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05화 (20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05화

205화

홀로 남아 어깨에는 화살을 맞고 사방으로 포위까지 당한 상황에서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안장 위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아룩타이를 가만히 보던 이징옥이 옆에 있던 군관에게 물었다.

"혹시라도 가짜가 아룩타이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가짜 적장에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서 말일세."

"도망치는 데 실패할 걸 예상하고 미리 자기 행세를 할 노인까지 준비해 두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로 앞을 내다볼 수 있다면 진작 달아났겠지요."

"하긴, 그렇군."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요? 제압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이대로 생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징옥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명나라에서 아룩타이의 얼굴을 알까?"

"그럴 겁니다. 이미 야르하치가 부하와 투구를 바꿔 쓰고 무사히 탈출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까요. 어쩌면 조선이 북원과 짜고 아룩타이의 갑옷을 입은 가짜의 시체를 가져와 요동을 얻으려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것입니다."

군관은 슬쩍 아룩타이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룩타이 입장에서도 조선과 딱히 원수지지 않게 되고, 조선이 요동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면 앞으로도 명나라를 견제하기 좋으니까요. 명나라도 그 가능성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막으려고 아룩타이의 얼굴을 아는 사람을 마련해 두었을 겁니다."

"역시 그렇군. 그렇다면 아룩타이는 여기서 죽여서 그 시체를 가져간다. 확인은 명나라가 하겠지."

이징옥의 말에 군관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생포해서 가는 게 더 공적이 크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미 다 잡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생포가 어려운 일도 아니고, 화살에 맞은 상처만 치료하면 명나라에 도착할 때까지는 충분히 살려둘 수 있습니다."

"공적이 클수록 명나라가 우리를 견제할 것이 뻔하니 차라리 생포하지 않는 게 나을 수 있네. 애초에 목표는 아룩타이의 생포가 아니라 제거였으니 생포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고 말이야."

"그거야 그렇습니다."

"게다가 아룩타이를 산 채로 명나라에 넘기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지 않는가. 몽골을 몰아내고 중국인들의 나라를 세웠다고 자랑하면서도 몽골을 여전히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이 명나라야. 북원의 타이시라는 이유만으로 목적도 없는 고문을 당하겠지."

이징옥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비록 북원이 이번에 금나라를 칠 때 우리를 방해하려 들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크게 원수진 것 없는 사이지 않은가. 오히려 앞으로 원수질 일을 하러 온 것은 우리고 말이야. 그러니 아무리 적장이라고 하지만 저런 노인에게 괜한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네."

그렇게 말하며 나이 든 어머니를 떠올리는 이징옥 옆에서 군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재상씩이나 되는 자가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 것이니, 그 고결한 만큼의 예우는 해 줘야겠지요."

두 사람이 조선말로 대화하는 사이, 아룩타이는 고통에 멍해진 머리로 온갖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칸께서만 무사하시다면 나는 죽어도 괜찮다. 대원의 옥새도 아직 칸에서 칸으로 계승되고 있으니, 칸의 옥좌가 계속 이어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명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몽골의 칸께서 다시 당당히 천자의 이름을 내걸 날도 올 것이다.'

"그럼 곱게 보내 줄 테니 괜히 저항해서 여럿 다치게 하지 말자고 얘기를 하는 게 낫지 않겠나? 내가 여진말은 배워서 좀 하지만 몽골말은 전혀 모르니, 얘기는 다른 사람이 해야겠지만 말이야."

"저도 몽골말은 잘 모릅니다. 그래도 죽이려고 하면 상황은 대충 알지 않겠습니까? 아룩타이 본인도 산채로 끌려가는 것보다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나을 거라는 건 알 겁니다. 게다가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고 이렇게 우리를 유인했을 정도니 굳이 저항하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징옥이 편곤을 꺼내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아룩타이는 눈을 빛내며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여기서 저 조선 장수의 손에 죽고, 그게 조선에 이익이 된다면 야르하치가 말했던 것처럼 장차 네 천자가 세워지는 기반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명나라의 중국인들, 한때 칸의 노예나 다름없던 그들의 알량한 자존심을 박살 내 줄 수만 있다면, 늙은 목숨값을 지불하고 얻는 것으로는 충분하고도 남는 것 아니겠는가.'

* * *

1434년 9월 중순 모일.

몽골 초원 서부.

조선 기병대가 아룩타이를 죽였다는 소식이 사방에 퍼지고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이라트 부족들 전체의 수장인 토곤은 무장한 기병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아룩타이가 죽었다니 마음이 복잡하군. 내 아버지의 원수가 드디어 죽었다니 기쁘기도 하고,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아쉽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또 타이시라는 이름값을 충분히 하던 거물이 죽은 것이라 허전하기도 하고 말이야."

토곤의 옆에서 나란히 가던 사내가 말했다.

"그럴 만도 하지요. 하지만 그런 거물을 잃었으니 북원 놈들도 세가 꺾일 것 아닙니까. 좀 더 좋아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명나라도 아니고 갑자기 조선이 기병을 이끌고 가서 아룩타이를 죽였다니 좀 이상합니다. 그 둘은 딱히 원수진 것도 없던 사이 아닙니까?"

"나도 그쪽 정세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여진족들이 금나라를 다시 세운다고 난리를 쳤다가 명나라하고 조선에 된통 당한 건 자네도 듣지 않았나.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북원 놈들이 여진족 편으로 끼어들었던 모양이야."

"위협으로 느낀 조선이 선공한 모양이군요. 중국인들만큼은 아니지만, 삼한인들도 몽골에는 당한 게 많았으니 그럴 만합니다."

"아니면 명나라가 시킨 일일 수도 있네. 북원이 여진 대신 조선과 손을 잡고 자신들을 위협할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 하겠지. 그렇다면 조선을 시켜 아룩타이를 죽이게 하면 두 나라가 원수가 될 테니 손잡을 일이 없어지지 않겠나."

오이라트의 뿌리는 몽골 초원 서쪽의 산림 지대다. 드넓은 몽골 초원을 두고 요동과는 정반대 위치에 있는 만큼 요동의 중요성이나 정세는 몰랐지만, 그 점을 감안하고서라도 토곤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주변 나라끼리 싸우게 만드는 게 명나라 특기 아닙니까."

"그래. 하지만 명나라도 참 멍청해. 우리 오이라트와 북원을 싸우게 하고, 여진족과 북원을 싸우게 하고, 거기에 더해서 조선과 북원까지 싸우게 하려는 것 아닌가. 셋을 써서 북원 하나만 두들겨 패는 꼴이니, 자칫하면 북원이 아예 몰락해 버릴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적 하나를 이기려고 적 셋을 키워 주는 꼴이야."

토곤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미 북원을 견제하겠다고 여진족을 도와주다가 놈들이 금나라를 재건한 것 아닌가. 그런데 거기서 배우지 못하고 조선에 또 같은 짓을 하다니 우스운 일일세."

"그렇게 셋을 동원해서 견제해도 쉽게 몰락하지 않을 정도로 북원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또 그렇지. 자신들을 가축처럼 다루었던 몽골인들일세. 중국인들이 자신들이 몽골을 쫓아낸 것이라 말하지만, 실제로는 몽골인들이 초원으로 물러난 것일 뿐이니 두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닐 게야. 언제 또 몽골인들 허락을 받아야 아궁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시대가 올지 모르는 것 아닌가."

그 말에 토곤과 사내는 물론 주변에서 대화를 듣던 이들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웃던 토곤은 웃음을 멈추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무엇보다도 북원에는 아직 황금 씨족의 칸이 군림하고 있네. 칭기즈 칸의 후예라는 가장 강력한 명분. 그 어떤 강력한 몽골인이라도, 심지어 칸보다 큰 권세를 가진 자라도 감히 칸을 칭할 수 없고, 범접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보르지긴 가문의 혈통이 말이야. 참으로 얄궂은 일이지. 오이라트 모두를 이끄는 내가 칸을 칭하지 못하고 타이시에 머무르는 것, 북원의 잠재력을 두려워한 명나라가 우리를 지원해 주는 것 둘 다 보르지긴의 혈통이 원인이라니 말이야."

민감한 주제가 나와서 잠시 대화가 멈춘 사이, 토곤의 일행은 목적지였던 마을에 도착했다. 게르가 여럿 펼쳐진 마을 앞에는, 토곤 일행이 오는 것을 이미 보았는지 사내 여럿이 말을 타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앞에 서 있는 앳된 얼굴의 청년을 본 토곤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나는 초로스 가문 사람, 마하무드의 아들 토곤이오! 오이라트의 여러 부족을 이끄는 자리에 있어서 사람들에게는 토곤 타이시라 불리지! 오늘은 이 마을에 볼일이 있어서 왔소!"

오이라트의 타이시로 널리 알려진 토곤의 이름을 들은 사내들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지만, 맨 앞에 있던 청년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그럼 손님이 오셨으니 손님맞이를 해야겠군. 우리 마을이 초라하지만, 손님 대접할 만큼의 물자는 갖추고 있소. 악바르진, 가서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하게."

"예, 형님."

청년의 아우가 말을 돌려 마을로 가는 것을 슬쩍 본 토곤이 씨익 웃었다. 손님과 주인이 서로 해치려 드는 것은 유목민들 사이에서 가장 큰 죄악이고, 쌓아 올린 모든 위신과 명분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강한 세력이 방문했을 때 손님으로 받아 버리면 그들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없어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머리를 쓰는 것이나,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맨 앞에 나와 있는 것, 그리고 저 당당한 태도를 보아하니 저 청년이 분명하군.'

"그대가 이 마을의 우두머리요?"

"그렇소."

"이름을 알려 주시겠소? 주인 이름도 모르고 손님으로 들어가는 것도 부끄러운 일 아니겠소."

"톡토아부하라 하오."

"몽골인들 사이에서는 자주 보이는 이름이군. 그런데 정말 그 이름으로 끝이오?"

토곤의 그 말에 톡토아부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고 오신 게로군. 그렇다면 뭐 감출 것도 없겠소."

톡토아부하는 조금 전보다도 더 당당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힘주어 말했다.

"나는 보르지긴 가문 사람. 니굴세그치 칸(엘베그)의 아들이신 카르고초크의 아들이신 아자이의 아들, 톡토아부하라 하오!"

톡토아부하의 소개를 들은 토곤이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정확히 찾아왔군. 처음 뵙겠소. 위대하신 칭기즈 칸의 혈통인 황금 씨족이며, 온 세상을 정복하신 세첸 칸(쿠빌라이)의 후예인 보르지긴 톡토아부하여. 나는 오늘 그대를 만나러 왔소이다."

"그래서, 황금 씨족이라는 말이 무색한 이 초라한 일개 부족장에게 무슨 용무로 오신 게요?"

톡토아부하의 표정에는 여전히 미심쩍음이 남아 있었지만, 토곤은 야망으로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대를 몽골 초원의 진정한 칸으로 추대하러 왔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