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00화
200화
1434년 5월 초순 모일.
심양성.
동쪽과 남쪽의 무너진 성문으로 거의 동시에 정로군과 회경군이 진입한 이후, 심양성 안 곳곳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냥 들어가지 말고 질려포통을 먼저 던져넣고 들어가라!"
골목으로 진입하려다 화살을 맞고 쓰러진 회경군 병사를 다른 병사들이 뒤로 운반해가는 동안, 그렇게 외친 군교가 시범이라도 보이듯 질려포통 심지에 불을 붙여서는 힘껏 던졌다.
건물을 넘어 골목으로 날아간 질려포통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여진족 병사들이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다! 돌입!"
산탄총 포수들이 골목을 꺾어 돌자마자 안쪽을 향해 총을 쏘았다.
"됐습니다! 앞쪽에 서 있던 놈들은 확실히 다 죽었습니다!"
"좋아, 연기가 다 걷히기 전에 살수들하고 같이 돌입한다! 너희도 장전되는 대로 따라 들어와라! 스님! 다친 애들 잘 부탁합니다!"
"알겠소! 부디 몸조심하시오!"
병사의 몸에서 화살을 조심히 뽑아내던 군승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군교가 병사들을 이끌고 골목으로 뛰어들어 갔다.
* * *
심양성 사방에서 이런 난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오돌리부의 버일러인 판차는 혼자서 골목을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오돌리부가 화약과 대포 운용을 전담하다시피 한 덕에, 전투 시작 전에 오돌리부 병사들은 성문과 성벽 위에 대포가 배치된 곳마다 나눠서 배치되었다. 그 탓에 판차의 주변에는 원래도 병사들이 많지 않았는데, 회경군이 남쪽 성문을 무너뜨린 직후 제압을 위해 쏟아부은 포탄을 피하기 위해 다급하게 이동하다가 그만 아예 낙오해 버리고 만 것이다.
'오돌리부 병사들은 성벽 전체에 걸쳐서 흩어져 있었고, 그마저도 조선과 명나라가 우리 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집중적으로 포격한 탓에 많이들 죽고 다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생존자들을 모은다면 승산까지는 없더라도 탈출은 할 수 있을 것이야.'
판차가 조심스럽게 걸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한참 앞에 보이는 골목 교차로에 창을 든 호이파부 병사 하나가 보였다.
근접전에 익숙한 우디거 출신이니 시가전에서도 호위를 맡길 만하다고 생각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가려던 판차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호이파부 병사가 판차 쪽에서는 각도상 보이지 않는 골목을 향해 창을 겨눈 상태로 천천히 뒷걸음질 치고 있던 것이다.
'대체 뭐지? 총알이나 화살이 날아올 상황이면 저렇게 있을 리가 없는데?'
판차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호이파부 병사가 뒷걸음질 치며 바라보던 골목에서 석주중대 병사가 계림도를 뽑아 앞으로 겨누고 천천히 나온 것이다.
'근접전에서는 무기가 긴 쪽이 유리하다. 정 안되면 내가 화살을 쏘아 도와주면 된다. 둘 다 내가 있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피하지는 못할 것이야.'
그렇게 생각한 판차가 허리춤에 찬 활로 손을 조심스럽게 가져가는데, 석주중대 병사가 갑자기 거리를 좁혔다. 호이파부 병사가 창을 찔러 대응하려 했지만, 석주중대 병사는 계림도로 창대를 슬쩍 밀어 올려 공격을 빗나가게 하더니, 그대로 창대를 타고 파고들어 와서는 칼끝을 호이파부 병사의 얼굴에 힘껏 찔러넣었다.
무기 간의 상성이 무색하게도 호이파부 병사가 순식간에 당하는 것을 보고 침을 꿀꺽 삼키며 조용히 뒤로 돈 판차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회경군 병사 몇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이 비웃듯 말했다.
"저 친구들이 칼을 잘 쓰긴 하지만, 전쟁터에서 너무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안 되지."
판차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모든 골목에서 회경군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방을 쭉 둘러보던 판차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포위되었군요. 그런데 어째 다들 아는 얼굴입니다?"
"다행히 얼굴을 잊지는 않은 모양이군. 그러면 내 얼굴도 잊지 않았겠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뒤돌아본 판차의 얼굴이 구겨졌다. 조금 전 호이파부 병사가 죽은 쪽 골목에서 동권두가 기병 몇 기를 대동하고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아구……!"
판차에게 자신의 여진족 이름을 불린 동권두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역시 기억하고 있군.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네놈도 다 아는 얼굴일 게다. 네놈이 내 아버지를 해치고 오돌리 부족장의 자리를 빼앗던 그날 너에게 가족을 잃은 오돌리 부족원들이니까. 너를 발견하자마자 죽여 버릴 수 있었음에도 고맙게도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구나."
동권두의 그 말에 병사 하나가 말했다.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저희는 저놈의 최후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그때 별안간 판차가 소리를 질렀다.
"빼앗은 게 아니야! 원래 내 것이야 하는 걸 되찾아 온 것뿐이다!"
눈을 부릅뜬 판차가 동권두를 노려보며 거듭 외쳤다.
"오돌리 부족에는 조선 밑에 들어가려고 하는 나약한 부족장이 아니라, 제대로 부족을 이끌 강한 부족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네가 부족을 제대로 이끈 결과가 야르하치 밑에 들어가는 거였나? 큰 나라인 조선 밑에 들어가는 것보다, 표범 가죽 모자 쓰고 다니는 오랑캐 밑에 들어가는 게 더 나약한 것 같은데?"
"으하하하하!"
동권두의 말에 병사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얼굴이 시뻘게진 판차가 뭐라 더 외치려는데, 동권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끄러우니 그만 짖어 대라. 마침 판차 네놈에게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줄 선물이 있다."
"선물이라고? 뭐지?"
"가져오게."
판차가 불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동권두를 따라왔던 기병 하나가 앞으로 나오더니 안장 뒤에 싣고 있던 것을 바닥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 것은 사람이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보던 판차가 이윽고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부하투!"
자기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오는 판차를 향해 동권두가 재빠르게 화살을 쏘았다. 바람을 찢는 듯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은 판차의 무릎에 적중해 박살을 냈다.
무릎이 반대로 꺽인 판차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조선의 활이다. 엄청나게 강하지? 깍지를 안 끼고 쏘다가는 손끝 살점이 날아갈 정도라고 하더구나."
"부하투우우!"
"참 좋은 소리로군."
무릎이 터져 나간 상황에서도 계속 부하투를 부르는 판차를 비웃으며, 동권두가 부하투에게 걸어가 옆구리를 걷어찼다.
"으으윽!"
고통에 꿈틀거리는 부하투의 온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옷 곳곳이 피로 젖어 있었고, 손끝에는 손톱은 하나도 없고 피딱지만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판차를 내려다보며 동권두가 말했다.
"약한 놈이야. 손톱을 하나 뽑을 때마다 비밀을 하나씩 불더구나. 덕분에 우리가 이 성을 쉽게 함락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놈이 너를 잡게 도와준 셈이야."
'사실은 끝까지 입을 다물고 버텼지만, 이렇게 말해야 판차 놈이 더 고통스러워하겠지.'
예상대로 판차의 얼굴에 절망감이 비치자 동권두는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판차 네놈 잘못이다. 이름을 부하투(야크)라고 지으니 이름대로 된 것 아니냐. 모우(야크) 주제에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을 들이받고 다녔으니 잡혀서 매질을 당한 것이고, 이제 목이 잘려 내걸릴 것이다."
"안 된다, 부하투!"
동권두의 말에 판차가 기어서라도 부하투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걸어온 병사가 판차의 무릎이 박살 난 쪽 발을 콱 밟았다. 몸을 앞으로 힘껏 끌어당기는 순간 발을 밟힌 탓에, 박살 난 무릎이 위아래로 잡아 당겨지며 사방으로 핏방울을 튀겼다.
"으아아아악! 아아악!"
무릎을 생으로 뜯어내는 듯한 고통에, 판차는 더 기어가려고 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서 울부짖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계속 울부짖는 판차를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동권두가 말했다.
"자기 자식과 자기 고통에는 그렇게 괴롭게 울부짖을 줄 아는 놈이, 내 아버지를 해치고 내 아우 충샨을 해쳐 그 옆에 던지면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느냐?"
경멸 가득한 시선으로 판차를 한참 보던 동권두는 이내 고개를 들고 병사들에게 말했다.
"고맙다. 너희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대장께서 잘 이끌어 주신 덕분에 저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요."
"그리 생각해 주니 더 고맙구나. 뒤는 너희에게 맡긴다. 난 이걸 저놈에게 보여 준 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말하며 부하투의 옆구리를 다시 걷어차는 동권두에게 병사 하나가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난 머리가 좋지 않아서, 세상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비참한 최후라는 게 어떤 것인지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너희가 하나씩 떠올려서 저놈에게 조금씩 해주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대장."
병사들이 하나둘 판차 주변으로 모이는 것을 회한 가득한 표정으로 보던 동권두에게, 조금 전 말에 부하투를 싣고 왔던 기병이 작게 말을 걸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네. 판차 저놈이 저지른 짓을 그대로 되돌려 복수해줄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해. 이게 다 자네가 그날 우연히 목격한 것을 나에게 알려준 덕분이야. 정말 고맙네."
동권두는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내가 직접 죽여야 할, 아버지와 아우의 직접적인 원수는 따로 있네. 이제 그놈을 찾아야지."
그 순간이었다.
"그놈 여깄다!"
반쯤 무너져있던 근처 담벼락을 통째로 무너뜨리며 무타우타가 튀어나왔다. 멧돼지를 방불케 하는 기세로 돌진해 온 무타우타는 동권두가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반대쪽 담벼락까지 밀어붙이고는, 손에 든 단검으로 동권두를 찌르려 들었다. 동권두가 무타우타의 단검을 든 손목을 붙잡고 버텨 보았지만, 워낙 짐승 같은 괴력이라 칼끝은 점점 동권두의 얼굴로 다가왔다.
'이걸로 끝인가? 복수를 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원수의 손에 나까지 죽는단 말인가?'
무타우타가 튀어나오자마자 반사적으로 활을 꺼내든 병사들이 무타우타를 향해 화살을 쏘았지만, 두툼한 철편으로 만든 무타우타의 갑옷에 거의 다 튕겨 나가버렸고, 그나마 박힌 화살도 무타우타에게 별 충격을 주지 못했다. 병사들이 무타우타를 떼어내려고 다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타우타는 씨익 웃더니 칼을 든 손에 힘을 더 주며 말했다.
"늦었어."
그때였다. 또렷하고 큰 총성과 함께 무타우타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투구가 두꺼운 탓에 뚫리지는 않았지만,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은 무타우타는 칼을 떨어뜨리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무슨……."
동권두가 총소리가 들린 쪽을 보자, 조금 전까지 무타우타의 거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정면 성벽 위에서 작게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
"천보총이다!"
"대장! 괜찮으십니까?"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부하들의 외침에 동권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전까지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탓에 아직 채 진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고맙다는 듯 천보총 포수 쪽으로 손을 흔든 동권두는 휘청거리는 무타우타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 판차를 보던 싸늘한 표정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귀기 서린 그 표정에 부하들마저 놀란 표정이 될 정도였다.
"무타우타아아아아!"
분노와 증오가 가득 담긴 동권두의 외침이 골목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