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10화
210화
어두운 표정의 대표들을 둘러보며 양녕이 말했다.
"얼굴들을 보니 대강 다들 짐작은 한 모양이구나. 맞다. 심요도 북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조선 본토 백성들도 이주시키겠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 그래서 너희들도 이주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일부러 말을 끊어 대표들이 집중하게 만든 양녕이 이어 말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야. 대신 이주하려는 사람에게 여러 특혜를 주어서 자발적으로 가게 만들고자 한다. 우선 심요도 북부로 이주하는 사람에게는 거기 많이 남아 있는 빈집을 나눠 줄 것이고, 남아도는 농지도 나눠 주겠다. 땅은 비옥도를 하나하나 따져서 나눠 주기에는 시간이나 일손이 부족하니, 그냥 일괄적으로 여기서 경작하던 땅의 두 배 면적의 땅을 주마."
그 말에 대표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 농사짓는 땅이라 봤자 수확량은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주해 간 곳에서 또 척박한 땅을 받는다 하더라도 면적이 두 배라면 수확도 지금의 두 배가 되는 셈이었다.
게다가 이주해 간 이들이 자리를 잘 잡을 수 있게 비옥한 땅을 먼저 나누어 줄 것이 분명하니, 일찍 가는 사람들은 수확이 지금의 두 배보다도 훨씬 많아질 것이었다.
"그리고 오랑캐들과 가까운 땅이라 위험할까 걱정한다면 그럴 필요도 없다. 지금 개주위와 해주위 일대에 원래 살던 백성들이 여진족 놈들에게 끌려간 탓에 텅 비어 버렸으니, 그 두 곳부터 이주시켜 채우려고 한다. 너희도 알다시피 거기는 심양성은 물론이고 요동성보다도 남쪽이야. 그 두 성이 위험해지기 전에는 개주위와 해주위가 위험해질 일은 없다."
"그럼 이주해 가는 사람들은 언제 가도 상관없이 전부 다 지금 농사짓던 땅의 두 배를 받는 겁니까?"
질문한 사내와 다른 대표들의 눈빛에서 망설임과 욕심을 동시에 읽어낸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계속 두 배씩 주더라도 심요도 땅이 넓으니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옥한 땅은 나중에 가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고, 개주위와 해주위 일대가 다 차 버렸다면 더 북쪽으로 이주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야."
'이주를 고민하는 이들이 서두르게 만드는 건 이 정도면 되겠지. 이제 다음은 무조건 이주해야 하는 이들이 대상이다.'
"그리고 아까 말했다시피 여순구 일대는 전체를 뜯어고칠 것이니,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본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이주해야 한다. 대신 여기 여순구에서 노철산수도를 거쳐 산동성까지 가는 뱃길을 잘 아는 이들이나, 이 주변 해역에 훤한 이들은 따로 뽑아서 중요한 일을 맡기려고 한다."
그 말에 솔깃해진 청년 하나가 물었다.
"벼슬을 하게 되는 겁니까?"
"하하하! 벼슬은 아니야. 여순구와 산동성을 오가며 필요한 물자를 사 오게 하려는 상단이 있는데, 그 상단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관청은 아니라도 나라에서 관리하는 상단이니, 대우가 박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 말에 눈을 빛내는 여순구 대표를 슬쩍 본 다른 사내가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재주가 있으면 상단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드디어 원하는 반응과 질문이 나오자 양녕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이다. 심요도를 재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가진 이들이라면 상단만이 아니라 나라에서도 데려다 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다른 걱정 없이 재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땅을 더 많이 줄 것이다."
좌중에 퍼져가는 소리 없는 술렁임을 둘러보며 양녕이 말을 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선의 상단에서 일하거나 조선 조정의 지시를 받아 일하는 것이니 당연히 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말을 배워서 써야겠지. 이것은 재주가 있어서 뽑힌 이들만 해당하는 게 아니야. 너희 모두 이제 조선의 백성이니 늦건 빠르건 명나라의 복식과 말을 버리고 조선인이 되어야 한다."
"예, 물론입니다."
"그리고 조선 옷을 입고 조선말을 쓰는 사람은 곧 조선인이니, 과거에 응시하거나 군대에 들어갈 수 있다. 둘 다 잘만 하면 정말로 벼슬아치가 될 수 있는 길이지. 혹시 아느냐? 너희를 수탈하고 괴롭히고 무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여기 버리고 떠나간 이들에게, 조선의 높은 자리에 올라 갚아 줄 날이 올지?"
풍습과 말을 버리라는 이야기를 했는데도 대표들 사이에서 거부감을 내비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다들 의욕을 보이는 것을 보고, 이들이 정말로 자신들을 버린 명나라에 반감을 품었음을 확신한 양녕이 가장 중요한 얘기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만약 너희 가운데 심요도를 재건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선 전체에 크게 이롭게 쓰일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중요한 기밀을 아는 자가 있다면 조용히 조선의 관원들에게 말해라. 그런 이들은 바로 조선 본토로 가서 비옥한 땅을 받게 될 것이다."
'이들과 명나라 사이를 가르고, 먼저 이주하는 이와 나중에 이주하는 이 사이를 가르고, 기술이 있는 이와 없는 이를 가르고, 평범한 기술만 있는 이와 유용한 기술이 있는 이를 가른다. 그렇게 서로를 갈라놓아 조선에 더욱 빨리 동화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이이제이지.'
* * *
1435년 1월 하순 모일.
한성부. 개척도감.
진지한 표정으로 양손에 자와 깃털 붓을 들고, 탁자 위에 펼쳐놓은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던 양녕은 개척도감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환한 얼굴로 말했다.
"동궁! 어쩐 일이십니까?"
개척도감에 들어온 것은 조선의 세자, 원래 역사에서는 훗날 문종의 묘호를 받게 되는 이도의 장남 이향이었다. 이향은 보는 사람이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만드는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양녕에게 말했다.
"오늘 아바마마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다가 숙부께서 하시는 개척도감 일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잠시 들렀지요. 아, 다들 앉아서 하던 일들 마저 하시오. 이런, 제가 방해를 한 건 아닌가 모르겠군요."
다른 관원들이 주섬주섬 앉는 가운데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동궁께서 직접 일을 살피러 오신 것이 어찌 방해가 되겠습니까. 우선 앉으시지요."
양녕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이향이 탁자 위에 가득한 종이를 보며 말했다.
"무언가 엄청 중요한 일이 진행 중인 모양이군요."
"예. 심양성이 심요도 북부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성인데, 지난 원정에서 심각하게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다시 복구해야 하는데, 점석회를 쓰자니 명나라와 금나라와 너무 가까운 곳이라 기밀이 새어나갈 우려가 있는 데다가, 애초에 심양성은 내륙 깊은 곳이라 운반하기도 어렵습니다."
"일손이 부족하니 무너진 벽돌을 써서 다시 높게 쌓는 것도 어렵겠군요. 물론 높게 쌓아도 큰 이점이 없지만 말입니다. 높게 쌓은 성벽이 대포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바로 그 심양성이 보여 준 것 아닙니까."
"예. 금나라 놈들이 화포는 물론이고 화약 기술까지 손에 넣었으니, 이전처럼 성벽을 높게 쌓으면 놈들에게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낮지만 강한 성을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저번 심양성 전투에서 놈들이 성문 앞에 옹성 대신 흙더미를 쌓았던 것에 제법 고생을 해서 그걸 응용한 것이지요. 바로 이겁니다."
양녕은 종이 더미에서 종이 몇 개를 꺼내어 위에 올려놓았다. 성벽의 단면,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정면에서 본 모습 등의 설계도들이었다.
"위에서 본 모습이 꼭 꽃처럼 생겼군요."
"맞습니다. 활짝 핀 꽃을 닮았지요."
양녕이 설계 중인 성은 원래 역사에서는 위에서 본 모습이 별을 닮았다 해서 성형 요새라는 이름이 붙었던 구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별은 동그라미로 표현하지 각진 도형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니, 이향이 성의 설계도를 보고 별을 떠올리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동양인들이 성조기를 보고는 별이 아니라 꽃을 가득 그린 화사한 깃발이라 생각해서 미국을 꽃 깃발 쓰는 나라, 즉 화기국이라 불렀을 정도니, 동궁께서 이걸 꽃으로 생각하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군.'
"성의 모습이 아름답고 기세가 장엄하면 그것만으로도 적을 압도하는 힘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성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적을 압도할 수 있어 보이는군요."
흥미로운 표정으로 설계도들을 살피던 이향이 재밌는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성벽의 높이가 낮으니 적이 성벽을 노리고 쏘더라도 위로 넘어가 버리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성벽 뒤를 흙으로 두껍게 보강했으니 설령 성벽을 맞추더라도 무너지지 않겠지요. 성벽 앞에 해자를 두고 그 앞에 또 비스듬한 토벽을 외성처럼 둘렀으니, 애초에 성벽을 맞추려고 해도 이 토벽에 포탄이 박힐 뿐이겠지만 말입니다."
양녕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이향이 말했다.
"토벽이 비스듬하니 엄폐물로 쓰지도 못하고, 오히려 이 위에 올라오면 그대로 성벽 위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맞을 수밖에 없겠군요. 말을 타고 돌파하려 하더라도 해자 간격이 넓으니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화포와 화약, 병사들만 충분하다면 대포도, 보병도, 기병도 다 막을 수 있겠군요."
이향의 말이 이어지자 다른 관원들도 하던 일을 놓고 입을 떡 벌린 채 이향을 보고 있었다. 양녕과 자신들이 며칠에 걸쳐 고안하고 정리해서 만든 성의 구조를, 방금 설계도만 처음 본 이향이 순식간에 파악하고 있던 것이다.
"각루나 치가 화살촉처럼 생긴 것도 좋아 보입니다. 그냥 사각형으로 만들면 달라붙은 적을 위에서 쏠 수 없는 공간이 생기지만, 이렇게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있으면 어디에 달라붙더라도 다른 쪽 성벽에서 쏴서 쓸어버릴 수 있겠군요. 옹성도 각루처럼 생겼으니 그야말로 철옹……."
드디어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눈치챈 이향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신나서 떠들었군요. 허허허."
"아닙니다. 전부 다 정확한 내용이었습니다. 설계도만 보고 그걸 전부 파악하시다니, 동궁께서는 병가의 일에도 뛰어나시군요."
"과찬이십니다. 이번에는 운이 좋게 맞췄을 뿐입니다."
"너무 겸손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동궁께서 나라를 지키는 일에 관심을 두시고 또 배움의 깊이도 깊으시니 실로 나라의 홍복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성을 이렇게 짓는다면 높게 쌓는 공은 들지 않겠지만,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잘 설계하는 게 힘들 것 같군요."
"맞습니다. 사실 그것 말고도 좀 막막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향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엇입니까?"
"이 구조로 짓는다면 성 자체의 방어력은 괜찮을지 몰라도, 결국 평지에 지어져 있어서 만일 포위 당한다면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심양성은 이미 여진족이 포위로 한 번 함락시키고, 회경군과 정로군이 포위로 또 한 번 함락시켰으니 두 번에 걸쳐 확인된 문제점이지요. 이것은 성의 방어력을 올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그런 문제가 있군요."
양녕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이 생각하던 이향이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