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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16화 (21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16화

216화

"장보고를 신으로 섬기게 하시려 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양녕의 단호한 목소리에 한명회가 당황하며 물었다.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로서 해적을 토벌하고 신라인들이 노예로 팔리는 일을 뿌리 뽑았으니, 수운의 안전을 비는 것이야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물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겁니까?"

"해적을 토벌하여 바닷길을 안정시키고 교역이 잘 통하게 하였으니 재물을 풍요롭게 한 것이지. 자신만 돈을 번 것이 아니고 남들이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해준 사람이니 오히려 더 재물의 풍요를 빌만하지 않겠나? 그리고 장보고 스스로도 여러 나라와 교역하여 부를 쌓았으니 재물의 신으로 어디 하나 모자란 곳이 없네."

"대군의 말씀을 들으니 그건 또 그렇습니다. 그런데 장보고가 중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까? 신앙을 퍼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마조와 관우 신앙을 흡수하기까지 하려면 장보고가 너무 생소한 사람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양녕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네. 조금 전에 장보고가 스스로도 부를 쌓았다고 했지? 장보고는 그 부로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을 많이 도왔네. 당나라 하남도 등주의 적산이라는 곳에 법화원이라는 사찰도 세웠지. 물론 오래가지 못하고 당 무종 때에 법난을 당해 폐사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름은 전해지고 있네."

양녕이 말한 지명을 들은 한명회가 눈을 크게 떴다.

"아! 하남도 등주라면……."

"그래. 심요도에 필요한 물자를 사 오기로 한, 지금의 산동성 등주부일세. 물론 등주부가 넓은 탓에 여기 여순항에서 노철산수도를 건너가서 닿는 봉래와, 법화원이 있던 적산은 등주부 이쪽 끝과 저쪽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떨어져 있어. 하지만 등주부 전체에 장보고의 영향력이 미쳤으니 그 이름도 등주부 전체에 전해질 걸세."

"그렇다면 등주부와 왕래가 잦았던 심요도 일대에도 장보고의 이름이 어느 정도는 퍼져 있겠군요. 하긴, 심요도 일대에서 마조와 관우의 영향을 지우려는 것이 목적이니 모든 중국인이 장보고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게다가 장보고의 이름은 일본에도 알려져 있네. 일본의 천태승인 원인(엔닌)이라는 자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어 유학을 포기해야 할 뻔했는데, 장보고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무사히 유학을 마칠 수 있었네. 그래서 원인은 장보고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왜경에 돌아가서도 적산의 법화원을 본따 적산선원이라는 사찰을 창건했네."

"장보고가 제가 알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이었군요."

"그뿐만이 아니야. 그 영향으로 경내에 사당을 짓고 신라대명신이라는 이름으로 장보고를 모시는 사찰도 일본에 여럿 있네."

갑자기 일본이 계속 언급되자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던 한명회가 말했다.

"그렇다면 장보고 신앙은 마조와 관우 신앙을 흡수해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칠주도와 계응국, 일본에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군요."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군. 맞아. 바로 그걸세. 이미 칠주도의 모든 사당을 없앴고, 계응국에서도 사당을 하나둘 없애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걸로는 백성들의 기존 신앙까지 완전히 지울 수는 없네. 하지만 수운의 신이자 재물의 신이고, 법화원을 짓고 승려를 후원해 호법신의 면모도 있는 장보고라면 남아있는 기존 신앙의 흔적마저 모조리 흡수해 칠주도를 완전한 조선의 땅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야."

"장보고 한 사람으로 조선 서북쪽의 마조와 관우 신앙과, 조선 동남쪽의 일본 토착 신앙을 동시에 잠재운다니 실로 묘책입니다. 잘 되면 좋겠습니다."

"잘 될 걸세. 장보고의 이름 그 자체도 도움이 될 것이고."

한명회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장보고의 이름에도 뭐가 있습니까?"

"장보고의 이름은 지킬 보(保)에 언덕 고(皐)자를 쓰네. 그런데 그 음은 각각 보배 보(寶)와 높을 고(高)하고 통하지 않는가."

"그렇지요."

"거기다 조선말로만 통하는 것이 아니야. 중국말로도 저 한자들은 음이 닮거나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조까지 일치하고 반절 표기까지 똑같네. 당송 시대부터 지금까지 발음이 통한다는 얘기야."

양녕은 흥미로운 표정이 된 한명회를 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일본말로도 저 한자들은 음이 똑같네. 아예 일본에서는 원인 시절부터 보배 보에 높을 고를 써서 장보고의 이름을 적어왔을 정도니, 오히려 그들 눈에는 지킬 보에 언덕 고를 쓰는 표기가 어색해 보일지도 몰라."

"대단합니다. 이름부터 부귀를 담고 있으니 말씀하신 것처럼 이름 그 자체도 도움이 되겠군요. 오히려 대체 왜 지금까지 장보고가 신으로 섬겨지지 않은 것인지 궁금할 지경……."

한명회가 하던 말을 멈추고 양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보고는 신라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최후를 맞이한 반역자이니, 사당을 짓고 모시기에는 문제가 좀 있는 것 아닙니까?"

"하하하! 장보고를 모시는 게 괴력난신 아니냐는 얘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했으면서 그건 걱정이 되는가 보군. 걱정 말게. 최근에는 조정 안에서도 장보고가 역모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충신이라 보는 사람이 많이 늘었어.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은 있지만 정작 반란의 내용이 없으니, 장보고를 시기하고 왕의 눈을 가리려는 이들이 모함을 한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지."

"반란의 내용이 없기는 하지만, 반대로 모함을 당한 것이라는 정황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충신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하군요. 충신이 확실합니다."

이상하다는 듯 말을 하다가 무언가를 알아챈 듯 씨익 웃으며 말을 마친 한명회를 보고 양녕도 따라서 씨익 웃었다.

'장보고의 아명은 궁파. 활에 능했다 해서 붙은 활보라는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활과 무예에 능하고, 강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외적에게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고, 왕의 눈을 가린 간신들의 시기를 받는다. 장보고의 행적이 태조대왕과 겹쳐지는 것이 이리도 많은데, 태조대왕께서 충신이자 영웅이시니 당연히 장보고 역시 충신이자 영웅이어야 하는 것이지.'

"사실 장보고를 신으로 만드는 데에 문제가 되는 건 다른 쪽이야. 장보고가 충신으로 여겨지니 괴력난신으로 취급받지는 않겠지만, 옛 나라들의 시조도 아니고, 이름난 산이나 큰 강의 신령도 아닌데 나라에서 제사를 행하거나 후원할 수는 없네. 특히나 기존에 없던 신앙을 만들다시피 하는 것 아닌가. 나라에서 도움을 주려는 순간 상소문이 빗발칠 걸세."

"그렇다면……."

"그래. 자네에게 맡기겠네. 어차피 녹주부에서 거솔도까지, 계응국에서 심요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동서남북의 모든 바다는 다 척동상단의 뱃머리가 닿는 곳이지 않은가."

그 말에 한명회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척동상단이 앞장서서 장보고를 수운의 신이자 재물의 신, 호법의 신으로 섬기면서 그 신앙을 퍼뜨리라는 말씀이로군요."

"그렇네. 마침 심요도가 조선 땅이 되면서 조선의 해안이 더 길어지고, 나주부 강진현이 조선의 동서남북 뱃길의 거의 중간 위치에 오게 되었는데, 청해진이 있던 완도가 바로 그 강진현에 있는 섬이지 않은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이니, 완도를 장보고 신앙의 중심지로 삼으면 될 것이야."

"수운의 안전과 재물의 풍요를 모두 관장하면서 조선 뱃길의 중앙에 그 신앙의 중심이 있고, 불자들의 수호자면서 중국과 일본에도 알려져 있고, 큰 업적을 세웠지만 억울한 최후를 맞이한 실존했던 영웅을 신으로 섬긴다니. 듣기만 해도 파급력이 강해 보이는 신앙입니다."

한명회는 야심 가득한 표정으로 양녕을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심요도와 칠주도의 조선 것이 아닌 신앙은, 머지않아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 * *

1435년 6월 하순 모일.

심요도. 심양성 회경군 주둔지.

회경군이 심요도로 옮겨오며 같이 옮겨온 회경군 도원수 최윤덕은 오랜만에 만난 양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 여순항에서 다시 배를 타고 개주위에 내리신 다음, 해주위와 요동성을 지나 심양성까지 오신 것이군요. 여독이 많이 쌓이셨겠습니다."

"조금 피곤하지만 괜찮소. 그나저나 외성이야 아직이라 쳐도 내성을 벌써 다 완성하고 회경군이 들어와 주둔하고 있을 줄이야. 난 아직도 주변에 만든 요새에 임시로 주둔 중일 거라 생각했소."

"중요한 성이니 짓는 것을 서두르기도 했고, 저나 회경군 병사들이나 축성 경험이 쌓여서 짓는 속도가 빨라진 덕도 있습니다. 이전에 만들던 성들과는 구조도 재료도 많이 다르지만, 어찌 되건 축성의 기본이란 통하는 것이니까요. 쌓는 높이도 낮고 재료도 크고 무거운 것이 없어 오히려 더 수월한 부분도 있었고 말입니다."

"그러면 외성도 금방 완성되겠소. 역시 축성대감이시오."

거솔도에서 이미 수많은 성과 요새를 지어 붙은 그 별명에 최윤덕 본인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이름값이 무겁군요."

"하하하! 기대하고 있겠소."

최윤덕을 따라 웃던 양녕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금나라나 북원 쪽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소?"

"금나라 쪽은 조용합니다. 지난번 참패의 여파를 수습하느라 바빠서 아직은 내분이 날 여유도 없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몽골 쪽에서는 몇 가지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북원이 아니라 몽골이라 하시는 것을 보니 오이라트 쪽 소식인가 보오."

"둘 다입니다. 오이라트의 타이시였던 토곤이라는 자가 황금 씨족의 청년 하나를 찾아서 칸으로 추대하고, 타이순 칸이라는 칸호를 올렸다 합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일어났던 일이기에 양녕은 크게 놀라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북원의 아다이 칸, 오이라트의 타이순 칸. 칸이 둘이 된 셈이구려."

"예. 오이라트도 구심점이 생겼으니 아마 한동안 두 세력이 치열하게 싸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타이순 칸의 타이순이 몽골말은 아닌 것 같던데 혹시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태종이라는 뜻이오."

바로 돌아온 양녕의 대답에 잠시 멍하니 있던 최윤덕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설마 그 묘호에 쓰이는 태종입니까?"

"그렇소."

"아니 이런, 아무리 예법 없는 오랑캐들이라고 한다지만 살아 있는 칸에게 묘호를 붙인단 말입니까?"

어이가 없어 하는 최윤덕을 보고 피식 웃은 양녕이 말했다.

"새 칸에 묘호를 붙인 것이 아니오. 옛 칸의 묘호를 끌어온 것이지."

그 말에 최윤덕이 무언가 눈치챈 표정이 되었다.

"……원 태종을 말하는 것이겠군요."

원 태종 보르지긴 오고타이.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로 흔히 오고타이 칸으로 불리는 자였다.

"그렇소. 원 태종 같은 칸이 되라는 뜻으로 그런 존호를 올렸을 것이오."

"원 태종이면 그야말로 정복자 그 자체 아닙니까. 오이라트 쪽이 정말로 마음을 독하게 먹은 모양입니다."

"그러게나 말이오. 그러니 도원수께서는 북원과 금나라는 물론이고 오이라트의 동향도 최대한 자주 파악해 조정에 보고해 주시길 바라오."

"물론 그리해야지요. 성과 요새들도 더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최윤덕의 말을 들으며 찻잔을 들어올린 양녕은 진지한 눈빛을 빛냈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웠고 조선이 요동을 얻었다. 아룩타이가 오이라트가 아니라 조선의 손에 죽은 것 정도는 변수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원래 역사와 달라졌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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