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18화
218화
1435년 11월 중순 모일.
성저십리. 옛 조지소.
도성 서북문인 창의문 밖에 있던 조지소는 궁에서 쓸 종이를 만드는 관청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지폐인 저화를 쉽게 위조하지 못하도록 동일한 규격으로 만드는 데에 쓸 고급 종이를 만들 목적으로 세운 관청이었다. 화폐 제작이 목적인 탓에 소속도 공조가 아니라 호조였다. 하지만 국부론이 퍼지고 동전 생산이 늘면서 나라에서 저화 제도를 폐지했고, 궁에서 쓸 종이조차 대동법으로 구매하게 되면서 목적을 잃은 조지소는 폐지되고 말았다.
"폐지되었다고 해서 아예 버려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군요. 아직도 쓰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신기한 듯 조지소 안을 둘러보는 이유의 질문에 양녕이 대답했다.
"관청으로서의 조지소야 폐지되었지만, 당장 건물과 시설을 통째로 없앨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조지소에서 일하던 장인들이 당장 오갈 데가 없어지니 말이다. 그래서 남기를 원하는 장인들에게 약간의 사용료를 받고 빌려주고 있었지. 나라에서는 어차피 안 쓰이는 건물에서 사용료를 받을 수 있고, 장인들은 사용료만 조금 내면 쓰던 시설을 계속 쓸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느냐."
그때 관청 안쪽에서 한 노인이 물 묻은 손을 옷자락에 닦으며 나오더니 양녕에게 꾸벅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대군."
"반갑네. 자네가 지금 조지소를 쓰고 있는 자인가?"
"그렇습니다. 이번에 대군께서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시니 적극적으로 도와드리라는 지시는 이미 받았습니다."
"그럼 더 설명할 건 없겠군. 그런데 이 시설은 자네 혼자 쓰는가? 다른 장인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예. 원래는 젊은 장인들이 몇 있었는데, 그 젊은이들은 여기서 일하면서 돈을 모아서는 따로 공장을 차려서 나갔습니다. 저는 늙어서 그럴 기력도 없고 배운 재주라고는 종이 만드는 것뿐이니, 사용료를 조금 내고 여기서 일도 하고 숙식도 해결하고 있지요."
"그런 것이었군. 그런데 자네 혼자 일해서 먹고사는데, 이번에 우리 일을 도우면 생업에 지장이 생기는 것 아닌가?"
양녕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노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대군을 잘 도와드리라며 나라님께서 이것저것 내려 주셔서, 이미 그것만으로도 안심하고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다행일세. 그럼 일단 날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세."
* * *
잠시 후.
따뜻하게 군불이 지펴진 온돌방 바닥에 앉은 양녕이 앞에 앉은 노인에게 말했다.
"새 기술을 개발하려면 이전 기술을 알아야겠지. 우선 지금 자네가 쓰는 종이 제조법을 알려 주게나."
"예, 그럼 우선 재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인의 말에 이유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종이 만드는 재료면 닥나무 아닌가?"
"물론 종이 만드는 데에 으뜸인 것은 닥나무 햇가지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요가 충당이 안 되는 탓에 다른 재료도 씁니다. 닥나무 말고 제일 많이 쓰는 재료는 왜저이지요."
왜저라는 말에 양녕이 기억을 떠올리고 말했다.
"왜저라면 내가 대마도를 정벌하고 조정에 묘목과 씨앗을 보냈던 일본 닥나무를 말하는 것이겠군."
"맞습니다. 아직 조지소가 있던 때라서, 조지소에서 한번 왜저로 종이를 만들어보라는 지시가 조정에서 내려왔었습니다."
"어땠는가?"
"기존 닥나무하고 성질도 비슷하고, 크게 부족한 점도 없어서, 왜저만 써도 괜찮은 종이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공장을 차려서 나간 젊은이들 중에는 닥나무를 직접 구하러 다니는 대신 척동상단에서 싸게 파는 칠주도산 닥나무나 왜저를 사서 쓰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칠주도가 따뜻한 곳이라 그런지 닥나무나 왜저가 잘 자라서 값이 싸다더군요."
"왜저를 잘 쓴다니 다행이군. 다른 재료도 써본 적 있는가?"
"닥나무에다가 방직감에서 나온 목화솜 부스러기를 섞어서 만들어 본 적도 있습니다. 부스러기라 그런지 가닥의 길이가 짧아서 많이 섞을수록 종이가 약해지는 단점이 있지만, 종이 색은 희고 곱게 잘 나왔습니다. 지금은 목화솜 부스러기가 나오는 족족 방직감 근처 종이 장인들이 먼저 다 사 가는 탓에 한성부 근처에서는 구경도 못 합니다, 허허허."
그 말에 이유가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목화솜이 들어간 종이라. 안평이 그림 그리기 좋은 종이라며 호평했던 기억이 나는군. 그것 말고도 또 섞는 게 있는가?"
"예. 대나무 껍질을 쓰기도 하지만 보통 짚을 섞습니다. 이렇게 만든 종이는 고정지라고 아예 따로 이름이 있습니다."
"짚으로 종이를 만든단 말인가?"
놀란 표정이 된 이유에게 옆에 있던 양녕이 말했다.
"보통 짚 고자를 써서 고정지라 하지만 색깔에서 따서 황고지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 종이다. 궁에서도 제법 쓰이니 너도 보았을 것 같은데?"
"아, 황고지라고 하니 알겠습니다. 그 노란색 종이 얘기였군요. 좀 거칠긴 했지만, 설마 짚을 섞어 만들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노인이 온화한 표정으로 이유에게 말했다.
"주변에서 어떤 농사를 짓는가에 따라서 넣는 짚도 볏짚, 보릿짚, 밀짚 등 다양합니다. 하지만 종류가 뭐건간에 잘 가공해서 섞기 때문에, 종이가 무슨 여물 굳힌 것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태생이 지푸라기고 가닥이 짧은 탓에 많이 섞으면 종이 품질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책 찍는 종이에는 많이 못 넣고, 막 쓰는 종이에는 많이 넣지요."
이유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황고지가 좀 거칠긴 해도 못 쓸 종이는 아니었네. 간단히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는 나쁘지 않았어."
"그림을 그릴 때 쓰셨다면 아마 닥나무보다 짚이 더 많이 들어간 고정지였을 겁니다."
"짚이 더 많이 들어갔다고? 그럼 짚에 닥나무를 섞은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그 정도였단 말인가? 생각보다 짚이 괜찮은 종이 재료인가 보군."
감탄하는 이유에게 노인이 말했다.
"예. 하지만 닥나무와 짚을 섞으면 두 재료의 가닥 색이 서로 다른 탓에, 희고 누렇게 얼룩덜룩해져서 지저분해 보이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황벽으로 염색해서 아예 전부 노란색으로 만들지요."
"과연, 그래서 황고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었군."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양녕 옆에서,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장영실이 입을 열었다.
"짚이면 구하기 쉬운 것인데, 짚을 써서 만든 종이가 품질까지 나쁘지 않다면 굳이 다른 재료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네. 그러면 재료 손질은 어떻게 하는가?"
양녕의 질문에 노인이 대답했다.
"닥나무와 왜저는 껍질이 재료가 됩니다. 햇가지를 잘라서 수확한 다음 반나절 간 푹 찌면 부드러워지는데, 그 껍질을 벗겨다가 말리지요. 그 말린 껍질을 다시 물에 불려서 검은 겉껍질은 물론이고 녹색 속껍질까지 벗겨 흰 부분만 남긴 다음 다시 말립니다. 그걸 백닥이라 부릅니다."
"엄청 손이 많이 가는군."
"예. 척동상단에서 닥나무나 왜저를 팔 때는 이 과정까지 다 마친 백닥 상태로 팔아서, 그걸 사서 쓰면 값은 조금 나가도 손이 덜 갑니다. 그렇게 직접 만들거나 사 온 백닥을 물에 불린 다음 잿물에 푹 끓여서 가닥이 다 풀어지게 합니다. 끓인 게 식으면 찬물로 잿물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새 찬물에 넣어 햇볕에 오래 두면 빛이 바래서 하얘집니다."
"짚으로 만들 때도 비슷한가?"
"비슷합니다. 벗겨낼 껍질이 없으니 바로 불려서 잿물에 끓이는 것하고, 근본이 노란색이라 햇볕에 오래 두어도 아주 하얘지지는 않는 것만 조금 다르지요."
"닥나무 가지마다 껍질 모양이 다 다르니 속껍질까지 벗기는 것은 무조건 사람 손으로 해야 할 것이고, 잿물에 푹 끓여 풀어지게 하는 것이나 햇볕에 두어 바래게 하는 것이나 전부 시간이 걸려야 이루어지는 일이니 기계를 써서 단축할 수는 없겠군."
양녕이 작게 한숨을 쉬자 옆에 있던 이유가 대신 노인에게 물었다.
"하얘진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가?"
"물에서 건져서 잡티를 손으로 다 골라냅니다. 그다음 뭉쳐서 돌판에 올려놓고 나무 방망이로 계속 내리쳐서, 가닥이 완전히 풀어져서 곤죽이 되고 부피가 두 배로 늘어나게 합니다."
그 말에 이유가 양녕을 보며 말했다.
"백부. 잡티를 고르는 건 사람이 직접 해야겠지만, 나무 방망이로 계속 치는 건 기계를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리 생각한다."
이어서 이유와 양녕이 거의 동시에 장영실을 바라보았다. 두 대군의 기대감 가득한 시선을 받은 장영실이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뭘 만들면 되겠습니까?"
"풀어진 종이 재료를 나무 방망이로 계속 내리치는 기계를 만들어주게. 이미 비슷한 일을 하는 물레망치가 있으니, 새로 설계할 필요 없이 물레망치를 개조하면 되지 않겠나? 물론 설계는 있던 걸 개조한다 쳐도 물레망치 자체는 새로 만들어야 하겠지만 말이야."
양녕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장영실이 말했다.
"물레망치 부품들도 바로 쓸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이전에 물레망치 만들 때 문제점을 고치면서 교체한 부품들인데, 버리지 않고 선공시 창고에 모두 보관하고 있었지요. 그 부품들을 다 가져와서 모자란 부품만 새로 만들면 금방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부품이 이미 있고 금방 만들 수 있다면 좋긴 한데, 문제점을 고치면서 교체된 부품이면 부품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것 아닌가?"
양녕의 걱정에 장영실이 괜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물레망치는 망치를 충분한 힘으로, 정확한 각도로, 매번 같은 자리에 때려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어서, 그게 충족되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풀어진 종이 재료를 나무 방망이로 때리는 것은 그냥 내리쳐서 곤죽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니, 오히려 각도나 때리는 위치가 불규칙할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 오히려 물레망치처럼 한 곳만 계속 때리면 제대로 곤죽이 안 될 테니 말이야. 그렇게 보면 물레망치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되는 부품이, 반대로 새로 만들 기계에서는 아주 잘 작동하는 부품이 될 수도 있겠어."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선 있던 부품을 최대한 써서 만든 다음 조금씩 고쳐가면 제작 시간도 단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겠네. 그럼 부품을 옮겨와서 조립하고, 필요하면 새 부품을 만들 인력이 필요하겠군. 그건 내 주상께 건의하겠네."
"괜찮습니다. 이미 종이 기술 개발에 필요하다면 선공시 관원들을 써도 된다는 주상전하의 윤허를 받아두었습니다. 그러니 선공시 관원들을 시키면 됩니다. 어차피 지금은 선공시에 다른 할 일도 없고 말입니다."
"벌써 말인가?"
당황 섞인 양녕의 말에 장영실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어차피 종이 기술 개발에 기계가 필요하면 선공시에서 나서야 하는데, 마침 제가 선공시 부정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리 건의를 올리고 윤허를 받아두었습니다."
그 대답에 양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같이 시계 만들자고 약속해 두길 잘했군. 알겠네. 그럼 기계 제작은 자네에게 맡기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