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02화
202화
자신의 말을 듣고 양녕은 물론이고 기병여단 전체가 당혹감으로 술렁이는 것을 본 야르하치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며칠 동안 너희에게 당하기만 했는데 마지막에 겨우 한 방 먹였군!"
양녕은 당혹감을 억누르고 야르하치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네 말을 온전히 믿어 줄 거라 생각하느냐? 네가 정말로 한 달 전부터 미리 기술을 퍼뜨리기 시작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살아남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허풍을 치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널 살려 보내면 무조건 기술이 퍼지겠지만, 널 죽인다면 기술이 퍼지지 않을 확률이 있다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게다가 기술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과 여진족의 한이자 대금황제를 자처한 널 죽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네 목을 가져가는 것만큼 큰 공적이 없지 않느냐. 우리가 너를 여기서 죽여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양녕의 말에 야르하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나를 죽여야 하는 이유만 계속 말하고 있는데, 나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도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표정 변화도 대답도 없는 양녕을 향해 야르하치가 말을 이었다.
"명나라의 원정인데 명나라 군대가 아니라 원군으로 온 너희 조선 군대가 나를 잡는다면 명나라가 너희를 든든히 여기고 신뢰하게 될까? 아니면 두려워해서 더 견제하려 들까? 답은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조선이 아무리 명나라보다도 공맹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예법을 지킨다 한들, 중국인들의 오만한 눈에는 너희나 우리나 똑같은 오랑캐로만 보일 거다. 그저 말을 잘 듣느냐 아니냐, 위협이 되느냐 아니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지."
"너를 잡아서 조선이 강력하다는 걸 보였을 때 명나라가 견제하려 들 거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괜히 조선을 견제하다가 사이가 틀어지면 오히려 큰 위협이 될 수 있으니 반대로 우리 눈치를 보게 될 수도 있다."
"하하하! 지금 천하의 요충지인 요동이 명나라의 땅이고, 내가 죽고 여진족이 분열되면 그 지배는 더욱 확고해질 것인데 명나라가 뭐하러 너희 눈치를 보겠느냐? 차라리 눈치 볼 일 생기기 전에 빨리 찍어누르려 들 가능성이 더 클 게다."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는 야르하치의 말에 양녕이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네 말대로다. 역시 여진족을 통합하고 대금황제를 자처할 정도의 사내로군. 비록 군사력으로는 이번 원정에서 패했지만, 정세를 보는 안목만은 대단하구나."
"칭찬 고맙군. 그럼 답례로 선물을 하나 주지."
"선물?"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너희도 곤란하지 않느냐."
양녕이 또 무슨 꿍꿍이인가 하며 유심히 보는데, 야르하치는 자신이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기병여단 쪽으로 던졌다. 화려한 장식이 된 여진족 양식의 투구였고, 윗부분에는 실로 만든 술 대신 표범 꼬리가 달려있었다.
투구를 벗어 던진 야르하치는 항상 쓰고 다니는 표범 가죽 모자를 품에서 꺼내 쓰며 말했다.
"그 투구가 선물이다. 가져다가 적당한 여진족 시체에 씌우거라."
영문 모를 야르하치의 말에 양녕이 물었다.
"무슨 소리지?"
"간단하다. 그 시체를 가져가 명나라에 이렇게 말해라. 야르하치를 추적해서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시체를 확인해보니 야르하치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야르하치의 충신 하나가 제 주군을 탈출시키기 위해 투구를 바꿔쓰고 야르하치인 척을 하다 죽은 것 같다고. 그러면 너희가 나를 잡았지만 놓친 것이니, 나를 잡아서 명나라의 견제를 받는 것과 나를 놓쳐서 추궁을 받는 것 둘 다 피할 수 있을 것 아니냐. 아, 대신 그 투구를 씌운 시체는 충신으로 예우해서 꼭 후하게 장사 지내 주거라. 너희도 그 시체에게 도움을 받은 셈이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양녕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마. 정말 철저한 놈이구나. 현명한 토끼는 달아날 굴을 셋 만들어 둔다고 했지? 네놈이 판 두 번째 굴이 이리도 치밀한데, 세 번째 굴은 대체 어떤 물건일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 말에 야르하치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세 번째 굴? 이미 봤잖느냐?"
"뭐?"
세 번째 대비가 이미 있고, 그것을 자신이 이미 봤다는 말에 양녕이 놀라 되묻자 야르하치가 웃으며 말했다.
"기술을 퍼뜨리는 것하고 동시에 파둔 굴이다. 기술을 퍼뜨리는 게 여진족 사이에서 내 이름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굴이었다면, 같이 판 그 굴은 몽골, 삼한, 중국 모두가 내 이름을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굴이지."
언급된 세 민족의 이름과, 기술을 퍼뜨리는 것하고 동시에 판 것이라는 말에 양녕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설마, 한 달 전에 명나라와 조선에 보낸 사신을 말하는 거냐?"
"그래. 정확히는 그 사신이 전달한, 네 천자를 세우는 이야기다. 간단한 발상일 뿐이지만, 각 나라에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어느 나라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물건이지. 온 세상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하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지 않겠느냐?"
그 말에 양녕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야르하치가 말을 이었다.
"좋아, 할 얘기는 다 했으니 우리는 이만 가 보겠다. 마중은 더 안 해줘도 되고, 기왕이면 이번 생에서는 또 만날 일이 없으면 좋겠군. 너무 버거운 상대여서 말이야. 그럼 조선의 대군이여, 조심히 돌아가시게나! 하하하하!"
야르하치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말을 돌려서 선두로 되돌아갔다.
이윽고 여진족 기병대가 다시 말을 달려 떠나기 시작했고, 양녕은 막막하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을 쉬었다.
* * *
1434년 5월 초순 모일.
심양성.
점령이 완료된 심양성 길바닥에 주저앉아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동권두는 옆에서 양녕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양녕이 말했다.
"괜찮으니 앉아 있게나. 오는 길에 소식은 들었어. 다리에 힘이 없을 만도 하네."
"감사합니다, 대군."
"자네야말로 심양성을 점령하느라 고생 많았네."
죽을 위기에서 솟아났던 흥분이 가라앉고, 복수의 여운까지 겹쳐 여전히 멍한 표정인 동권두가 양녕에게 물었다.
"야르하치 놈은 잡으셨습니까?"
"아니. 역시 보통 놈이 아니더군. 잡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놓치고 말았네."
곳곳에 정로군이 있어 지금 대화가 명나라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라, 야르하치를 추격하다 있던 일을 흐려서 말한 양녕이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야르하치와 도르호치는 탈출했고, 심양성에 남아 있었을 판차와 무타우타는 어떻게 되었는가?"
"둘 다 잡았습니다. 판차는 회령중대 병사들에게 처분을 맡겼지요."
"이미 죽었겠군."
"아닙니다. 한쪽 다리가 무릎에서 잘리고 흠씬 두들겨 맞긴 했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들인 부하투하고 같이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그 말에 양녕이 의아한 듯 물었다.
"죽이지 않은 데다가 오히려 치료까지 해 주는 중이라고?"
"예. 제 아버지를 질투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증오해서 그런 일을 일으켰던 놈입니다. 여기서 죽이는 것보다도, 조선의 도성인 한성부까지 끌고 가서 조리돌리고 처형하는 것이 놈에게 더 큰 굴욕과 고통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과연. 때로는 더 오래 살려 두는 게 복수가 되기도 하는 법이지. 그렇다면 그건 무타우타 놈의 것이겠군?"
그렇게 말하며 양녕이 가리킨 것은 동권두의 옆에 놓인 시뻘건 덩어리였다.
"예. 무타우타 놈의 간입니다."
"역시 그렇군. 원수를 잡으면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그러면 저것도 자네가 한 겐가?"
이번에 양녕이 가리킨 것은 무타우타의 시체였다. 갑옷은 벗겨져 옆에 던져져 있고 배가 갈려 있는 것은 물론이었고, 전신의 가죽도 반쯤 벗겨져 있었다.
"그렇습니다. 제 아버지와 동생을 해치면서 스스로 짐승이라 한 놈입니다. 사람을 해친 짐승에 어울리게 산채로 가죽을 벗겨 주었지요. 아쉽게도 반밖에 안 벗겼을 때 죽어 버려서 일단 저렇게 놓고 쉬는 중입니다."
"잘했네. 판차와 무타우타 둘 다 우리가 잡았지만, 버일러 둘을 우리가 다 잡았다고 하면 반드시 명나라가 우리를 견제하려 들 것이야. 그걸 막으려면 판차를 우리가 끌고 가는 대신, 무타우타의 수급은 정로군에 주어 정로군이 잡은 것이라고 하게 해줘야 할 걸세. 그 전에 자네가 죽여서 복수라도 해 두어야지."
"예,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묘소에도 무타우타의 수급 대신 간과 가죽을 바칠 생각입니다."
"그래. 적 장수들의 수급을 절이기 위해 가져온 소금이 많으니, 그걸로 절여서 가져가게나."
"감사합니다, 대군."
그때 잔뜩 구름 낀 하늘에서 쿠르릉 하는 소리가 나더니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허허. 비 오는 모양새를 보니 조만간 쏟아지겠군. 화약을 쓰는 일도 다 끝났고, 심양성도 점령했고, 야르하치 추격에서도 무사히 다 돌아온 다음에 비가 와서 다행이야."
"정말입니다. 비가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일이 꼬일 뻔했습니다. 이놈들이 빗속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군요."
양녕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했다.
"큰일 날 뻔했지. 그나저나 우리 일단 비를 피하세. 싸우느라 땀을 많이 흘렸는데 이렇게 쏟아붓는 비까지 맞으면 분명 감기에 걸릴 게야. 일어날 수 있겠나?"
"예. 이제 좀 괜찮습니다."
동권두는 그렇게 말하고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저 앞에 보이는 멀쩡한 집으로 일단 피하세. 무타우타의 시체하고 간, 갑옷도 저기로 옮겨 두고 말이야. 대신 아무도 안 쓰는 방에 옮겨두고 가죽도 거기서 벗기게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걸 본 사람들 꿈자리가 한동안 뒤숭숭할 테니 말이야."
"물론 그래야지요."
양녕의 농담에 동권두가 피식 웃는 동안에도 빗줄기는 점점 세지기 시작했다. 비가 어느 정도 오는지 확인하려는 듯 양손을 앞으로 내민 동권두는, 자기 손에 말라붙어 있던 무타우타의 피가 빗물에 녹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더니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양녕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오돌리 부족 모두가 이름대로 되는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깃발(판차)은 장대에 내걸릴 것이고, 모우(부하투)는 도륙당할 것이고, 제 손은 비(아구)가 씻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양녕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그리고 자네가 큰 공을 세웠으니 자네 아버지의 이름도 영원한 철(먼터무)처럼 길이 남을 걸세."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입니다."
"자, 비가 더 거세지고 있어. 빨리 들어가세."
"예, 대군."
회한 가득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걸음을 옮기는 동권두의 뺨을 타고 빗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