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12화
212화
허조가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당장은 태황태후도 있고, 양영, 양사기, 양부 같은 중신들도 많이 있으니 괜찮겠지요. 하지만 그들도 이미 나이가 많으니 언제까지고 어린 황제를 보좌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허조에 이어 맹사성도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게다가 권신이 생겨나면 그 권신의 파벌에 속한 이들이 권세를 빌어 전횡을 부리게 되는 것이 큰 문제인데, 왕진은 관리도 아니고 환관이지 않습니까. 그 파벌에 속하는 이들 역시 대부분이 환관일 것인데, 왕진이 권력을 손에 넣는다면 환관들이 권세를 빌어 전횡을 부릴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뜩이나 명나라 환관들이 조선에 사신으로 올 때면 온갖 문제를 일으켰는데, 거기에 권력이 또 더해진다면 문제를 더 일으키면 일으켰지 덜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정말로 왕진이 권력을 잡게 될지, 아니면 그저 환관으로서 태자의 스승을 지낸 자라는 특이한 경력만을 갖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개 환관이 태자의 스승이 되고, 권력을 손에 넣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된 것만으로도 명나라가 이미 기울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양녕의 말에 황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대군의 말씀이 맞습니다. 태자의 스승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니 부황인 선덕제가 환관인 왕진을 직접 태자의 스승으로 임명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흔히들 삼양이라 묶어 부르는 세 명신 양영, 양사기, 양부 모두 늦어도 영락제 때부터는 명나라를 이끌어온 이들인데도 그것을 막지 못한 것입니다. 설령 삼양은 나이가 들어 판단이 흐려진 탓이라고 쳐도, 명나라 조정에 신하가 그 셋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대소신료 모두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둔 것이지요. 오늘 이 명나라의 위기를 초래한 것은 황제부터 중신, 말단 신하에 이르는 모든 이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중신들의 말을 듣던 이도가 옥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세워지고 백 년이 지나니까 급격하게 휘청거리는 것을 보니, 역시 명나라도 중국인들의 왕조가 맞는가 보오. 물론 명나라가 한나라처럼 무너지고 다시 일어날지, 당나라처럼 조각날지, 송나라처럼 쇠약해질지는 알 수 없소. 어쩌면 그 세 나라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말을 하던 이도가 씨익 웃었다.
"명나라가 국초의 활력을 잃은 지금이, 반대로 조선에는 큰 기회 아니겠소?"
신하들 모두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좋소. 내 이전부터도 조금씩 진행하고는 있었으나, 이제 하늘이 기회를 내리셨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하고자 하는 일들이 있소. 첫째는 조선에 맞는 역법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오."
이도의 말에 중신들의 눈에 기대감과 고양감이 가득 차올랐다. 지금 조선이 쓰는 역법은 명나라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쓰는 탓에 조선의 절기와 맞지 않아서 바꿀 필요가 있기도 했지만, 그 이상 가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하늘을 관측해 역법을 만들어 반포한다는 것은, 천자로서 하늘의 뜻을 받아 땅을 통치한다는 상징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땅의 시간을 규정하는 연호를 제정하는 것은 천자의 특권이었다.
원래 역사의 조선이 천문대를 숨겨 만들거나, 독자적인 역법을 쓰면서도 명나라에 들키지 않게 조심했던 이유기도 했다.
"둘째는 사서를 편찬하는 것이오. 전조 고려만이 아니라, 삼한 전체의 역사를 다룬 사서를 말이오."
그리고 그렇게 천자의 상징인 고유의 역법을 만들고자 하면서 편찬하는 사서가 평범한 것일 리는 없었기에, 중신들은 더욱 기대감에 차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어명을 받들겠나이다."
* * *
1435년 4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주자소.
경복궁으로 옮겨 설치된 활자 제조 관청인 주자소에는 양녕과 이천, 장영실이 앉아 있었다.
"주상전하께서 특별히 지시를 내리셔서 역법 제정과 사서 편찬이 시작된다고 하니 바쁜 일이 많으실 것 같은데, 주자소 일을 먼저 도와주러 오셔도 괜찮으십니까?"
이천의 질문에 양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소. 어차피 그 둘 다 바로 시작하기는 어렵소.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이 심요도를 재건하는 일인 탓에, 그 두 일을 맡을 만한 집현전 관원들도 심요도에 관한 업무만 붙잡고 있을 정도요. 심요도가 어느 정도 안정된 이후에라야 역법과 사서의 일을 시작할 것이니, 지금은 여유가 있소."
양녕의 말대로 동북면에서 거솔도의 일을 오래 맡아 처리한 경험이 있는 최만리는 개척도감에서 열심히 심요도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고, 계산이 빠르고 사서에 통달해 역법과 사서 둘 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인지 역시 사섬시와 상평시를 오가며 세금 제도 관리와 전국 물가 유지를 돕느라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입니다. 아니, 다행이라고 하면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군요."
"괜찮소. 활자를 만드는 일은 일찍이 아바마마께서 반대를 이기고 추진하셔서 성과를 냈던 일이고, 활자 만드는 일을 하는 주자소도 이번에 집현전처럼 경복궁 안으로 옮겨질 정도로 중요성도 높아지고 있소. 그런 중대사를 도울 여유가 생겼으니 다행인 일이지."
양녕은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좋소. 그러면 일을 돕기 전에 지금 주자소에서 하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소."
"예. 우선 조선이 세워지고 태종대왕께서 지시하셔서 처음으로 만든 활자가 계미자입니다. 그런데 이 계미자는 고정방식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활자 모양이 불규칙해서 밀랍을 녹여 부어서 나무 틀에 고정했는데, 밀랍 양에 따라 활자 높낮이가 들쭉날쭉해져서 찍기가 힘들었습니다."
"밀랍은 무른 것이니 제대로 고정도 되지 않았을 것 같소."
"맞습니다. 활자를 제대로 잡아 주지 못해서 몇 번 찍다 보면 활자가 계속 틀어지고 움직이는 문제가 있었지요. 그래서 그다음에 만든 경자자에서는 활자 모양을 최대한 네모반듯하게 만들고, 나무 틀에 넣은 다음 빈틈을 대나무 조각으로 막아서 움직이지 않게 했습니다. 덕분에 한 번 조판해서 찍어 내는 양이 기존의 열 배나 늘었지요. 대신 글자가 너무 자잘해서 보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어서 크기를 키워 만든 것이 작년에 만든 갑인자입니다."
"그러면 성공을 거둔 것이지 않소. 또 활자를 만들려는 이유가 있는 것이오?"
이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다행히 활자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새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집현전에서는 계속해서 연구 성과를 책으로 내고 있고, 백성들을 위한 농서나 의서도 많이 찍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차 역법이 제정되고 사서가 편찬되면 그것들도 책으로 찍어야 하니, 지금 같은 속도로 활자를 만들어서는 그 수요를 다 따라잡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만들 활자는 생산성을 더 늘리고자 합니다."
"그 활자를 만드는 데에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이로군. 혹시 이미 생각해 둔 방법이 있소?"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활자는 구리로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납을 재료로 만들어 보려 합니다."
"납으로 말이오?"
"예. 구리는 심요도에 배치될 대포를 만드는 데에도 들어가고, 돈을 만드는 데에도 들어가고, 그 밖의 여러 기물을 만드는 데에도 들어갑니다. 조총 만드는 재료가 구리에서 철로 바뀐 정도로는 가격이 내려가지도 않을뿐더러, 값이 내렸다고 해서 전부 활자를 만드는 데에 가져다 쓸 수도 없지요."
"그래서 값이 더 싼 납을 쓰려는 것이겠군. 납은 구리보다 낮은 온도에서 녹으니 연료도 아낄 수 있고 작업하기도 편하겠소. 좋은 생각이구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납이 구리보다 더 흔하고 녹이기도 쉽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금속으로 활자를 처음 만든 고려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구리 대신 납으로 활자를 만들어 쓰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천의 말을 듣던 양녕이 끄덕였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때쯤에 만들어진 병진자는 납을 재료로 쓴 것이었다. 하지만 병진자는 얼마 쓰이지 않았고, 조선에서는 다시 구리로 활자를 만들었지. 칠주도를 얻은 지금의 조선도 아니고, 구리가 항상 부족했던 원래 역사의 조선에서 납 활자를 포기하고 구리 활자로 돌아갈 정도라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니, 미리 해결하는 것은 힘들겠군.'
"그럴 수도 있겠소.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한들 어차피 직접 납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찍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지 않소. 조금 전 말한 것처럼 납은 녹이기도 쉽고 다루기도 편하니, 부담 갖지 말고 일단 납으로 활자를 만들어 봅시다."
"예. 그래야겠습니다."
"그럼 일단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갑인자를 그대로 본으로 쓰고, 재료만 납으로 바꿔서 찍어 보는 게 어떻겠소?"
양녕의 질문에 이번에는 제작 실무를 맡은 장영실이 대답했다.
"예. 새 활자도 갑인자와 같은 규격으로 만들면, 갑인자로 책을 찍을 때 쓰던 나무 틀과 대나무 조각을 그대로 쓸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만 활자의 규격은 그렇게 하더라도, 글자에 관해서는 주상전하께서 따로 지시하신 것이 있으니 그것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주상께서 말인가? 무슨 지시인가?"
"갑인자를 만들 때는 궁에 있던 책들 가운데서 잘 쓴 글자를 가려 뽑아서 만들고, 잘 쓴 글자가 없는 글자만 새로 써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쓴 글자가 오히려 기존 책에서 가려 뽑은 글자보다도 더 반듯하고 좋았으니, 이번에는 아예 모든 글자를 새로 써서 만들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러면 갑인자 글자를 새로 썼던 사람이 이번에도 쓴다는 것인데, 그 말인즉슨……."
양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자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청년 하나가 들어왔다. 문 쪽을 돌아본 양녕과 눈이 마주친 청년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백부! 이미 와 계셨군요!"
청년의 미소를 본 양녕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 부분도 원래 역사의 병진자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가.'
"어서 오거라. 저번 갑인자에는 모자란 글자만 네가 새로 쓴 글씨를 썼지만, 이번에 만들 활자는 처음부터 전부 다 네가 쓴 글씨로 만들게 되었다는 말을 방금 들은 참이다. 네 글씨가 빼어난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으니, 벌써 기대가 되는구나."
양녕의 말에 청년의 둥글고 순한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네! 아바마마께서 제 글씨를 보시고는 백부만큼이나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해 주시면서, 특히 작은 글씨를 잘 쓰니 활자 만드는 일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백부께서도 제 글씨를 빼어나다 해 주시고, 기대된다고도 해 주시니 더욱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당당한 표정에 선량한 눈빛을 빛내며 해맑게 웃는 청년을 보며 양녕은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청년의 이름은 진양대군 이유. 원래 역사에서는 그 빼어난 글씨보다도 이후에 받게 되는 수양대군의 군호와 사후에 받은 세조의 묘호로 더 널리 알려진 찬탈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