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03화 (20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03화

203화

1434년 5월 하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심양성 점령을 마지막으로 야르하치 토벌을 위한 명나라의 원정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여전히 심양성 북쪽에는 수복하지 못한 성과 요새들이 여럿 남아 있었지만, 지금까지 수복한 지역도 아직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야르하치가 무사히 북쪽 송화강변의 하르빈으로 탈출하기까지 했으니, 후방이 불안한 상태로 군대를 더 북쪽으로 보내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형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이도의 말에 양녕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 주상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다."

경략사를 통해 원정이 종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양녕은 몇 가지 일들을 김종서에게 맡겨두고, 무기와 갑옷, 군마와 포로 등의 전리품을 챙겨서 계호대대와 함께 한성부로 돌아왔다.

"이제 판차와 부하투는 조리돌린 다음 참수해서 목을 내걸 것이고, 동권두는 무타우타의 간과 가죽을 아비의 무덤에 바치러 회령으로 갈 겁니다. 조선을 배반한 오랑캐들에게 모두 마땅한 벌을 내려 본보기를 보였고, 이번 원정은 여기서 종료나 다름없다고 경략사가 말할 정도라니 회령군이 할 일도 이제 끝난 게 맞겠지요."

"예.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그렇지요. 지금 요동 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양녕이 한성부에 막 돌아오다시피 한 참이었던 탓에, 양녕에게서 요동의 제대로 된 상황을 듣는 것은 이도가 처음이었다.

"심양선 전투가 끝난 다음 제가 경략사를 찾아가서, 회경군은 원군으로 왔던 것이니 할 일은 끝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정로군이 아직 요동에 있으니 내버려 두고 먼저 조선으로 가지는 않겠지만, 우선 요동성에 가 있을 테니 필요하면 불러 달라고 하였지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동성은 성벽도 멀쩡한 데다가 조선에 가까운 후방입니다. 하지만 지금 정로군이 있는 심양성은 성벽이 심각하게 파괴된 데다가 여진족에 가까운 한참 북쪽에 있는 탓에, 기병이 약한 정로군만으로는 지키기가 어렵지요. 결국 필요한 게 있으면 줄 테니 심양성에 남아서 방어를 도와달라며 붙잡더군요. 그래서 회경군도 지금 심양성에 남아 있습니다."

"허허허, 명나라가 조선에 도움을 청하며 붙잡는 상황을 생각하니 속이 시원하긴 하지만, 사실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군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의 군대를 계속 요동에 머무르게 하는 상황 아닙니까. 게다가 이번 원정으로 조선이 강하다는 생각도 했을 테니 회경군을 경계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 그러면서도 당장 회경군이 필요하기는 하니 아마 앞으로 어느 정도는 더 심양성에 잡아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회경군이 제법 오래 자리를 비웠는데 동북면은 괜찮습니까?"

"예. 동북면이 소란스러웠던 이유가 야르하치 세력이 여진족 부족들을 끌고 가거나 포섭해 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마을을 습격해서 파괴하기도 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놈들이 요동에서 난리를 피우느라 정신이 없던 덕에 동북면은 조용했습니다. 이제 놈들이 아예 송화강 일대로 멀리 달아났으니 오히려 앞으로는 개척하기 더 좋아졌지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도는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양녕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명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이로군요. 이번 일이 그냥 여진족이 소란을 일으켰던 정도라면 다시 요동도사를 통해 요동의 통제를 확보하는 선에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여진족이 아예 나라를 세운 상황인 데다가 요동의 피해도 심각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요동성은 멀쩡하지만 다른 성이나 요새들은 처참한 상황입니다. 한쪽 성벽이 무너진 무순성이나 아예 헐려 없어지다시피 한 무순관 같은 사례도 있지만, 제일 심한 건 역시 심양성이지요."

"심양성이 많이 상했다는 건 보고를 받아서 알고는 있었지만, 아예 헐린 무순관보다도 심할 정도로 상한 겁니까?"

"예. 문루들은 모조리 무너졌고, 성벽 위에 포가 올라가 있던 곳은 다 포에 맞아 파괴되었습니다. 성문 좌우 성벽들은 제대로 위를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났지요. 게다가 남쪽과 동쪽 성문은 아예 무너져내렸습니다. 차라리 헐려서 없어졌다면 새로 쌓는 것만 생각하면 되겠지만, 이건 무너지고 상한 성벽을 정리하고 치운 다음 다시 쌓아야 하니 더 힘이 들지요."

"게다가 쌓을 사람도 없겠군요."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요동에 명나라 백성들이라도 있으면 그들을 시켜서 할 수 있겠지만, 전부 야르하치에게 끌려가고 없으니까요."

"중원에서 다른 백성들을 끌고 와서 일을 시키고 정착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번 일로 요동은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이 커졌을 테니 그리했다가는 반발이 크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놈들이 작정하고 달아날 계획도 세워 뒀던 것이라면 백성들을 끌고 오더라도 식량이 부족하겠군요."

"맞습니다. 점령될 것을 예상한 요동성은 물론이고, 놈들의 도읍인 심양성 근처 농토에도 작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마 전부 일찍 수확한 다음 사람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익은 것은 군량으로 쓰고, 덜 익은 것은 말을 먹인 듯합니다."

"심각하군요. 원래부터 여진족들이 살던 지역은 어떻습니까?"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허투 알라나 호이파강 일대도 농토는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파괴되고 없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계호대대가 별동대로 다니면서 파괴한 것도 있지만, 명나라는 그 사실을 모르니 온전히 다 야르하치가 옮길 것은 옮겨가고 나머지는 못 쓰게 파괴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사실을 아는 조선보다도 잘못 알고 있는 명나라가 더 금나라 잔당 세력을 위협적으로 평가하고 있겠군요."

"예. 어찌 보면 다행이지요. 놈들이 농토를 싹 수확하거나 태우고 간 덕분에 명나라로 4윤작법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뭐, 여진족 놈들도 명나라가 요동에서 농사를 활발하게 지으며 자리 잡으면 자신들에게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그렇게 한 것이겠지요."

"그러면 명나라는 여전히 요동은, 특히 동쪽 산간지대는 척박한 땅이라고 생각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말없이 한참을 생각하던 이도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명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조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요동은 주변의 모든 나라에게 지극히 중요한 땅이지만, 지금은 성은 무너지고 농토는 불타고 백성들은 끌려가고 없는 황폐한 땅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아마 명나라는 요동을 계속 가지고 있고 싶어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회경군에게 남아 있어 달라고 할 정도로 군사력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명나라 백성들도 요동으로 가는 걸 거부할 것입니다. 요동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력을 적잖이 쏟아부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조선에 넘겨주지도 않겠지요. 원래도 그럴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조선의 군사력이 막강한 것을 본 직후니 더더욱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요동을 넘겨받더라도 문제입니다. 같은 돈과 인원이 들어간다고 하면 명나라보다도 조선에 더 큰 부담이 될 것이니, 오히려 명나라가 요동을 조선에 준다고 하면 조선을 약하게 만들려는 책략은 아닐까 의심해 봐야 할 것입니다."

양녕의 그 말에 이도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땅이지요. 북원이나 금나라가 요동을 다시 얻었다가는 더 큰 문제가 될 테니까요. 그야말로 계륵이로군요."

* * *

1434년 5월 하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그로부터 한 달 뒤. 명나라에서 서신이 왔다. 그 내용을 살핀 이도는 바로 중신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경들께서도 이번 서신의 내용은 다들 확인하셨을 것이오. 회경군이 원군으로 와서 도움이 컸다느니, 상황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남아서 도와달라느니, 마땅한 상을 내릴 것이라느니 등등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론적으로는 다 이어지는 얘기를 복잡하게 빙빙 돌려서 했을 뿐이오. 그 본론을 요약하자면 이렇소."

이도는 진지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이어 말했다.

"요동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라면 조선에 넘길 뜻이 있다. 대상은 요하 동쪽. 말 그대로 좁은 의미의 요동에 해당하는 땅이다. 대신 조건이 있다."

이도는 다시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 말했다.

"북원을 쳐서 아룩타이를 제거하라."

이미 중신들도 이해하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이도의 입으로 듣자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신 영의정 황희 아뢰옵니다. 이번 원정에서도 회경군이 북원 기병대와 싸우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북원에서 먼저 공격했던 것이고, 회경군도 놈들을 쫓아내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하지만 아룩타이는 북원의 타이시, 즉 칸의 재상입니다. 조선이 먼저 공격해서 제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설령 아군 피해는 거의 없이 제거한다 하더라도 북원에 원한을 사게 된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신 우의정 허조 아뢰옵니다. 영상의 말이 맞습니다. 특히나 몽골인들은 은원에 확실한 이들이지 않습니까. 이번에 원한을 산다면 못해도 백 년은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신 예조판서 신상 아뢰옵니다. 명나라는 요동 전체를 유지하기 힘드니 조선에 일부를 넘겨주고자 하지만, 혹시라도 요동을 통해 가까워진 조선과 북원이 손을 잡고 명나라를 위협하는 것은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조선과 북원을 원수지게 만들어 두 나라의 협력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 요동을 재건하는 데에만 신경 쓰도록 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중신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도가 말했다.

"내 생각도 경들과 똑같소. 정세가 정말 재밌지 않소? 금나라는 조선과 명나라 사이를 이간질해 요동을 점령할 시간을 벌었소. 조선은 명나라가 요동을 다시 쉽게 장악하지 못하도록 야르하치를 살려서 보내 주어 금나라를 온존시켰지. 그리고 지금 명나라는 조선과 북원을 원수지게 만들어 위협을 원천봉쇄하려 하고 있소. 각 나라가 서로에게 이이제이를 쓰는 것이, 꼭 자신들만이 천자의 나라고 나머지는 오랑캐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소?"

은연중에 조선을 천자의 나라로 표현한 이도의 말에 중신 누구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양녕이 말했다.

"신 양녕대군 이제 아뢰옵니다. 이이제이의 책략을 제대로 쓰지도 못해 여진족이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던 명나라가 이번 일에서 배운 것도 없이 또 조선에 이이제이를 쓰려 시도한다니 실로 우스운 일입니다."

양녕의 말에 씨익 웃은 이도가 중신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뭐 명나라가 우리가 아룩타이를 제거하고 요하 동쪽을 가져가기를 원한다면 바라는 대로 해 줘야지. 그리고 그렇게 하는 김에 겸사겸사 이이제이라는 것을 어떻게 쓰는 것인지도 보여 주고 말이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