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99화 (199/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99화

199화

1434년 5월 초순 모일.

심양성 남쪽. 회경군 지휘부.

정로군의 돌파실패 이후, 양녕을 비롯한 회경군 수뇌부들은 긴급하게 모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뚫릴 것 같다고 문을 아예 터뜨려서 막 아버리다니, 정말 독한 놈들입니다. 정로군이 입성을 먼저 하긴 했지만, 결과만 보면 병사들만 잃고 만 셈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놈들이 한 번 성공해 봤으니 앞으로도 성문이 뚫릴 것 같으면 터뜨려 무너뜨리려 들 겁니다. 이거 참, 다른 문으로도 입성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군요. 기껏 뚫고 들어가 봤자 무너져 버릴 것 아닙니까."

김종서와 황보인의 말을 듣던 양녕이 가만히 말했다.

"성문이 무너져내릴 걱정 없이 입성할 방법은 있소."

양녕의 말에 황보인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떤 방법입니까?"

"우리가 무너뜨려 버리는 것이오. 한 번 무너져내린 게 또 무너지지는 않을 것 아니오."

예상 밖의 말에 적잖이 당황한 황보인이었지만 침착하게 양녕에게 물어보았다.

"무너지면 성문이 막혀서 못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성문으로야 못 들어가지만, 무너지면 비탈이 생길 것이니 거길 타고 올라가면 되지 않소. 성벽은 워낙 높은지라 무너져 비탈이 되더라도 상당히 가파르겠지만, 성문은 밑이 비어서 그만큼 벽돌이 없으니 무너졌을 때 성벽만큼 가파르지는 않을 것이오."

이어서 김종서도 질문했다.

"그럼 성문은 어떻게 무너뜨립니까?"

"놈들이 화약으로 성을 무너뜨렸으니, 우리도 화약을 써서 무너뜨리면 되지 않겠소? 직접 화약을 성문에 넣고 터뜨릴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대포도 많고 화약도 많으니 포탄으로 깨서 무너뜨리면 될 것이오."

김종서와 황보인은 양녕의 대답을 듣고 한참이나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말했다.

"괜찮은 방법입니다. 제아무리 철옹성이라 해도 대포로 쏴대면 안 무너지고는 못 배기겠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비탈을 올라가는 게 쉽지는 않고 적들도 막으려 들겠지만, 그것도 대포로 제압하고 총으로 엄호하면서 올라가면 될 겁니다. 그럼 저는 바로 가서 포격을 개시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에 양녕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 제안을 받아들여 줘서 고맙소. 그럼 어디 여진족 놈들에게 '이것이 조선의 방식이다' 하는 것을 보여 줍시다."

* * *

다음 날 오전.

심양성 남쪽. 회경군 전방.

아침부터 포격을 지휘하고 있던 황보인은 후방에서 양녕이 오는 것을 보고 인사하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대군. 대군께서 계시던 곳에도 포성이 들렸을 텐데, 간밤에 잠을 설치시지는 않았나 걱정입니다."

밤이 되면서 시야가 어두워진 것은 물론이고 성문을 무너뜨리더라도 돌격해 들어가기가 어려워져 포격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차는 미리 성안을 조준해 놓고 있다가 새벽에 몇 번 발사했는데,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괜찮소. 난데없이 쏜 것도 아니고, 새벽에 화차를 쏘아 적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야습할 정신이 없게 만들고, 잠도 제대로 못 자게 하겠다며 미리 전군에 알려두었던 것이지 않소. 밤에 자다가 화차 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여진족 놈들이 호되게 당하는 것이 떠올라 오히려 즐겁게 푹 잤소이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포격 상황은 어떻소?"

"역시 벽돌로 지은 성이라 포격에 강하긴 한 모양입니다. 이맛돌(홍예문 곡선부 제일 윗부분에서 힘을 받는 돌) 자리만 노리고 계속 쏴서 저렇게 됐는데도 아직도 버티고 있습니다."

황보인이 그렇게 말하며 성문 위쪽을 가리켰다. 이맛돌에 해당하는 자리만 집중적으로 포격 당해 그 부분 벽돌이 다 쏟아져 내리다시피 했고, 그 탓에 홍예는 뒤틀리고 윗부분은 큰 균열이 생겨 반으로 갈라져 있었지만, 성문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정말이구려. 대체 저런 단단한 걸 여진족 놈들은 어떻게 무너뜨린 것인지 모르겠소."

"원래 저런 큰 문에는 적이 성문에 접근했을 때 끓는 물이나 기름을 부어 공격하려고 만든, 문루 바닥에서 문짝 위까지 이어지는 구멍이 있는 법이지 않습니까? 아마 거기다 화약을 집어넣고 터뜨린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소. 하긴, 아무리 단단한 물건이라도 속에서부터 폭발하면 견뎌 낼 재간이 없지."

"이러다가는 자원자를 받아서 성문 기단 쪽에 폭탄을 설치하고 와야 겨우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 안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이미 무너져가고 있으니 우선은 좀 더 포격해보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래서 말인데 방금 공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생각난 방법이 있소."

"무엇입니까?"

"비격진천뢰에서 쇳조각을 빼고 화약으로 가득 채운 다음, 성문 위에 쌓여있는 무너진 문루의 잔해에 날아가 박히도록 쏘는 것이오. 저 속에 아예 화약을 집어넣고 터뜨리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가까이서 화약이 터지는 충격을 주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지 않겠소?"

"오, 그거 괜찮은 방법입니다. 바로 해 보겠습니다."

황보인은 눈을 빛내며 바로 군관들을 통해 지시를 내렸다. 한참 뒤 내용물을 전부 화약으로 채운 비격진천뢰가 하나둘 쌓이자 황보인이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방포하라!"

뒤이어 우렁찬 포성과 함께 비격진천뢰가 발사됐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비격진천뢰는 성문 위에 쌓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루였던 벽돌 더미에 박혔고, 잠시 뒤 사방으로 벽돌 조각을 날리며 폭발했다.

그 충격에 홍예가 돌가루를 쏟아내며 더 비틀리고 균열도 더 커지는 모습을 본 황보인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걸 보십시오. 성벽에 큰 충격이 갔습니다. 이렇게 화약만 채운 비격진천뢰는 성벽처럼 단단한 것을 공격하는 데 효과가 있군요."

"그러게 말이오. 기대 이상이구려. 이대로 계속 포격하면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오. 그러면 나도 후방에 돌아가 돌파 준비를 슬슬 해야 할 것이라 전달하겠소."

* * *

한참 뒤.

심양성 남쪽. 회경군 전방.

문루가 무너져내린 충격과 계속된 포격, 그리고 비격진천뢰가 폭발하는 충격을 견디지 못한 성문은 마침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성문을 이루고 있던 벽돌들이 마치 모래알이 쏟아지듯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위에 있던 문루의 잔해도 따라서 흘러내리며 뿌연 흙먼지를 피워 냈다.

그 광경을 보던 황보인이 말했다.

"정말 장관이로군. 저 흙먼지가 가라앉고 천보총 사수들이 사격을 할 수 있게 되면 자네들 차례네. 준비하고 있게나."

"예, 장군."

"물론입니다."

돌파를 위해 전방에 나와 기다리던 등자사와 동권두가 대답한 그때, 저 멀리 심양성 동쪽에서 저번보다도 크게 함성과 흙먼지가 일어났다. 그쪽을 바라보던 황보인이 말했다.

"아무래도 정로군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한 것 같군. 하긴, 저쪽 성문은 안에서부터 터져서 아주 크게 무너졌으니, 우리보다 비탈도 완만하겠지. 결국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첫 입성은 저쪽이 가져가는군."

다시 정면을 본 황보인은 점점 가라앉아가는 흙먼지를 바라보며 외쳤다.

"저쪽이 실제로도 먼저 입성한다면 우리도 더 기다릴 이유가 없지! 선두 돌파 준비! 이대로 밀고 들어간다!"

"와아아아아!"

우렁찬 함성에 뒤이어 화차가 굉음을 내며 화살을 쏘아냈다. 무너진 성문 위에서나마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달려온 여진족 병사들의 머리 위로 화살이 쏘아지는 동안 회경군 돌파부대의 선두가 빠른 걸음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선두부대는 산탄총으로 무장한 병사들과 계림도로 무장한 석주중대에 더해서 석주중대와 계속 호흡을 맞춰온 회령중대로 이루어졌다.

칠주도 정벌 최후의 전투인 오키타 전투에서 그 위력이 검증된 조합이었다.

"좋아, 선두가 성문에 거의 도착했으니 이제 다음 단계다! 전원 돌파 준비!"

이어서 태평소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가운데 나머지 병사들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조총이나 활, 창 등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대다수였지만, 노획한 말을 타고 한데 모여 전진 중인 회령중대 병사들도 제법 섞여 있었다.

"회령중대 기병들은 달아나는 적 중요 인물들을 추격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으니 괜히 잡졸들과 싸우다가 다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다른 병사들은 비탈을 다 올라가는 대로 좌우로 퍼져서 성문과 그 주변 성벽까지 완벽하게 점령하도록! 거기까지 끝나면 천보총 사수들도 잠시 엄호를 멈추고 빠르게 성벽으로 올라간다. 거기서 성안을 감시하며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도록!"

"예!"

지시를 내린 황보인은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는 생각에 진지한 표정으로 성문을 바라보았다.

* * *

같은 시각.

심양성 남쪽. 회경군 지휘부.

양녕과 김종서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비탈 위에서 흰 연기가 퍼져 나올 때마다 산탄총이 발사된 것임은 알 수 있었고, 연기가 퍼지는 빈도가 잦았기에 전투의 치열함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저 먼 곳에서 굉음이 들렸다.

"심양성 쪽에서 들렸습니다. 여진족 놈들이 성문을 또 무너뜨리기라도 한 걸까요?"

김종서가 궁금해하는데 이번에는 심양성 건너 북쪽 허공에서 빨간 불꽃이 터졌다. 옆에 있던 이징옥이 그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이런, 아무래도 심양성이 위험해지니까 적 기병대가 또 습격해온 모양입니다. 빨리 가 봐야겠군요."

그렇게 말한 이징옥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같은 자리에서 빨간 불꽃이 또 터졌다. 다들 무슨 상황인가 싶어 가만히 불꽃만 보고 있는데, 무언가를 눈치챈 양녕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큰일이오! 야르하치가 탈주하려는 것이 분명하오!"

그 말에 다들 상황을 이해하고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저렇게 쉴 새 없이 터뜨리는 것을 보면 정말로 기병여단이 필요한 상황일 겁니다!"

"기병대도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임금인 야르하치를 빼내려 할 것이니, 기병이 없다시피 한 정로군으로는 막기 힘듭니다!"

"만일 놓치기라도 하면 따라잡기가 어렵소. 지금 당장 모든 기병을 다 보내서 탈주를 막아야 하오!"

양녕의 그 말에 김종서가 약간 당황한 듯 말했다.

"하지만 지금 병사들 대부분은 물론이고 항상 대군 곁에 있던 계호대대까지도 심양성을 공격하러 간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기병까지 전부 빠져버리면 대군을 호위할 병력이 없습니다."

"호위할 병력은 많으니 괜찮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한 양녕은 성큼성큼 걸어가 자신의 말에 올라타더니 이어 말했다.

"나도 같이 가겠소. 움직이면서 호위를 받으면 되는 것 아니오."

"하오나 대군……."

"나는 태조대왕의 손자이고 아바마마의 아들이오. 말 타고 달리는 데에는 자신이 있소. 그리고 대열의 중심에서 갈 것이니 크게 위험하지도 않을 것이오. 무엇보다도 지금은 내가 몸을 사릴 여유가 있을 만큼 가벼운 상황이 아니지 않소."

결의에 찬 양녕의 표정을 보고, 잠시 망설이던 김종서가 마음을 정한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 근처에 계속 있으셔야 합니다."

"물론이오. 그럼 어서 출발합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가 궁금한 것처럼, 양녕의 말이 귀를 앞으로 바짝 세우고 먼 북쪽을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