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04화
204화
1434년 8월 초순 모일.
심양성. 회경군 군영.
아룩타이를 제거하기 위한 회경군의 북원 원정 준비는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출정을 며칠 남기고 김종서와 이징옥은 군영 깊은 곳, 명나라의 듣는 귀가 없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곧 출정이로군. 별문제는 없는가?"
"예, 잘 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정로군은 힘이 빠져 뭘 더 하지 못하고 요동에 머물러 있는데, 회경군은 이렇게 군대를 연달아 움직일 수 있는 모습을 보면 명나라가 괜히 조선의 군사력을 견제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걱정스러워하는 이징옥의 말에 김종서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그거라면 걱정 말게. 조정에서 명나라 눈에는 조선이 회경군을 연달아 움직이려고 무리를 한 것처럼 보이게 수를 써 두었다는군. 물론 실제로 무리한 것은 아니더라도 여유가 있다고 할 정도도 아니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번 전투에서 기병여단은 주로 적 기병이 왔을 때 쫓아내는 게 주 임무여서 피해가 적었고, 북원을 상대로 하는 이번 원정은 바로 그 기병여단이 가는 것이니 병력 동원에는 무리가 없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산이나 보급도 괜찮은 겁니까? 그 둘은 쓰면 무조건 없어지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괜찮네. 동북면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들이 이번에 그 수가 많이 줄지 않았는가. 거기다가 다른 지역 여진족들도 전부 야르하치를 따라가는 바람에 교역도 끊겼지. 여진족을 안정시킬 일도 없고, 교역도 못 하니 면포가 많이 남았다네."
"그 면포를 쓴 것이군요."
김종서가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네. 이전처럼 여진족에게 면포를 팔고 몽골이나 서역의 말을 구해 오기는 어려워졌지만, 대신 오우치 가문을 통해 일본에 팔아 예산을 마련하는 데에 썼다는군."
"다행입니다. 그럼 보급은 어떻습니까?"
"군량이나 화약이나 이번에 많이 쓴 탓에 조선 안에서는 더 모을 수가 없었어. 군량과 화약은 곧 미곡과 거름인데, 그걸 억지로 긁어모으면 백성들의 삶에 지장이 갈 것 아닌가."
"그렇지요."
"그래서 오우치 가문에 면포를 팔고 사 온 은을 썼네. 군량과 화약이 부족하니 좀 팔아달라면서 명나라에서 은으로 사 오기로 한 것이지."
"면포는 귀하지만 큰 은광산이 있는 오우치 가문을 한 번 거쳤으니, 명나라에 바로 면포를 파는 것보다 더 이익이 크겠군요. 그런데 그렇게 은을 주고 사 오는 것을 보면 명나라가 조선에 이리 은이 많이 나냐면서 욕심을 내는 것 아닙니까?"
"그거야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일단 조정에서도 대비를 하긴 했네. 그냥 은만 보내는 게 아니라 궁에서 쓰던 은 기물과 백성들이 쓸 법한 은 기물을 섞어서 보냈다는군."
잠시 생각하던 이징옥이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군량과 화약이 급해서 나라 안의 은을 다 긁어모은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로군요."
"그렇지. 아마 명나라는 조선이 요동을 너무나 얻고 싶은 나머지 어떻게든 여력을 긁어모아 회경군을 다시 투입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아마 요동을 얻더라도 유지하기 벅찰 거라는 생각도 하겠지. 하지만 명나라 생각대로 그렇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겠지."
김종서를 따라서 이징옥도 씨익 웃으며 말했다.
"명나라 생각대로 해주면 재미가 없겠지요. 일단 이번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겠습니다."
* * *
1434년 8월 중순 모일.
몽골 초원.
북원의 타이시(재상) 아룩타이는 말에 탄 상태로 저 동쪽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조선군 기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조선군이 점차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아룩타이가 부하에게 물었다.
"칸께서는 무사히 피하셨는가?"
"예. 타이시의 가족분들도 모두 피하셨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슬슬 조선군이 접근하고 있으니, 타이시께서도 어서 피하시지요."
"그래야지. 이전에 명나라 황제가 직접 원정 왔을 때 나를 노렸던 것처럼 저 조선군도 나를 노리고 왔을 걸세. 어쩌면 명나라가 저들을 사주한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나저나 칸께서 무사히 피하셨다니 나도 슬슬 피해야……."
그때 말 탄 사내 하나가 급하게 아룩타이에게 다가왔다. 정로군과 회경군을 견제하려다 기병여단에 제대로 당하고 퇴각했던 그 기병대의 대장이었던 사내였다.
"타이시, 큰일입니다. 동쪽의 저 조선군 말고, 서북쪽에도 조선군이 나타났습니다."
"그게 무슨……. 거기는 우리가 퇴로로 생각하던 곳 아닌가. 그게 정말인가?"
"예. 규모도 제법 됩니다."
아룩타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조선군이 초원에서 그런 기동력을 보일 수 있다니. 조선의 말은 순간적으로 빠르게 달릴 수는 있어도 지구력은 부족한 것 아니었는가?"
"그게…… 좀 다릅니다. 저번에 제가 저들과 싸울 때 본 말과 전혀 다른 품종의 말을 타고 있습니다. 차라리 몽골이나 여진의 말에 가까운 말로 보입니다."
몽골인들에게 말은 가축을 넘어서서 삶 그 자체와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기병대를 이끌 정도인 사내가 말 품종을 잘못 보았을 리는 없으니 조선이 여러 품종의 말을 용도에 따라 갖추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런."
당혹감 섞인 아룩타이의 목소리에 사내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명나라가 교역을 제한했을 때, 여진족들에게 말을 팔고 면포를 사들여 왔던 적이 있었네. 그때는 여진족은 농사도 짓는 이들이니 면포를 만들어서 파는 것일 수도 있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말았지."
"설마……."
"그래. 지금 돌이켜보면 그 면포는 조선에서 들어온 것이었던 것 같네. 결국 저들에게 여러 품종의 말을 팔아준 건 다름 아닌 우리였던 거야. 오이라트 놈들을 이기려고 한 일이 돌고 돌아 이 상황을 만든 거지."
"정말로 그렇다면 조선은 역시 명나라와 다르군요. 명나라에서도 말을 여러 번 사 갔지만 저들의 기병은 그리 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사간 말들을 온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서 다루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 하지만 지나간 일인데 후회한들 어쩌겠나? 지금은 저들의 추격을 피해 어떻게 탈출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네. 저들의 무기가 어느 정도 사거리가 되는지 아는가?"
사내는 기병여단을 상대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대답했다.
"저들의 화살은 우리의 화살보다 사거리가 두 배 정도 됩니다. 하지만 터지는 불화살과 파편을 뿌리는 화살은 무게가 있어서 그런지 그것보다는 더 가까운 거리에서 쐈습니다."
"그럼 아직 거리에 좀 여유가 있군. 자네가 말했던 그 터지는 화살에 당하면 우리는 괜찮아도 말들이 혼란에 빠져서 위험할 수 있으니, 지금부터 빨리 거리를……."
아룩타이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동쪽 회경군 방향에서 폭음과 함께 총알들이 날아왔다. 총알에 맞은 병사들이 낙마하고 말들이 쓰러지고, 그 상황에 놀란 다른 말들이 날뛰면서 점점 혼란이 퍼져 갔다.
"대체 뭐야! 놈들이 든 저 연기 나는 막대기는 뭔가?"
아룩타이의 말에 조선군 쪽을 유심히 보던 사내가 말했다.
"여진족들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총이라는 화약 무기일 겁니다. 끝에 칼을 달아 창처럼 쓸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저들이 지금 든 것은 그러기에는 짧은 걸 보니 아무래도 말 위에서 쓰기 좋게 만든 것 같습니다."
"별 이상한 무기를 다 쓰는군. 하지만 화약 무기라면 장전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나? 게다가 그동안에는 말을 빨리 달리지 못할 걸세. 그 사이에……."
그 말이 무색하게도 회경군 기병대는 발사한 마상용 조총을 안장에 꽂고 활과 화살을 꺼내 들며 빠른 속도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아룩타이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빌어먹을!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말들이 혼란에 빠졌지만 지금 이 거리라면 불가능하지는 않아!"
아룩타이의 호령에 북원 기병들이 일제히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들의 혼란이 가라앉지는 않았기에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없었고, 그사이 점점 뒤로 다가온 회경군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건조한 여름날의 몽골 평원은 습기에 약한 각궁에는 오히려 최적의 조건이었고, 평소보다도 사거리가 늘어난 회경군 기병의 화살에 맞아 낙마하는 병사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저번에도 저 역시 이런 상황에서 탈출했으니까요. 비록 저들이 초원에 유리한 품종의 말을 탔다고 하지만, 저 말들이 초원에 익숙한 것은 아닙니다. 꾸준히 달리다 보면 먼저 힘이 빠지는 것은 저들일 겁니다."
어떻게든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려는 사내의 말에도 아룩타이는 대답 없이 자신의 화려한 투구를 잠시 만지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럴 것 없네. 나는 남을 테니 자네들은 탈출하게. 놈들이 노리는 것은 나 하나이니, 나를 잡으면 자네들을 더 추격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저희가 타이시를 버리고 간단 말입니까!"
놀란 사내가 말했지만 아룩타이는 확고한 목소리로 거듭 말했다.
"우리는 지금 오이라트 놈들과 싸우는 중이네. 이 늙은이 하나를 살리겠다고 북원의 청년들이 몇 사람이나 죽어서는 안 돼. 게다가 그렇게 피를 흘린다 해서 무조건 내가 살아서 탈출할 수 있다는 보장조차 없는 것 아닌가. 놈들은 내가 멈출 테니 자네들은 살아 돌아가서 칸을 보좌하게. 나는 괜찮아. 칭기즈 칸을 섬기던 사준사구처럼 나 또한 칸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니, 몽골의 사내로서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최후가 있겠는가?"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은 자네가 잘 보살펴 주게. 특히나 우리 집 개는 내가 사냥에 나가면 돌아올 때까지 집 앞에서 기다린다고 하니, 앞으로도 하염없이 나를 기다릴 게야. 그 녀석도 잘 부탁하네."
말을 마친 아룩타이는 사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힘껏 고삐를 잡아당겨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보던 사내는 이내 결의를 다지고 외쳤다.
"타이시의 마지막 명령을 지킨다! 우리는 이대로 탈출한다!"
그 외침을 등 뒤로 하고 달리던 아룩타이는 슬쩍 뒤를 보았다. 회경군 기병대가 탈주하는 북원 기병들이 아니라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아룩타이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다행이야. 역시 생각대로다. 나도 이대로 탈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포기해야겠어. 이거 원, 말은 멀쩡한데 내 몸이 따라주지를 않는구먼."
말을 오래 타기에는 체력이 부족해 점점 속도가 떨어지던 아룩타이의 어깨 뒤쪽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화살이 박혔음을 직감한 아룩타이는 휘청거리면서 말을 멈추었다.
"이쯤 왔으면 다들 충분히 탈출했겠지. 여기서 멈춰야 너도 목숨을 건지고 덜 지칠 거다. 조선 땅에 가서도 잘 살아야 한다."
타고 있는 애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한 아룩타이가 천천히 고삐를 당겨 뒤로 돌았다. 아룩타이가 멈춘 것을 확인한 회경군 기병대는 공격을 멈추고 아룩타이를 빙 둘러 포위했다. 이윽고 서로 마주하게 된 이징옥과 아룩타이는 서로의 말은 몰랐지만, 미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거의 동시에 중얼거렸다.
"거 햇볕 한번 엄청 뜨겁군. 몽골인이나 여진족들이 왜 윗머리를 밀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아."
"날이 참 좋군. 이런 날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