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17화
217화
1435년 11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주자소.
여순항을 거쳐 심양성까지 돌아보고 마침내 한성부로 돌아온 양녕은 주자소에 들러 장영실과 이야기 중이었다.
"그럼 심요도 각 고을에 풍기대와 측우기는 문제없이 다 설치된 것이로군요."
"그렇네. 심양성 같은 곳은 특히나 비가 얼마나 오는지가 중요한 곳이라 그런지 측우기 설치를 반겼네."
양녕의 말에 장영실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심양성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심양성 남쪽으로 혼하가 흐르고, 지난 원정 때 혼하 상류에 여진족 놈들이 제방을 만들었다는 건 아는가?"
"아, 들었습니다. 회경군과 정로군을 떨어뜨려 놓으려고 만든 빈 제방이었다지요?"
"그렇네. 애초에 수공을 할 것처럼 속일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 허술하게 쌓았던 탓인지, 혼하의 엄청난 수량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무너졌다 하네. 다행히 심양성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혼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직접 본 것이지."
"그래서 비가 얼마나 오는지가 중요하게 된 것이군요. 비가 많이 오면 혼하의 수량이 급격하게 불어날 테니 말입니다. 강물의 수량을 쉽게 잴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영실이 심각한 표정이 된 것을 본 양녕이 슬쩍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내가 없는 동안 활자 생산이나 인쇄에 뭔가 문제는 없었는가?"
"예. 별문제 없었고 지금도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판하고 인쇄하는 장인들 말고는 여유도 좀 생겨서, 오늘은 진양대군과 부사(이천)께서는 쉬시고 저만 나와서 상황을 살펴보고 있었지요."
"잘 되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럼 그밖에 별다른 일은 없었는가?"
양녕의 말에 장영실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문제 될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반대로 좋은 일은 있었습니다. 조판하는 이들이 지혜를 낸 덕분에 작업 속도가 빨라지고 정확도도 올라간 일이었지요."
"흥미롭군. 자세히 말해 주겠나?"
"이전에는 바닥이 얕은 나무틀에다 활자를 올려서 조판했는데, 당시 쓰던 활자는 테두리가 균일하지 못해 나무 조각으로 정위치를 맞춰야 했습니다. 게다가 활자의 특성상 글자의 좌우도 바뀌어 있지요. 조판하면서 할 일은 많은데 글자까지 뒤집혀 있으니, 신경 쓸 일이 많은 탓에 조판 속도는 속도대로 늦고 오탈자가 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랬을 것 같군. 그게 지금은 달라진 것인가?"
"예. 새 나무틀은 활자 뒷부분이 이전보다 길다 보니 나무 틀도 깊은 것을 씁니다. 그런데 조판하는 이들이 나무 틀 바닥을 없애고, 활자 뒷면에는 글자를 똑바르게 써놓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무 틀을 탁자 위에 뒤집어 놓은 다음, 활자를 거꾸로 집어넣는 것이지요."
"오호라. 그러면 뒷면에 똑바르게 쓰여 있는 글자를 보면서 조판할 수 있으니 속도가 빠르고, 그 상태로 바로 확인하기도 좋으니 오탈자도 줄겠군."
"맞습니다. 게다가 활자 규격이 다 똑같으니, 나무 조각으로 하나씩 위치를 잡아줄 것 없이 그 상태 그대로 죔쇠로 단단히 조이고 뒤집기만 하면 조판이 끝납니다. 모든 활자가 탁자 윗면에 닿은 상태로 조이고 뒤집었으니, 당연히 활자의 찍히는 면도 전부 같은 높이가 되어있지요."
양녕이 흡족한 표정으로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인쇄할 때 아주 깔끔하게 찍히겠군. 역시 직접 일을 하는 이들의 지혜란 참 대단한 것 같네."
"그러게 말입니다. 하여간 그래서 거푸집 제작, 활자 주조부터 조판, 인쇄에 이르기까지 전부 순조롭습니다. 책 찍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차라리 종이가 부족할 지경입니다. 허허허."
그렇게 말한 장영실이 웃으며 차를 마시는데, 양녕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종이 부족이라……. 그래. 활자만으로는 안 된다. 종이까지 충분해야 많은 책을 찍어 내고, 그 책이 사람들에게 지식을 퍼뜨리고, 그 지식이 다시 책이 되어 퍼지는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자네, 나하고 같이 종이를 만드세."
양녕의 갑작스러운 말에 장영실이 당황해서 물었다.
"예? 갑자기 웬 종이입니까?"
"방금 자네 입으로 책 찍는 속도가 빨라서 종이가 부족할 지경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장인들 말고는 여유도 좀 생겼다고 했고. 그러니 나하고 같이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세. 주상께는 내가 말하겠네."
괜한 소리를 꺼냈다고 생각했는지, 장영실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심요도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니, 원래 이다음에 하려던 일을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주상께서는 책 찍는 속도가 빨라서 차라리 종이가 부족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들으시자마자, 원래 하려던 일을 하고 있는지는 상관없이 종이 제작도 추가로 지시하실 분이라는 것은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건……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다음에 하려던 일은 역법 제정인데, 심요도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지만 아직 집현전 관원들이 바쁘니, 어차피 역법 제정을 바로 시작할 수도 없어. 차라리 이렇게 여유가 있을 때 종이 제작 기술을 만들어 두면 여러모로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양녕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인 장영실에게 미소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에게 정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로 된 시계를 만드는 구상이 있다는 얘기를 자네에게 한 적이 있었네. 그때는 급한 일이 끝나고 나면 같이 만들자고 했었는데, 그 뒤로 회경군 창설부터 시작해서 온갖 일들이 일어나면서 내가 바빴던 탓에 벌써 10년 가까이 지나 버렸군. 혹시 자네도 기억하는가?"
그 말에 장영실이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기억하다마다요. 조면기를 개발할 때의 일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 이후로 말씀이 없으셔서 오히려 대군께서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내 어찌 그런 중요한 약속을 잊겠는가. 다 기억하고 있네."
"정말 기쁩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계 얘기는 왜 꺼내신 겁니까?"
"사실 그 당시에는 나라에서 그런 복잡한 시계를 만드는 데에 쓸 예산도 부족했고, 만드는 것이 급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아직 기술이 부족했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국고에도 제법 여유가 있고, 조만간 역법을 정확하게 만들려면 밤에도 정확하게 시간을 잴 수 있는 시계가 필요하네. 그리고 지금이라면 내가 구상한 시계를 만들 기술도 충분할 것이야."
무슨 기술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표정의 장영실에게 양녕이 이어 말했다.
"녹로처럼 밧줄로 감아 당겨 움직이는 것도, 물레망치처럼 막대로 눌렀다 놓아서 움직이는 것도 아닌, 테두리를 톱니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파낸 바퀴끼리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움직이는 기계를 만드는 기술이네. 기계를 설계하는 것은 물론이고 금속과 목재를 다루는 것도 10년 전보다 훨씬 발전했으니 충분할 걸세."
그 말에 장영실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정말로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일세. 그러니 종이 제작 기술을 미리 개발해서 그 공로로 예산도 더 받고, 주상께서 갑자기 일을 더 시키실 걱정이 없어서 마음도 편한 상태로, 이번에야말로 나하고 같이 시계를 만들어 보세."
"물론입니다."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하는 장영실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 * *
1435년 11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주자소.
양녕은 같이 활자 개발에 참여하던 이들을 모두 모은 자리에서 설명을 마치며 말했다.
"그리하여 나와 진양, 장 부정은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으니, 한동안 주자소의 일은 이 부사(이천)께 맡기겠소. 주상께 말씀드리고 승인받은 일이긴 하나, 혹시라도 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도우러 올 테니 안심하시오."
"알겠습니다. 사실 슬슬 종이가 부족해져 가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 중이었는데, 대군께서 종이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 주신다면야 근심할 것이 없지요. 어지간한 일은 제가 해결할 수 있으니 안심하고 개발에 전념하셔도 될 것입니다."
이천의 옆에서 이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백부, 그런데 만드는 양을 늘리면 필연적으로 품질은 떨어지는 법이지 않습니까? 조선의 종이는 천하에 이름난 것인데, 그 품질이 떨어질까 걱정입니다."
그 말에 양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조선의 종이가 빼어난 것이야 나도 알고 있다. 잘 만든 종이는 가벼우면서도 질기고, 부드러우면서도 먹이 쉽게 번지지 않지. 그래서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좋은 종이는 닥나무가 아니라 누에고치로 만드는 줄 아는 사람도 많다지 않느냐. 그런 기존의 종이는 그대로 생산하면서,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종이를 새롭게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려는 것이야."
"면포처럼 말입니까?"
"그래. 손으로 물레를 돌려 뽑은 고운 실로 짠 상등품 면포가 있는가 하면, 방적기로 거칠게 뽑은 실로 짠 중하등품 면포도 있다. 상등품 면포는 중요한 옷을 짓거나 조공이나 무역으로 이익을 내고, 중하등품 면포는 거칠지만 값이 싸서 백성들이 큰 부담 없이 옷을 지어 입을 수 있지. 네 비유가 정확하구나."
양녕의 칭찬에 이유가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좋다 하여 상등품만 만들 것이 아니고, 싸다 하여 중하등품만 만들 것도 아니고, 각자의 쓰임이 있으니 둘 다를 만드는 것이로군요. 그렇다면 백부께서 만드시려는 중하등품 종이의 쓰임은 무엇입니까?"
"물론 지금 당장은 주자소에서 책을 찍는 데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농서나 의서와 같은 책들이 많이 퍼져야 백성들에게 이로움이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공부를 하거나 자신의 지식을 글로 써서 남기려는 백성들에게 종잇값이 부담되지 않도록 하고자 하려고 한다."
"전부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까?"
신난 표정에서 약간 놀란 표정이 된 이유를 보며 양녕이 말했다.
"그렇단다. 물론 종이는 면포와 달라서, 없다고 해서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것을 견디는 데에 지장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덥고 추운 것을 피하려는 것은 짐승도 가진 본성이야. 사람에게는 배우고자 하는 본성이 있고 또 배워야만 한다. 논어 역시 배우고 익히면 즐거움이 있다는 공자 말씀으로 시작하지 않느냐. 그리고 그 즐거움을 모든 백성이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선비의 일인 법이다."
백성을 가르치고자 한다는 양녕의 이야기를 듣는 이유의 표정은 점점 진지해져 갔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필연묵이 귀하기만 한 것이어서는 안돼. 물론 귀하고 좋은 것도 있어야 하지만, 누구나 큰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것도 있어야 한다. 지금 거위 한 마리에서 상등품 깃털 붓은 몇 자루가 나올 뿐이지만, 나머지 깃털로 만드는 중하등품 깃털 붓은 양이 많아 그 값이 싸다. 벼루와 먹은 있으면 좋은 것이지만, 없더라도 검댕을 물에 개면 먹물을 만들 수 있지."
"그렇지만 지필연묵 가운데 종이는 여전히 귀한 것만이 있어서 백성들이 접하기 어렵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래서 종이를 싸게 많이 만드는 기술을 개발해서, 장차 백성들의 배움의 길을 크게 열고자 한다. 그 일에 너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데, 어떻느냐 진양아. 나를 도와주겠느냐?"
양녕의 기대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이유는 기쁨과 떨림이 뒤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해동의 오 태백께서 백성을 위해 백 년을 내다보고 계획하시는 일에 제가 함께할 수 있다니 큰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