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08화
208화
양녕의 말을 들은 한명회는 바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명나라는 지금까지 척동상단이, 아니 조선이 교역했던 이들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여진족들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게 많았습니다. 기후 때문에 목화는 키울 생각도 하지 못했고, 다른 기술도 많이 부족했지요. 덕분에 조선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팔고 말을 사 오는 거래가 오래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한명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양녕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일본은 기후도 따뜻하고 온갖 광물이 나는 땅입니다. 아직 여러 기술과 재배할 종자가 없는 탓에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 많을 뿐이지요. 그래서 연은분리법과 목화 종자가 넘어가지 않게 관리 중인 것이고 말입니다."
"맞네. 일본 땅의 일부였던 칠주도를 얻은 것만으로도 조선에 큰 이득이 되었을 정도니, 일본 본토에는 더 큰 잠재력이 있지."
"하지만 명나라는 다릅니다. 덥고 춥고, 습하고 건조한 기후가 모두 있으며, 인구도 많고 기술도 충분합니다. 조선이 아무리 기술의 힘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판다 한들 명나라를 이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후대에 영국이 기계로 찍어 낸 면직물이 청나라에서 인력으로 짠 면직물을 생산성과 가격에서 이기지 못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번 원정에서도 조선이 초석밭을 만들어 가며 꾸준히 생산한 화약의 양보다 조선의 요청에 명나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은을 받고 딱 한 번 팔아 준 화약의 양이 더 많았으니, 한명회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자네가 말한 대로일세. 이미 명나라에서도 생산되던 것이지만 기술의 힘으로 쉽게 만들 수 있게 된 것, 이를테면 철제품이나 면직물 같은 것을 팔려고 해 봤자 우리가 밀릴 수밖에 없네. 우리만 생산하던 발화통 같은 것을 팔 수도 없네. 명나라 장인들이 발화통을 사 가서 분해하고 구조를 알아낸 다음 자신들이 직접 만들기 시작하면, 오히려 조선의 원본보다 싸고 많이 만들어 팔 수 있을 것이야."
"발화통이면 차라리 괜찮은 정도입니다. 점석회처럼 집짓기에서 항구, 성벽 건축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한 쓰임을 가진 것을 팔다가는 무조건 기술을 빼내려 들 겁니다."
"그래. 점석회 기술이 명나라에 넘어간다면 그때는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격차가 생기겠지."
"그런데 어째서입니까?"
"어찌 조선에서 명나라에 팔 게 그런 것밖에 없겠나? 뜯어보더라도 만드는 법을 알 수 없는 것, 명나라에서 이미 충분히 나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것. 하지만 우리는 구할 방법이 있는 것. 그런 걸 팔면 되지 않는가."
양녕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던 한명회가 이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은이로군요."
"정답이네. 명나라에서는 금은이 모두 나긴 하지만 나라가 큰 탓에 전국에 돈으로 돌게 하기에는 그 양이 언제나 부족하네. 그래서 조선에도 계속 요구했던 것이고. 하지만 오우치 가문의 영지에는 큰 은광이 있어서 은이 많이 나오는 탓에, 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은보다도 면포가 귀하다 할 지경이네. 이번에 북원 원정에 쓸 군량과 화약을 사올 때도 그걸로 이익을 좀 보았지 않은가."
"어떻게 하시려는지 알겠습니다. 면포나 철을 오우치 가문에 팔고 대금은 은으로 받습니다. 은이 많이 나고 면포와 철은 귀한 곳이니, 조선이나 명에서 같은 물건을 파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은을 받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은을 다시 명나라에 팔면 명나라는 은이 급한 곳이니 제값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이익이 난다는 말씀이지요?"
양녕이 한명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싸게 사서 시세대로 파는 것이지. 게다가 명나라도 설마 은값이 그렇게 떨어질 정도로 은이 많이 나는 은광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 우리가 그 은을 얼마에 사 왔는지는 짐작조차 못 할 것이야."
"그래도 여전히 좀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전에 대군께서 조선 땅에서 금은이 많이 나지 않아서 조공품목으로 지정되면 백성들이 힘들어지니, 품목에서 제외하는 대신 수시로 조공으로 보내겠다고 하셔서 금은이 조공품목에서 빠졌지요?"
"그랬지."
"그리고 이번에 군량과 화약을 사올 때에도 명나라 눈에는 조선 땅의 은을 전부 긁어다가 쓴 것처럼 보이게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이 은을 가지고 교역하는 일이 활발해지면 필시 의심할 것입니다."
"어차피 당장 은으로 교역을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분석이다 준비다 뭐다 하다 보면 못해도 내년 여름까지는 가야 교역을 시작할 걸세. 그 정도 시간이면 조선에서 은을 새로 캤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건 은으로 교역하는 것 자체가 괜찮아지는 것이고, 조선에서 교역 대금으로 계속 은을 가져오는 것은 다른 문제 아닙니까."
"하하하! 예리하면서도 신중해서 좋군. 아무렴 큰돈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이런 면도 있어야지."
즐겁다는 듯 웃은 양녕이 말을 이었다.
"맞아. 하지만 그것도 대책이 있네. 명나라에 이리 말하는 거지. 이번 원정 때 나라 안의 은을 너무 긁어모았더니 은값이 폭등했고, 전국 각지에서 은광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은 생산은 좀 늘었지만 지금 가뜩이나 심요도 재건으로 힘든 상황이라서, 조공으로 보내려고 은을 또 세금으로 거두면 백성들의 반발이 클 것이다. 따라서 그냥 상인들이 알아서 심요도에 필요한 물자를 은으로 사 오게 하고, 그걸로 세금을 내게 해도 괜찮겠느냐. 이러는 걸세. 어차피 명나라는 조선 내부 사정은 잘 모르지 않는가."
한명회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결 걱정을 던 표정으로 말했다.
"명나라가 조금 미심쩍어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승인하겠군요. 명나라는 은이 필요하지만, 조공으로 은을 받으면 그보다 훨씬 큰 가치의 회사품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차피 은이 필요한 이유는 나라 안에 돈으로 돌게 하려는 것이니, 상인들이 알아서 조선과 거래하며 나라 안에 은이 들어온다면 굳이 회사품을 줘 가면서 조공으로 받을 필요가 없지요. 물론 자신들은 제값으로 거래했다고 생각한 은이, 사실은 조선에 많은 이익이 되고 있다는 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네. 그리고 조공이 아니라 상인들 사이의 거래이니, 슬금슬금 은 교역량을 늘려도 명나라 조정에서는 쉽게 눈치채지 못할 걸세. 설령 눈치를 채더라도 회사품 부담 없이 은을 많이 얻을 수 있는데 마다할 리는 없으니 묵인하겠지."
"백성들의 반발이 커서 은을 세금으로 걷어 조공으로 보내기 어렵고, 그러면서도 물자가 필요해서 상인들의 교역을 허락할 정도라고 하면 조선이 심요도 재건에 많이 버거워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내심 반기겠군요."
"그렇네. 그리고 명나라에 은이 흘러 들어가면 백성들이 은을 가지고 활발히 교역해서 상업이 활발해질 것이니 그것도 좋은 일이지."
이해를 벗어난 양녕의 말에 한명회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명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이 좋은 일이라니요?"
"명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이 누각을 높이 쌓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보게. 단순히 따진다면 명나라가 7층 누각을 쌓는 것보다 3층 누각을 쌓는 게 우리에게는 더 좋아. 하지만 그 7층 누각의 주춧돌은 우리가 언제든 잡아 빼버릴 수 있는 주춧돌이라면 좀 얘기가 다르지 않겠나?"
한명회는 그 말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뜨더니, 조금 전까지의 걱정스러움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을 만큼 자신감과 야심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런 것이었군요. 그런 것이라면 빨리 시작해야지요. 척동상단 지부는 심요도 어디에 세우게 됩니까? 요동성입니까?"
"요동성이 아무리 심요도의 중심지라고는 하지만 너무 내륙이네. 대마군에 지부를 세웠던 것처럼 배가 오가기 좋은 곳에 세울 것이야."
양녕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탁자 위에 펼쳤다.
"심요도 지도로군요."
"그래. 그리고 척동상단 지부를 세울 곳은 바로 여기일세."
양녕은 손가락으로 심요도의 서남쪽, 원래 역사에서 후에 요동반도라 불리게 되는 반도의 끝자락을 짚으며 이어 말했다.
"자네, 왜 명나라에서 요동을 옆에 있는 북직례가 아니라 바다를 두고 떨어진 산동성에 속하게 했는지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듣고 보니 궁금하군요."
"이 끝자락에 철산도라는 섬이 있네. 그리고 거기서 남쪽으로 항해해 가면 섬이 계속 이어지지. 그 섬들을 쭉 따라가면 산동성 등주부의 봉래에 이르게 되네. 이것이 흔히들 노철산수도라 불리는 물길이야."
"아하, 해로로 이어져 있군요. 거리는 가깝습니까?"
"아주 가깝지는 않네. 300리 정도는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 하지만 요동성에서 북직례까지의 거리나 산동성까지의 거리나 별 차이 없네. 게다가 북직례 일대는 자체적으로 짓는 농사만으로는 식량을 충당하기 어려워 남쪽에서 운하를 통해 식량을 공급받는 지경이네. 하지만 산동성은 농사가 잘되는 땅이니, 요동을 유지하려면 차라리 산동성에 속하게 하는 게 낫지."
"거리가 비슷하다면 그게 훨씬 낫지요. 그리고 북직례에서 이어지는 땅은 오랑캐들이 습격할 위험도 있는 데다가 요하의 거친 물줄기를 건너고 주변의 습지대를 지나야 할 테니, 차라리 바다를 건너는 게 속 편하겠습니다."
"맞아. 거기다 줄줄이 이어진 섬을 따라만 가면 바다를 건널 수 있으니 어려운 것도 없지. 그런 탓에 노철산수도 북쪽 끝, 내가 척동상단 지부를 세우고자 하는 항구의 이름도 여행길이 순탄하고 이롭다. 즉 여도순리라는 말에서 따서 여순구라 불리네."
"여순이라. 배를 타는 사람들이 좋아할 이름이군요."
"여순구는 제북항 정도 크기의 만이니 항구로 쓰기에도 충분해. 그 동쪽에도 역시 전변항(현 마이즈루) 정도 크기의 만이 있으니, 장차 그곳도 쓰임이 있을 걸세."
원래 역사에서 후에 대련항으로 불리게 된 항구의 설명을 듣고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도를 보던 한명회가 말했다.
"산동성은 북직례와 달리 농사가 잘된다 하셨으니, 은을 가지고 산동성에 가서 물자를 사 오면 딱 맞겠군요. 그런데 여기는 금주위가 있는 곳 아닙니까?"
명나라는 요동성에서 남쪽으로 여순구에 이르기까지 해주위, 개주위, 복주위, 금주위의 네 위소, 통칭 남4위를 설치했다. 그리고 여순구는 금주위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맞네. 여순구 일대에는 천호소도 있지."
"괜찮겠습니까? 일찌감치 금나라에 점령되고 거리도 가까웠던 해주위와 개주위는 모든 백성이 다 끌려가서 텅 비어 버렸지만,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던 복주위와 금주위에는 백성들이 많이 남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심요도가 조선 땅이 되면서 명나라로 이주해 간 이들도 있겠지만 소수일 것이고, 남은 이들은 조선 백성이 되었다 하나 그 뿌리는 중국인입니다."
"그렇네. 제북항에 원래 살던 여진족처럼 수가 적은 오랑캐가 아니니 동화시키기도 어렵고, 명나라의 보는 눈이 있으니 대마군의 왜구들처럼 모조리 끌어낼 수도 없지."
"예. 그렇다고 남겨둘 수도 없습니다. 중국인들은 상업에 능하니 그들이 교역에 슬금슬금 손을 뻗칠 수도 있고, 조선의 상황을 알아내어 명나라에 넘길지도 모릅니다. 그게 좀 우려됩니다."
그 말에 양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걱정하는가. 위험을 감수하고 남겨둘 필요도, 동화시키려고 애쓸 필요도 없네. 억지로 끌어내지는 않으면서도 모조리 비워 버린다면 아무 문제 없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