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13화
213화
1435년 4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주자소.
주자소 앞마당에서는 활자 제작이 진행 중이었다.
"활자 만드는 과정이 이런 것이었군요."
눈을 빛내며 활자 제작 현장을 보고 있던 진양대군 이유의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양녕이 물었다.
"저번 활자 제작에도 참여했던 것 아니냐? 이번에 처음 보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처음 보는 것이 맞습니다. 저번에는 다른 일이 있어서 모자란 글자를 써서 주기만 하고, 나중에 다 만들어진 활자와 그것으로 찍어 낸 종이만 봤습니다."
"무언가 바쁜 일이 있었느냐?"
"예. 아바마마께서 도와달라 하시는 일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 말에 양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거푸집 만드는 것부터 모든 과정을 오늘 처음 보는 것이겠구나."
"예, 하나하나 다 신기합니다."
양녕이 미소 지으며 거푸집 만드는 장인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정 자체는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야. 우선 저렇게 나무로 된 아래 틀을 만들고, 그 안에 적당하게 습기를 머금은 고운 모래를 빈틈없이 꽉 채우고 위를 깎아 평평하게 만들지."
"습기는 어느 정도로 머금어야 합니까?"
"무엇을 만들지에 따라 다르고 모래에 따라서도 다르단다. 그래서 거푸집 만드는 것은 장인의 숙련도가 아주 중요해. 그렇게 아래 틀을 다 만들면 원본 활자를 박아넣는다. 원본 활자는 네가 쓴 글씨를 밀랍에 새겨 활자 모양을 만든 다음, 그것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주조한 것이야. 밀랍으로 주조한 것이라 아주 정밀하지."
"아까 장인들이 모래 위에 박아넣던 게 그거로군요."
"그래. 그렇게 활자를 다 박아넣고 다시 위를 평평하게 만든 다음, 아래 틀의 모래가 위 틀의 모래와 달라붙지 않게 마른 모래를 뿌리지. 그다음 나무로 된 위 틀을 올리고, 위 틀에도 습기를 머금은 모래를 채우고 평평하게 다듬은 다음 위 틀을 분리해 낸다."
마침 장인들이 위 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는 것을 본 이유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거꾸로 담겨있는데도 위 틀 모래가 안 쏟아지는 것이 신기합니다. 습기를 머금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그렇지. 이제 아래 틀에서 활자를 조심스럽게 뽑아내고, 녹은 납이 주입구에서 활자 부분까지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가늘게 길을 파내고, 다시 위 틀을 올려 어긋나지 않게 고정하면 완성이야."
설명을 마친 양녕과 이유는 묵묵히 작업 현장을 지켜보았다.
장인들은 완성된 거푸집의 위아래 틀을 고정한 다음 조심스럽게 옆으로 세워 주입구가 위로 오게 했다. 이어서 다른 장인이 녹인 납이 담긴 도가니를 가져와 주입구에 붓자 사방으로 녹인 납 방울이 튀며 연기가 솟았다.
"잘 되면 좋겠습니다."
녹인 납을 붓고 제법 시간이 지나자 장인들이 다시 거푸집을 눕히고 위 틀을 들어 올리자, 녹인 납의 열에 수분이 날아간 모래들이 쏟아져 내렸다. 장인들은 쏟아진 모래를 걷어내고는, 아래 틀에서 주조된 활자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이천과 장영실이 장인들에게 다가가 같이 살펴보더니, 주조된 활자를 통째로 받아 들고서는 양녕과 이유에게 다가왔다.
"주조 자체는 성공적으로 잘 되었습니다. 모래를 다 털어 내고 다듬어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일단 지금 상태에서는 기포도 안 보입니다."
이천의 말을 들으며 주조된 활자를 보던 이유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주조된 활자의 모양이 꼭 나뭇가지에 잎 대신 활자가 달린 것 같습니다."
"그래. 활자가 아니라 동전을 주조하면 동전의 모양이 둥근 잎을 닮은 탓에 정말로 나뭇가지처럼 보이지. 그래서 나뭇잎 동전, 엽전이라고 하는 것이란다."
"아! 그래서 엽전이로군요. 엽전이라는 말을 처음 접한 이래로 대체 동전의 어디가 나뭇잎을 닮은 것인가 항상 궁금했는데, 오늘 이렇게 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활자를 가지에서 떼어 내야겠군요?"
이유의 질문에 이천이 대답했다.
"예. 가지에서 떼어 낸 다음 테두리와 글자 면을 다듬으면 완성입니다."
"그렇군. 내 글씨를 써서 만든 활자야 저번에도 봤지만, 이렇게 만드는 과정까지 봤더니 이번에는 더욱 기대되는구려. 하하하!"
신난 표정으로 구경하는 이유와는 달리 이천과 장영실의 표정은 어딘가 어두웠지만, 양녕은 괜히 더 물어보지는 않기로 했다.
* * *
며칠 뒤.
주자소.
활자의 완성에 이어 인쇄까지 끝나고, 이번 활자 업무를 맡은 네 사람이 다시 주자소에 모였다.
"인쇄는 잘 되었소?"
"예. 이것이 시험 삼아 찍어 본 논어 1권 앞부분입니다."
양녕의 말에 이천이 펼친 종이를 본 이유가 감탄하며 말했다.
"글씨가 정말 깨끗하게 나왔습니다. 제가 보더라도 제가 직접 쓴 것인지 활자로 찍어낸 것인지 헷갈릴 정도군요. 그런데 어째 부사께서는 표정이 어두워 보이십니다?"
이유의 말에 양녕도 이천을 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오?"
"예. 지금 보여드린 것은 활자를 만들어 조판한 다음 맨 처음으로 찍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판한 것으로 여러 장을 찍어 낸 다음 가장 마지막으로 찍어 낸 것이 이겁니다."
새롭게 이천이 펼친 종이를 본 이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맨 처음 찍은 것하고 심각하게 차이가 나는군요. 글자 테두리도 많이 흐려지거나 번져 있고, 가느다란 획은 흐려지다 못해 끊어지거나 아예 안 찍힌 것도 있습니다. 제가 글자를 쓴 사람이라서 민감하게 눈치채는 정도의 변형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이건 설마……."
"아마 대군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이게 한 번도 인쇄에 쓰지 않은 납 활자고, 이게 방금 이 종이를 찍는 데 썼던 납 활자입니다."
이천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두 활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새 활자의 테두리는 날카로워 보일 정도로 각이 서있는 데 반해, 쓰던 활자의 테두리는 모서리가 거의 죽어있었다.
"납이 무르다고는 하지만 쇠붙이입니다. 그것도 무언가를 두들기는 데에 쓴 것도 아니고 먹을 묻혀 종이에 찍어 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무뎌진단 말입니까?"
이유의 물음에 이천이 대답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인쇄 과정은 조판한 다음 먹물을 바르고, 종이를 올린 다음 말총 뭉치로 문지르는 것뿐이니 크게 힘이 가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글자 테두리는 정교하고 세밀한 부분입니다. 무른 납으로 만든 만큼 그렇게 약한 힘이라도 계속 쌓이다 보면 모서리가 뭉개질 것이고, 작은 글자인 만큼 티가 많이 나게 되지요."
"알 것 같소. 자단목이나 상아를 도장 재료의 제일로 치는 것은 그 결이 치밀해서 정밀하게 새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단해서 오래 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그런데 만일 납으로 도장을 만든다면 몇 번 찍으면 금방 모양이 변해 버리고 말 것이오."
"맞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재료로 납을 쓴 것은 구리보다 값이 싸고 녹이기도 쉬워서지 않소? 납 활자가 쉽게 망가진다고 하지만 그만큼 새로 다시 만들어서 찍으면 괜찮을 것도 같소만."
이천이 심란한 표정으로 이유에게 말했다.
"활자가 망가지는 것은 그렇게 하면 해결됩니다. 하지만 그 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외적인 문제?"
"며칠 전 대군께서 보셨던 활자 만드는 과정, 즉 고운 모래를 틀에 채워 다지고 활자를 박아넣고 길을 내고 납을 녹여 붓는 것은 재료만 달라졌을 뿐, 구리 활자를 만들 때 쓰던 제조법 그대로입니다. 결국 재룟값과 연룟값만 조금 아꼈을 뿐이지, 들어가는 공력은 별 차이가 없지요."
장영실도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납 활자가 무뎌질 때마다 새로 만들게 되면 그때마다 인력과 거푸집 재료, 연료가 필요합니다. 구리 활자로는 한 번에 찍어낼 수 있는 양을 납 활자로는 여러 번 새로 주조해서 찍어야 한다면, 오히려 구리 활자로 찍는 것보다도 더 많은 예산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화를 듣던 양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생산성을 좋게 하려고 납으로 활자를 만들려 한 것인데 활자를 만드는 것 자체만 쉬워졌을 뿐이고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구리 활자보다도 생산성이 못하게 되는구려. 왜 계속 활자를 구리로 만들어왔는지 알 것 같소."
'역시 이런 문제가 있어서 원래 역사에서도 다시 구리 활자로 돌아간 것이겠군. 다행히 지금은 대조군을 두고 실험을 해 본 덕에 큰 예산이 들기 전에 문제점을 빨리 찾아낼 수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두 활자를 손에 들고 번갈아 가며 유심히 살피던 이유가 이천에게 말했다.
"섬세한 부분은 심하게 상했지만, 획이 두꺼운 부분은 생각보다 멀쩡하오. 그러면 다른 글자는 구리 활자를 쓰되, 획이 두꺼운 글자들은 납 활자를 쓰면 어떻겠소?"
"획이 두꺼워 오래 쓸 수 있으니 수시로 새로 만들지는 않아도 되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활자를 만들 때 그 글자들만큼의 예산을 조금 아낄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이점이 없습니다."
"하긴, 세상에 획 두꺼운 글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든 글자의 획을 두껍게 할 수도 없지."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소."
양녕이 갑자기 꺼낸 그 말에 이천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엇입니까? 납 활자를 단단하게 만드는 묘안이 떠오르신 겁니까?"
"그건 아니오. 무른 것은 납의 본성이지 않소. 물론 주석이나 다른 금속을 섞어서 조금 단단하게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본성까지 바꿀 수는 없소."
"그러면 어떤 방법입니까?"
"납 활자의 문제점은 오래 쓰기에는 무르다는 것과 매번 만들기에는 공력이 많이 들어 오히려 구리 활자보다 손해가 난다는 것 두 가지지 않소. 그런데 무른 성질을 바꿀 수 없다면, 매번 만들어도 손해가 나지 않을 정도로 공력이 적게 들게 만들면 되지 않겠소?"
유심히 듣는 이천을 향해 양녕이 말을 이었다.
"지금 활자를 만드는 방법에서 가장 공력이 많이 드는 것은 거푸집 제작이오. 힘들여서 만들어도 완성된 활자를 꺼내면서 부서지는 탓에 매번 새로 만들어야 하니, 공력은 물론이고 시간도 많이 들지 않소."
"그렇습니다. 혹시 그러면 여러 번 쓸 수 있는 거푸집을 만들려 하시는 겁니까?"
"맞소. 그렇다면 공력을 녹여서 붓는 것만 들 것 아니오."
"반복해서 쓰는 거푸집이 이미 있기는 합니다. 광물을 제련한 다음 운반이나 판매하기 좋게 덩어리로 만들 때 쓰는, 진흙을 반죽해 구워 만든 거푸집이 그것이지요. 그런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오. 진흙을 반죽해 구우면 그 과정에서 크기가 줄어들고 모양도 조금씩 변하오. 그냥 한 덩어리로 뭉쳐지기만 하면 그만인 광물용 거푸집으로는 괜찮지만, 활자처럼 세밀한 것을 만드는 거푸집으로는 부적합하오."
"그렇다면 어떤 재료를 쓰실 겁니까?"
"구리를 쓸 것이오."
구리를 아끼려고 납 활자를 만드는데, 그 납 활자를 만드는 거푸집을 구리로 만든다는 말에 당황한 이천이었지만, 침착하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어…… 그러면 그 구리 거푸집을 만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거푸집을 만들어 주조할 것이오."
선문답 같은 그 말에 이천뿐만 아니라 장영실과 이유도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잃고 멍하니 있는 것을 본 양녕이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