 돈을 댔습니다. 그렇게 사찰마다 관음전과 용왕각을 중창하거나 새로 짓고, 다른 건물들도 보수했지요. 그럴 때마다 각 사찰의 조선 승려들 의견을 크게 반영했습니다."

"조선 승려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로군."

"예. 척동상단을 뒤에 업었으니 다른 승려들이 조선 승려들을 함부로 할 수 없지요. 게다가 원래 있던 중국계 주민들 대다수가 이주해가고 조선 백성들이 새로 정착하러 왔으니, 그 백성들을 끌어들여 시주를 받아 사찰을 유지하려면 조선 승려들의 지시에 따라 불사나 염불도 전부 조선식으로 바꾸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사찰을 금방 장악했군. 그럼 관우와 마조 신앙을 약하게 만드는 것도 이미 시작했는가?"

"물론입니다. 척동상단에서 돈을 대어 관음재나 용왕제를 크게 열었더니, 조선 백성들은 물론이고 이주하지 않고 남아 있던 중국계 주민들까지 와서 수운의 안전을 빌더군요."

"중국계 주민들이야 여전히 마조묘와 관제묘도 찾겠지만 조선 백성들은 굳이 사찰을 대신해 사당에 갈 이유가 없지. 거기에 중국계 주민들이 사찰에도 시주를 하게 되면 그만큼 사당에 시주하는 돈은 줄어들 테니, 머지않아서 사당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겠어."

"예. 그렇게 되는 동안 장보고 사당을 짓고 백성들이 안전과 재물을 빌게끔 유도할 것입니다. 장보고 사당은 갈수록 번성하고 마조묘와 관제묘는 점점 쇠락하겠지요. 그러면 사당을 이렇게 방치하는 것은 예법에도 맞지 않고 건물도 낡아 위험하다는 구실로 마조묘와 관제묘를 폐하고 마조와 관우는 장보고 사당에 합사할 것입니다."

한명회의 말에 양녕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마조와 관우는 사당에서 사라지겠군. 아주 좋아. 잘하고 있으니 이대로만 계속해 주게."

"감사합니다, 대군."

한명회의 인사를 받으며 양녕이 차를 마시는데, 대방 집무실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일세. 들어가도 되나?"

순간 한명회가 당황해서 양녕을 바라보자, 양녕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네. 들어오라 하게."

"들어오게."

그 말에 문을 열고 들어오던 청년이 양녕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인사하며 말했다.

"대군께서 이미 와 계셨군요. 이거 실례를……."

"하하하! 내가 괜찮다고 해서 한 대방이 자네를 들어오라고 한 것이네. 자네도 여기 와서 앉게."

청년이 머뭇거리면서 양녕의 맞은편, 한명회의 옆자리에 앉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어디, 척동상단 일은 할 만한가?"

"물론입니다. 대군께서 저 같은 모자란 한량을 믿고 일을 맡겨주셨는데 어떤 일이라고 못 하겠습니까."

"모자란 한량이라니. 내 비록 한 대방이 자네를 추천해서 알았지만, 그런 자네를 대행수 자리에 바로 올린 것은 한 대방의 친구여서도 아니고, 척동상단 대방이 추천한 사람이라서도 아니고, 내가 보기에 자네에게 충분한 실력이 있기 때문이었네. 너무 겸손해할 것 없어."

그 말에 청년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군."

"오히려 내가 자네를 너무 한 번에 높은 자리에 올린 탓에 척동상단 안에서 무시당하거나 하지는 않을까 걱정일세."

옆에 있던 한명회가 대신 양녕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대군께서 바로 추천하신 것이 아니라 제 추천을 거친 것이고, 제 친구기도 하다 보니 처음에는 조금 그런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가 워낙 일을 잘 해서 지금은 무시는커녕 다들 믿고 맡기고 있지요."

"다행이로군. 앞으로도 잘해 주게나."

"예, 대군."

청년의 대답을 들은 양녕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자네 요즘 바쁘거나, 자네가 없으면 안 돌아가는 일이 있는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청년이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예?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외교에 관심 있는가?"

"외교는…….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은 있습니다."

그 대답에 양녕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21살의 청년 권람에게 말했다.

"좋아. 그럼 자네도 나하고 일 하나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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