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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20화 (220/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20화

220화

1435년 12월 하순 모일.

한성부. 주자소.

이천은 글자가 빼곡하게 찍힌 고정지 한 장을 펼쳐 들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완전히 새 방식을 써서 만든 고정지에 납 활자로 인쇄한 것이었다.

"새 방식으로 만든 종이라 튼튼함은 떨어질 것이라 하셨지만, 그게 티가 날 정도로 책을 험하게 다루는 사람은 없겠지요. 먹물도 번지지 않았고, 종이 색도 이전 고정지와 같습니다. 이 정도면 인쇄에 쓰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품질입니다."

이천이 고정지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하자 양녕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행이오. 그렇다면 이제 종이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을 것이오."

"그 정도로 빨리 생산됩니까?"

"그렇소. 타저기에 방망이를 여럿 단 덕에 반죽 두드리는 수고가 줄었소. 나무틀 테두리를 높여서 가닥을 가라앉혀 종이를 뜨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아서, 일을 돕던 선공시 관원들이 반나절 따라 해본 것만으로도 제법 괜찮은 종이가 나왔을 정도요."

"대단합니다. 그 정도로 쉽다면 겨울철 농한기에 남는 일손을 쓸 수도 있겠군요."

"그럴 것이오. 그리고 철판에 말리는 것도 생각보다도 훨씬 잘 말라서, 황토벽처럼 크게 만들 것 없이 종이 한 장 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만 만들어도 충분하였소. 그렇게 말린 종이를 두들기는 것 역시 기계를 쓴 덕분에 수고가 많이 줄었고 말이오."

"신기하군요. 언제 한 번 시간이 날 때 조지소에 가서 직접 봐야겠습니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이유가 말했다.

"그럼 이제 장인들을 더 모아서 기술을 개발하고, 기계와 도구들도 더 만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종이를 더 많이 생산해서 파는 것입니다. 제철감과 방직감에서 철과 면포를 파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네 말대로 장인들을 모아서 기술을 개발하기는 해야지. 하지만 장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서 내보내기도 할 것이고, 기계와 도구들도 견본과 설계도를 각지에 보내어 만들어 쓰게 할 것이다."

그 말에 이유가 의아하다는 표정이 되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백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크게 열고자 개발한 기술이다. 나라에서만 만들어서 파는 것보다 백성들도 만들어서 팔게 하는 것이 더 많이 생산되고 값도 더 내리지 않겠느냐."

"아, 그랬었지요."

머쓱해하는 이유를 보며 양녕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다. 지금 고정지 재료로 닥나무와 짚을 쓰지 않느냐. 그런데 짚은 종이 만드는 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지붕을 엮는 데에도 쓰이고, 도롱이를 만들어 비를 피할 때도 쓰이고, 섬을 짜서 곡식을 담는 데에도 쓰이지."

"의식주에 다 쓰이는군요."

"그뿐만이 아니야. 백성들은 닭둥우리에 맷방석, 짚신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을 다 짚으로 만든다. 그렇게 쓰다가 썩은 것은 밭에 거름으로 주고, 지붕이나 물건을 만들고 남은 짚은 소의 여물이 되지. 심지어는 타고 남은 재조차도 염초밭에 뿌려 염초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다."

양녕은 지난 한 달간 조지소에서 사용한 재료와 생산된 종이의 수량을 정리한 종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벌써 성저십리를 포함한 한성부의 볏짚을 다 긁어모아서 쓰다시피 했다. 이번은 첫해라서 백성들도 이어 둔 지붕과 만들어 둔 물건이 있으니 괜찮지만, 이렇게 나라에서 볏짚을 모조리 가져와 쓰는 것이 계속된다면 몇 년 내로 백성들 쓸 볏짚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길 것이다."

"다른 곳에서 가져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지금 닥나무도 부족해서 칠주도에서 닥나무나 왜저를 가져와서 쓴다고 하지 않습니까."

"척동상단에서 그렇게 닥나무와 왜저를 가져올 때 겉껍질과 속 줄기는 제거하고 백닥으로 만들어서 가져온다 하지 않았느냐. 배를 한 번 움직일 때 최대한 이윤을 내기 위해서 쓸데없는 부분을 버리는 것이지. 그런데 닥나무보다도 훨씬 가치가 떨어지는 짚을 다른 곳에서 가져온다면 이윤은 고사하고 손해만 날 수도 있다."

"그러면 나라에서 종이 만드는 시설을 삼남에 만들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제철감이나 방직감처럼 말입니다."

"만들 것이라면 차라리 북방에 만드는 게 낫다. 볏짚 대신 밀짚과 보릿짚만 나기는 하지만, 칠주도에서 닥나무와 왜저를 사 오기도 좋고, 종이 만드는 계절인 겨울도 길지 않느냐. 그나저나 네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새 방식이 백성들에게 퍼지는 것을 꺼리는 것 같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그것이…… 새 방식이 퍼지고 값싼 중하등품 종이를 만드는 이들이 많아지면 나라에서 책을 찍어 내는 일이나 백성들이 공부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익이 된다면 장인들이 상등품 종이를 만들지 않게 될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서예를 즐기는 이유다운 말에 양녕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조정에서 중요한 문서나 책을 만들 때는 계속 상등품 종이를 쓰지 않겠느냐. 나라에서 꾸준히 제값을 치르고 살 것이니 안 팔리거나 손해 볼 걱정도 없고, 나라에서 사 간다면 다른 이들도 그 품질을 믿고 사려고 할 것이니, 상등품 종이 만드는 장인이 없어질 일은 없단다."

양녕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의 이유를 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라에서 사 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지만 걱정할 것 없다. 다른 곳에서도 꾸준히 사가게 만들 방법을 이미 마련해두었으니까."

"상등품 종이를 꾸준히 살 필요가 있는 다른 곳이 있습니까?"

"있지. 바로 불교 쪽이다."

그 말에 이유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불경이나 불화에는 당연히 상등품 종이를 쓰겠지만, 꾸준히 살 일은 없지 않습니까?"

"앞으로 꾸준히 사서 가게 될 것이다. 사찰들이 대장경을 찍어 팔게끔 할 것이니까."

"아! 알 것 같습니다. 일본 호족들이 그리도 대장경에 탐을 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 파시려는 것이었군요?"

"바로 맞췄다. 오우치 가문만 해도 얼마 전에 한 부를 받아 갔지. 다른 일본의 사찰들도 귀중한 보물인 대장경을 가지고 싶어 할 것이야. 대장경을 소장해서 사찰의 위신을 높이려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일본이 내전 중이니만큼 승리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사찰에 시주할 목적으로 대장경을 원하는 호족들도 많겠지."

"일본은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라 사찰이 많으니 팔 곳도 많고, 그냥 종이를 파는 것보다 값도 몇 배나 더 나오겠습니다. 그럼 장경판이 있는 해인사에 시키시겠군요?"

양녕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장경판은 최대한 적게 쓸 것이다. 이번에 장경판전을 고쳐 짓는 것을 감독한 합천군수의 장계에 따르면 인기가 많은 반야심경, 미륵삼부경, 정토삼부경 같은 경전들의 목판은 확실히 많이 찍은 티가 난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일본에 팔 대장경을 전부 그 대장경판으로 찍는다면 많이 손상될 것이야."

"그렇다고 주자소에서 납 활자로 찍을 수도 없습니다. 관청에서 다른 중요한 책들을 뒤로 미루고 불경을 찍는다고 하면 반대가 극심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다. 사찰들을 시켜서 목판을 새로 새겨서 찍게 할 것이다. 그러면 기존의 대장경판이 상할 걱정이 없지."

양녕의 말에 이유가 깜짝 놀라 말했다.

"대장경판이 8만 장이 넘고, 양면으로 새겨져 있으니 판면은 그 두 배에 달합니다. 그걸 다 사찰에 시킨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반발도 크지 않겠습니까?"

"기존 대장경판으로 찍은 것을 종파별로 몇 부씩 나누어주고, 그것을 토대로 새기라고 할 것이다. 불경을 종합하고 편찬하는 과정이 빠지니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훨씬 줄어들지. 그리고 대장경을 찍어서 팔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인데 반발을 하겠느냐?"

"아. 그냥 시키는 게 아니라 찍어서 팔 수도 있게 하는 것이었군요. 그럼 괜찮겠습니다. 오히려 해인사가 속한 화엄종을 제외한 다른 여섯 종파는 대장경을 얻을 수 있으니 좋아하겠군요."

"그래. 그리고 그렇게 힘들거나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야. 목판을 새기기 어려운 것은 목재가 비싸고 새기는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거기다 찍을 때도 종이가 비싸고, 손이 많이 가고. 하지만 이제는 싸면서 재질이 물러 새기기 쉬운 편백나무를 쓸 수 있고, 타저기 같은 기계는 상등품 종이를 만드는 데에도 쓸 수 있으니 상등품 종이도 점차 값이 내릴 것이다. 손이 많이 가는 것만 감당하면 돼."

평소에도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이유는 그 말에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승려들이 일해서 돈을 번다고 하면 유생들도 더 트집을 잡지 못하겠지요.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불경 간행은 공덕이 매우 큰 법보시이니 승려들도 반길 것입니다. 게다가 대장경이면 일본은 물론이고 명나라나 유구국하고 교역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니 그 공로도 인정받을 수 있겠지요."

"네가 좋아하니 다행이구나. 그럼 그 일은 네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주상께 건의 드리도록 하겠다."

이유는 양녕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예?"

* * *

다음 날 오후.

한성부. 양녕대군 사저.

휴가를 내고 자신의 사저에서 이유와 단둘이 식사를 하던 양녕이 말했다.

"주상께서 바로 수락하시고, 중신들도 별 반대가 없어서 다행이야. 곧 이번 일을 위한 임시 관청으로 간경도감이 세워지면, 네가 그 도제조나 제조를 맡게 될 것이다."

"다 백부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너에게 맡긴 것일 뿐이다."

양녕의 말에 이유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중부(효령대군)께서도 불교에 조예가 깊으시지 않습니까?"

"효령 말이냐? 효령은 불심이 깊고 불사에 자주 다닐 뿐이다. 너처럼 불경에 능통하고 인쇄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관청을 맡아서 사람을 부리고 하는 것에도 별 흥미가 없어. 글씨마저도 네가 더 잘 쓰니, 당연히 네가 맡아야 하는 일이지. 그러니 중신들도 별 반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다행입니다."

이유는 띄워 주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지만, 사실 중신들이 반대하지 않은 데에는 다른 뜻도 있었다.

효령대군이 사찰을 자주 다니고 불사에 수시로 참석하는 것을 두고 신하들이 반대하기는 했으나, 형식적으로만 가끔 반대할 뿐이고 더 파고들지 않았던 것은 효령대군이 이도의 형이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불교에 깊이 빠질수록 정치에서 멀어지고 힘도 없어지게 되니, 신하들이 굳이 막을 필요가 없었고, 그것은 이유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유는 주상의 차남이고, 동궁도 이미 정해진 상태다. 하지만 아바마마에 이어 주상까지 장자가 아니면서 즉위했으니, 중신들도 차남인 이 아이를 견제해 두어서 나쁠 것 없다 생각했겠지.'

그리고 이유의 원래 역사에서의 성격과 행적을 아는 양녕은 한 가지 더 해둘 것이 있었다.

"내가 장차 너에게 더 부탁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

진지한 양녕의 목소리에 이유는 마시려던 술잔을 다시 내려놓고 조용히 물었다.

"무엇입니까?"

"나는 효령처럼 성격이 온화하지도 않고, 주상처럼 현명하지도 못하다. 그렇지만 이런 나도 잘하는 것이 있어서, 외교나 기술로 주상을 열심히 보좌하였더니 세상이 나를 좋게 보아주더구나. 너도 나처럼 주상과 동궁을 보좌하였으면 한다. 너만이 가진 재능으로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말이다."

이유는 순간 눈빛이 흔들리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는 긴장감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만이 가진 재능과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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