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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11화 (211/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11화

211화

양녕은 물론이고 개척도감 관원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이향이 말했다.

"성을 더 늘리면 됩니다."

"성을 추가로 짓는단 말씀입니까?"

양녕의 되물음에 이향이 끄덕였다.

"어차피 무너진 상태인 심양성은 그대로 새로 쌓을 수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구조까지도 전체적으로 바꿔야 하니 무너진 부분만 새로 쌓을 수도 없지요. 결국 성벽 전체를 허물고 다시 쌓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러려면 그나마 쓸만한 벽돌들을 어딘가 모아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 짓는 성벽은 높이가 낮은 데다가 재료도 전과 달리 흙을 많이 쓸 것이니 벽돌이 많이 남지 않겠습니까? 그 벽돌들을 써서 심양성 근처에 새로운 설계를 사용한 작은 성들을 짓는 것이지요."

"그럼 일단 재료 걱정은 없겠군요. 성벽을 새로 쌓는 동안은 방어시설이 없어서 위험하니, 그동안 회경군과 인부들이 머무를 방어시설이 마침 필요했던 참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성들이 심양성을 새로 짓는 동안의 임시 주둔지만이 아니라, 심양성이 포위에 취약하다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해결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향은 탁자 위를 살피더니 심요도 일대의 지도를 가져와 넓게 펼치더니, 지도 위를 짚어 가며 말을 이었다.

"명나라에서 요동으로 오려면 산해관을 나와서 산과 바다 사이의 좁은 길을 지나고, 거기서 또 요하를 건너야 합니다. 그렇게 교통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요동을 유지하려 하니 힘이 잘 닿지 않는 문제가 있지요. 그래서 산해관에서 요하에 이르기까지는 산을 끼고 방어하고, 요하를 건넌 다음 북쪽으로 따라 올라가면서는 요하를 끼고 방어하고, 다시 요동평야 동쪽으로는 산을 끼고 방어하는 복잡한 방법을 써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나마도 요동평야 동쪽으로는 제대로 방어선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지요."

"예. 그렇게 명나라 상황에 맞췄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완성하지 못했고, 결국 실패하기까지 한 방어 전략을 조선이 그대로 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동궁께서는 다른 방어 전략을 써야 한다 생각하시는 게로군요."

"그렇습니다. 삼한의 상황에 맞고 실제로 성공하기도 했던 방어 전략을 쓰면 됩니다."

이향이 말하려는 것을 눈치챈 양녕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이로군요."

"예.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그 길이는 비사성에서 요동성을 지나 부여성에 이를 정도였지만, 중국의 장성처럼 하나로 쭉 이어지는 장벽이 아니었습니다. 드는 공력 대비 효과가 크지 않고 관리만 어려운 그런 장벽을 쌓는 대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쭉 이어진 여러 성을 세우고, 그 성들이 서로를 돕게 한 것이었지요."

"성을 포위하더라도 주변 성에서 구원을 오기가 쉬우니 제대로 포위를 유지하기가 어렵고, 어떻게 성 하나를 함락시켜 뚫고 들어가더라도 여전히 후방이 위험하고, 그 많은 성을 다 함락시킬 수도 없게 하는 전략이로군요. 당 태종도 고구려의 그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눈알만 잃고 돌아갔고, 다음에는 아예 황해를 건너서 방어선을 통째로 우회하려 들었지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명나라도 그 방어 전략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양녕은 이향이 펼친 지도 위를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명나라도 장벽을 쌓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요동 일대에는 장벽을 쌓는 대신 동궁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여러 요새를 지었습니다. 이름도 장성이 아니라 변장이라 칭했지요. 하지만 고구려의 방어선은 결국 뚫렸고, 명나라의 변장도 금나라에게 뚫리고 말았습니다."

"고구려의 방어선이 뚫리긴 했지만, 그건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권력 욕심에 눈이 멀어 천리장성을 이루는 땅과 성을 당나라에 들어다 바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른 탓이지, 방어 전략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명나라도 비슷합니다. 여러 요새를 짓고 서로 돕게 한다는 생각 자체는 좋았지만, 그렇게 연계되는 방어선을 유지하려면 고구려처럼 기병이 강해야 빠르게 도와주러 올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으니, 애초에 방어 전략이 제대로 시작조차 안 된 것과 다름이 없지요."

이향의 말에 양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하긴, 중국의 장성은 북방의 오랑캐들을 막는 데 쓸 수 있는 지형지물이 마땅히 없는 평지에서 흙을 다져 쌓아 올린 것이지요. 벽돌로 개축이라도 하지 않는 한 제대로 된 방어시설로는 쓸 수 없고, 그저 강물이나 작은 구릉처럼 이동을 방해하는 정도로만 쓸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쌓은 것이기도 하고요. 반면 지금 심요도는 앞에는 요하가 있고 그 뒤에는 산지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해자와 성벽을 갖춘 셈이니, 각루나 치 구실을 할 성과 요새 여럿을 지어 보강하면 되겠군요."

"예. 하지만 성과 요새가 늘어나면 보급도 많이 해야 한다는 점은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심요도 재건은 물자가 많이 드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건 괜찮습니다. 요동은 명나라에게는 가늘고 길게 뻗어 나간 땅인지라 방어선도 길어지고 보급선도 길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게는 국경 자체가 북쪽으로 올라간 것이니 방어선이 그리 많이 길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 명나라처럼 산동성에서 물자를 사올 수도 있고, 무순관 동쪽 지역에서 4윤작법으로 농사를 지어 자급도 가능할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동궁께서 말씀하신 전략이 좋은 것 같군요."

양녕의 호평에 이향이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성이나 요새를 많이 지을 필요도 없습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기준으로 볼 때 북쪽 끝인 부여성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긴 구간은 금나라의 영향권이라 애초에 조선의 손이 닿지 않습니다. 천리장성 남쪽 끝의 비사성이었던 금주위는 조선의 영토가 되었지만, 금나라가 그 남쪽까지 갈 일도 없을 것입니다. 기병으로 우회하거나 요하를 통해 수군을 보내 급습하는 것을 대비한다 하더라도 각각 요동 남쪽의 해주위와 바다에 접한 개주위를 보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요."

이향이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양녕은 물론이고 다른 관원들도 다른 이유가 더 있음은 알고 있었다. 명나라도 여진족이 말과 배에 두루 능한 것은 알고 있으니 개주위까지 보강하는 것은 뭐라 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남쪽까지 방어시설을 짓는다면 명나라를 적국으로 상정하고 방어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게 아니면 지을 필요가 없던 것이다.

"그러면 개주위, 해주위, 요동성, 심양성 사이사이에 작은 성과 요새를 짓고, 심양성 북쪽으로도 몇 개 지어서 보강하는 정도면 되겠군요. 천리장성이 아니라 오백리장성이 되겠습니다."

"예. 그래도 새로 지을 성과 요새 숫자가 제법 될 테니, 그 이름을 다 짓는 것도 일이겠습니다."

"그리 어려울 것 있겠습니까. 가까운 곳에 있지만 이제는 쓰이지 않는 옛 성터나, 근처에 있던 것은 맞지만 정확한 위치는 전해지지 않는 성의 이름을 계승하는 의미로 가져와서 쓰면 됩니다."

양녕의 말에 이향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개모성, 백암성, 건안성, 비사성 같은 고구려 성의 이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요동성도 오래전 요양성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삼한에서는 계속 요동성이라 불러왔고, 결국 심요도를 얻고 나서는 다시 요동성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지 않습니까. 비슷한 것이지요."

"중국인들에게 고구려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고구려 성의 이름을 따와서 성과 요새의 이름을 짓는다면 요동성의 이름을 되돌렸을 때하고는 다르게 명나라도 반발하거나 항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약간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하던 이향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삼한의 땅으로 돌아온 요동에 안시성의 이름을 이은 성이 다시 생긴다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

* * *

1435년 2월 중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1월 하순. 선덕제의 부고가 심요도 관찰사를 통해 조선 조정에 전해졌다. 1년 전부터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져 있던 선덕제였기에 크게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지만, 이도는 긴급하게 중신들을 모아 토의를 열었다. 새 황제의 즉위가 조선에도 영향을 준다는 기본적인 사실 이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행황제가 젊었으니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새롭게 황제로 즉위할 태자가 아직 아홉 살이라니 걱정부터 됩니다."

허조의 말에 옆에서 황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태황태후도 건재하고 중신들도 많이 있으니, 새 황제가 장성할 때까지 그들이 잘 보좌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보좌에는 한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윤봉에게 들은 것인데, 태자의 측근 중에 왕진이라는 환관이 있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양녕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실 왕진에 대한 것은 윤봉이 언뜻 지나가듯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고, 지금 말하려는 것은 원래 역사에 기반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때 들은 왕진의 행적이 원래 역사와 거의 같았으니 나머지도 비슷할 것이고, 어차피 윤봉이 사신으로 오면 나하고만 대화하는 일이 많았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때 들었을 거라 생각하겠지.'

"경서에 능한 자였는데,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다가 이대로는 관직에 나갈 희망이 없다 생각해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으로 황궁에 들어갔다 합니다. 다른 환관들과 달리 머리가 좋고 야심도 있어서 다른 환관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가르쳐 주거나 하면서 인기를 끌어 입지를 높였고, 결국에는 태자를 가르치는 자리에 올랐다 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도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환관이 태자의 스승이 되었단 말입니까?"

환관은 군주의 최측근인 탓에 그 권력을 이용해 전횡을 부릴 우려가 있다. 조선에서는 그것을 막기 위해 신입 환관 교육을 신입 관리에게 시켰다. 훗날 그 환관이 나이가 들고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들이 조정의 고관이 되어있으니 함부로 나설 수 없게 한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에서는 전횡을 방지한다며 아예 환관을 교육시키지 않아 버렸다. 그것이 돌고 돌아 환관이 태자의 스승이 되는 사태까지 만든 것이다.

"예. 자신의 야심과 학식을 이용해 태자와 금방 친해졌다 합니다. 태자가 환관인 왕진을 선생이라는 존칭으로 부를 정도라 하더군요."

중신들 사이에서 기가 막힌다는 듯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지금 조선의 세자 이향의 스승인 하연은 예문관 대제학이다. 그야말로 조선 전체에서 학문으로는 손에 꼽을 자리에 올랐다고 할 수 있는 이인 것이다.

그런데 명나라에서는 태자의 스승이 환관인 것도 모자라서 태자에게 선생이라 불린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이제 곧 황제가 환관에게 선생이라 부르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군요."

이도의 말에 중신들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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