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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14화 (21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14화

214화

겨우 웃음을 멈춘 양녕에게 장영실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납 활자를 주조해서 만들 때 쓸 거푸집을 구리로 만드실 것이고, 그 구리 거푸집도 주조해서 만든다는 말씀이지요?"

"그렇네."

"하지만 지금 구리를 아끼려고 납 활자를 만들고 있던 것이지 않습니까?"

"주조가 끝나면 부수는 모래 거푸집과 달리, 구리로 거푸집을 만들면 하나만 만들어도 활자를 계속 주조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장기적으로 보면 훨씬 이득일세."

"그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쇠를 주조하거나 연철을 두들겨서 활자 거푸집처럼 섬세한 것을 만들기는 어렵네. 원본 활자를 만들던 기술을 써서 밀랍으로 세밀하게 주조해서 만드는 게 제일 좋겠지."

이해한 듯 끄덕이는 장영실 옆에서 이천이 물었다.

"구리로 된 거푸집이라…….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야 할지 짐작이 잘 가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한 게 있소."

양녕은 그렇게 말하고는 빈 종이 하나를 펼쳐놓고 깃털 붓을 들어 무언가를 쓱쓱 그려 냈다. 그 그림을 유심히 보던 이천이 말했다.

"글자가 반대로 새겨져 있는 걸 보니 이게 아래쪽 거푸집이겠군요. 그런데 글자가 하나만 있는 것은 다 그리기에는 너무 손이 많이 가니 빠른 설명을 위해 나머지는 생략하신 겁니까?"

"아니오. 이게 다 그린 것이오."

"활자를 하나씩 주조하신단 말씀입니까?"

놀란 이천의 말에 양녕이 대답했다.

"구리 거푸집이면 오히려 여러 활자를 한 번에 주조하는 게 어려울 것이오. 금속이란 본디 뜨거워지면 그 크기가 불어나는 법인데, 구리 거푸집으로 한 번에 여러 활자를 주조하려다가 위아래 거푸집이 다르게 불어나 어긋나기라도 하면 활자를 전부 망치지 않겠소?"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하긴, 납은 쇠나 구리와 달리 녹이기 쉬우니, 굳이 한 번에 강한 화력으로 녹여서 부을 필요도 없겠습니다. 거푸집을 작게 만든 다음 장인들이 화로를 하나씩 옆에 놓고 납을 녹여가며 앉은 자리에서 계속 주조해서 만든다면 오히려 생산성도 더 좋겠군요."

"바로 그것이오."

"그럼 아래쪽 거푸집에 녹인 납이 흘러 들어갈 길이 없으니, 그건 위쪽에 만드시려나 봅니다."

"위쪽 거푸집에 납이 흘러 들어갈 길이라……. 어떻게 보면 그렇겠구려."

또 알쏭달쏭한 말을 던진 양녕은 아래쪽 거푸집 그림 옆에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속이 빈 두툼한 사각기둥의 왼쪽 아래와 오른쪽 위를 잘라 분리해서, ㄱ자와 ㄴ자 모양의 기둥 두 개로 만든 것처럼 생긴 그림이었다.

"이게 위쪽 거푸집이오."

다들 대체 이게 어떻게 거푸집이 된다는 걸까 하는 표정으로 종이를 들여다보는데, 이천이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둘을 합쳐 속이 빈 사각기둥처럼 만들어 아래쪽 거푸집 위에 올려놓고, 빈 사각기둥 부분에 녹인 납을 붓는 것이로군요."

"정답이오. 위쪽 거푸집 자체가 곧 녹인 납이 흘러 들어가는 길이 되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 녹인 납이 가느다란 길을 지나가다가 굳어버리는 일도 걱정할 것 없소."

"게다가 글자가 새겨진 아래쪽 거푸집만 새로 만들면 위쪽 거푸집은 같은 걸 계속 쓸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긴 거푸집으로 주조하면 활자가 꼭 도장처럼 뒤가 길게 나올 테니 그걸 잘라내는 과정이 필요하겠습니다."

"활자 규격을 맞추기 위해서 조금 잘라내고 다듬기는 할 것이지만, 도장처럼 뒤가 긴 것 자체는 그대로 둘 것이오. 저번에 진양이 납 활자를 도장에 비유했던 것을 듣고 떠올린 것이지."

양녕은 갑자기 칭찬을 받아 표정이 밝아진 이유에게 슬쩍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이 거푸집 위쪽은 그대로 두고 아래쪽만 바꿔가며 활자를 만든다면, 모든 활자가 작은 사각기둥 모양 도장처럼 생겼고 규격도 똑같을 것이오. 그렇다면 조판할 때 이전처럼 나무 틀에 밀랍이나 대나무 조각을 써서 위치를 잡아가며 고정할 필요 없이, 일렬로 나무 틀에 놓고 죔쇠 같은 것으로 눌러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소. 활자 하나에 들어가는 재료야 늘어나겠지만, 어차피 값이 싼 납이지 않소."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갑인자의 나무 틀과 호환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 틀만 아니라 몇몇 조판 도구들도 아예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고 말입니다."

이천의 걱정스러운 말에 양녕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알고 있소. 그리고 괜찮소. 이 새로운 활자는 그런 도구들을 새로 만드는 데 드는 비용과 수고 정도는 상쇄하고도 남는 성능을 보일 것이오."

양녕의 자신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만들려는 것은 원래 역사에서 이후에 나타났던 구텐베르크 활자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구텐베르크 활자는 강철 막대 끝에 활자를 새긴 패트릭스라는 것을 구리판에 대고 강하게 찍어서 매트릭스, 즉 아래쪽 거푸집을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알파벳과 달리 획이 많고 복잡한 한자를 그 방법으로 만들려고 하면 패트릭스 끝에 새기는 것도 힘들고, 기껏 만들어서 찍어도 뭉개져서 찍힐 우려가 있다.'

그리고 문자의 차이 말고도 양녕이 고려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구텐베르크의 가업은 화폐 주조였다. 금이나 은 조각을 강철 틀로 강하게 찍어 화폐를 만들던 기술의 기반이 있으니 그것을 쓴 것이지. 반대로 조선에는 활자를 주조해서 만드는 기술의 기반이 있으니, 거푸집도 주조해서 만드는 게 더 잘 될 것이다.'

양녕이 생각하는 동안 그림을 이리저리 살피며 생각하던 이천이 말했다.

"이 방식을 쓴다면 납 활자가 쉽게 무뎌지더라도 금방 새 활자를 만들 수 있겠습니다. 또 조판하다가 활자 개수가 부족할 때에도 바로 새롭게 만들 수 있지요. 당장 쓰지 않을 한자라도 일단 거푸집을 만들어서 보관해두고 필요할 때 만들어서 쓰면 되고 말입니다."

이천을 제외한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양녕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소. 그럼 어디 바로 이 방식을 시도해 봅시다."

* * *

1435년 4월 중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주자소.

양녕은 구텐베르크 활자를 기반으로 기술을 개발 중이었지만 압착기를 이용한 인쇄기는 제작은커녕 설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나무를 갈아 만드는 서양의 종이는 단단하고 뻣뻣한 탓에 활판에 힘껏 눌러야 글씨가 찍히지만, 동양의 닥종이는 유연해서 활판 위에 올려놓고 말총 뭉치로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찍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인쇄기를 만들 기술은 충분하지만 만들 필요 자체가 없던 것이다.

'인쇄기는 서양의 조건에 맞춰서 생산성을 높였기 때문에 혁신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해도 그냥 탁자에 한 명씩 자리 잡고 앉아서 찍어낼 수 있는 기존의 조선식 방식보다, 인쇄기에 활자를 물리고 손잡이를 힘껏 내리눌러서 찍어내는 구텐베르크의 방식이 더 생산성이 좋을 리가 없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주자소에 등청한 양녕은 이천에게 질문을 던졌다.

"요 며칠 심요도 일로 바빠서 못 왔었는데, 기술 개발은 잘 되어가고 있소?"

"예. 시험 삼아서 논어를 인쇄하기 시작했습니다. 100부를 찍어 보고 기존의 구리 활자와 생산성을 비교해보려 하는데, 이미 생산성이 더 낫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고 몇 배 더 좋은지만 확인하면 될 것 같습니다."

"벌써 그 정도란 말이오? 납 활자가 무른 탓에 생산성 비교는 좀 더 걸릴 거라 생각하고 있었소."

"납 활자가 물러서 주석을 좀 섞었더니 구리 활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전보다는 훨씬 단단해졌습니다. 구리로 활자를 만들 때 섞으려고 비축해 두었던 주석을 가져다 쓴 것이라 추가로 지출도 없었습니다."

납에 안티몬과 주석을 섞은 합금이 제일 납 활자에 적합했지만, 안티몬을 구하기가 어려운 조선의 상황에서는 주석 합금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오. 그래도 혹시 주석이 더 필요하면 말씀하시오. 내가 호조와 척동상단에 얘기해서 오우치 가문을 통해 일본산 주석을 더 사 오게 하겠소."

"감사합니다, 대군."

재료의 문제를 제외하면, 한자의 글자 수가 알파벳보다 많은 것도 그리 큰 걸림돌은 아니었다. 구텐베르크도 필기체를 그대로 구현해 인쇄하려고 한 탓에 활자의 종류가 200개를 넘었다. 한자가 총 몇 만 자가 된다고 하지만 자주 쓰이는 한자는 한정되어있고, 지금 인쇄 중인 논어도 1,500자 안에서 전부 쓸 수 있었다.

'여러 알파벳이 모여 한 단어를 이루는 데다가, 한 단어 안에서도 필기체에 따라 같은 알파벳의 다른 모양을 골라서 조판하고, 인쇄한 다음 다시 분류해서 보관하는 수고를 생각해 보면 압축률이 좋은 한자가 그리 뒤처지는 것도 아니겠지.'

자주 쓰이는 단어를 아예 한 묶음으로 만드는 것도 알파벳만이 아니라 한자 활자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단어가 좌우로 길게 나오는 알파벳과 달리 한자는 무조건 사각형 안에 들어가니, 단어가 줄에 걸쳐진 탓에 단어 묶음을 쓰지 못하고 새로 조판해야 하는 일도 얼마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자 활자 자체의 단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머지않아서 해결되겠지.'

이향과 이유가 둘 다 최근에 이도의 일을 도왔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그 내용은 말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양녕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참, 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원래는 자주 쓰이지 않는 글자나 벽자(흔히 쓰이지 않는 희한한 글자)는 거푸집만 만들어서 보관해두고 필요할 때 주조해서 쓰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거푸집 하나만 가지고도 활자를 빠르고 많이 주조할 수 있으니, 자주 쓰이는 글자의 거푸집을 여럿 만드는 대신 그렇게 하기로 했었지."

"예. 그런데 글자를 이루는 각 부분을 별도의 활자로 만들어두었다가, 자주 쓰이지 않는 글자나 벽자가 필요할 때 그 활자들을 조합해 만들어서 찍으면 굳이 거푸집을 일일이 만들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활자를 조합해서 글자를 만든다라. 진양이 제안한 것이겠군."

그 말에 이천이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피식 웃은 양녕은 적당히 둘러대며 말했다.

"서예에 능한 아이이니 그럴 것 같았소. 그나저나 좋은 생각이구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진행해 두면 좋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자주 안 쓰이는 글자 가운데 어지간한 건 거푸집 만들 필요 없이 조합해서 만들면 되겠지만, 조합해서 못 만들 정도로 모양까지 특이한 벽자들은 오히려 거푸집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것 없소. 그런 글자가 한 책 안에 수십 번 나올 것도 아니지 않소. 그 글자가 들어갈 부분을 아예 비우고 조판해서 인쇄한 다음 손으로 쓰거나, 너무 많다면 나무를 깎아 도장처럼 만들어서 찍으면 그만이오."

"하기야 지방 관청이나 민간에서 목판으로 인쇄할 때에도 흐리게 찍힌 부분은 가필해서 깨끗하게 만들곤 하지요. 그러면 되겠군요."

"그렇소. 그리고 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쓰일 때는 거푸집을 만들면 그만이오. 그러니 지금은 활자를 조합해서 글자를 만드는 기술에 집중해도 될 것이오."

양녕의 마지막 말에는 어딘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천은 그 의미심장함조차 읽어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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