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98화
198화
"공적을 넘겨주시다니……. 공성전에서는 성벽에 가장 먼저 오르거나 성문을 가장 먼저 뚫고 올라가는 것이 가장 큰 공이지 않습니까."
"알고 있소. 그렇기에 넘겨준 것이오. 어차피 우리가 큰 공을 세워 봤자 명나라가 원정에 도움이 되었다며 큰 상을 주지는 않을 것이오. 명나라가 주도한 원정인데 원군으로 온 회경군이 병력은 더 적으면서도 더 큰 공을 세웠으니, 체면 때문에라도 공을 깎아내리려 들겠지. 설령 공을 전부 인정해 준다고 하더라도 회경군의 전투력을 본 명나라가 조선을 경계하고 견제하려 들 거라는 건 확실하지 않소."
양녕의 말에 황보인이 끄덕였다.
"그건 그렇습니다."
"게다가 처음으로 입성하는 게 공으로 여겨지는 건 그게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지 않소. 괜히 공을 세우려다가 우리 병사들만 상할 수 있소. 마침 경략사도 크고 작은 실패를 거듭한 탓에 공적에 목마른 상황이니, 위험한 일을 맡기고 명나라의 견제도 피하고자 첫 입성을 떠넘기는 것이지만, 경략사는 회경군이 공적을 세울 기회가 있음에도 양보해 주었다 생각할 것이오."
"위험한 일을 시키면서도 역으로 빚을 지우신 것이군요. 그리고 정로군이 큰 피해를 보면서 입성하고, 또 그걸 막으려 여진족 병력이 그쪽 성문에 집중되면 그 틈을 타서 회경군 쪽 성문을 뚫고 들어가면 확실히 우리 피해도 적겠습니다."
"맞소.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맡은 쪽만 돌파하는 데 성공하면 할 만큼 한 것이지 않소. 대신 그렇다고 정로군이 입성할 때까지 마냥 기다리다가 부랴부랴 뚫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 슬슬 시작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양녕과 대화를 마친 황보인은 전장을 찬찬히 살핀 후 일갈했다.
"화차, 방포!"
황보인의 우렁찬 호령에 화차를 맡은 병사들이 심지에 불을 붙였다. 쭉 늘어선 화차들에서 동시에 심지가 타들어 가고, 이어서 수백 발의 화살이 공기를 찢어내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가르고 날아갔다.
이윽고 심양성 남쪽 성벽 위로 비처럼 쏟아진 화살들은 회경군의 포격으로 깨진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 모여있던 여진족 병사들을 고슴도치로 만들어버렸다.
"역시 효과가 대단하오."
"그렇습니다. 비록 불발탄이 생기고 그게 만약 여진족이나 명나라 손에 들어가면 기술이 새어 나갈 수 있어서 신기전과 인화살은 쓸 수 없지만, 화차에서 일반 화살을 쏘아대는 것만으로도 적들의 사기를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하니까요."
그 말에 양녕이 끄덕였다. 성문을 지키기 위해서 원래부터 와 있던 여진족 병사들은 물론이고, 포격으로 손상된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서 추가로 병사들이 성벽에 모였을 시점을 노려서 화차를 발사한 터였다. 화살에 맞아 죽는 병사들과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하는 여진족 병사들은 지금 양녕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을 터였다.
"그렇소. 그러니 앞으로도 화차는 꾸준히 쏘되, 연달아서 말고 적당히 간격을 두어 가며 쏴야 할 것이오. 그러면 놈들은 언제 머리 위에 화살이 쏟아질지 몰라서 제대로 돌아다닐 수 없고, 사기도 꾸준히 떨어질 것이오."
"예. 만일 성벽 위에 적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되면 조준을 약간 멀리해서 화살이 성안에 쏟아지게 만들겠습니다."
"좋소. 어차피 명나라가 입성하는 순간 화차 사격은 멈춰야 하니 그때까지만 꾸준히 쏘면 될 것이오. 그럼 난 이만 돌아가 보겠소."
"예, 대군."
양녕이 후방으로 돌아가자 황보인은 다시 심양성 남쪽 성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침 날아간 포탄 하나가 성문 위에 높이 솟은 문루의 벽을 부수고 들어갔지만, 문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황보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벽돌로 지어서 그런지 잘도 버티는군. 놈들이 저 문루를 전부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숫자가 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야."
성곽의 모서리 부분과 성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성의 약점이다. 모서리는 적이 달라붙었을 때 위에서 공격하기에 각도가 잘 맞지 않아 어렵다는 문제가 있고, 성문은 애초에 열리기 위한 구조물인지라 방어력에 한계가 있다.
중국식 성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바로 모서리와 성문 위에 높게 쌓은 문루였다. 십여 층이 넘는 문루의 창문마다 궁수를 한 사람씩만 두고 접근하는 적에게 한 발씩만 쏘더라도 수십 발이 되고, 적이 가까이 붙었을 때 돌을 하나씩만 떨어뜨리더라도 아래에서는 그야말로 돌의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저 문루가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무사히 입성할 수 없다! 문루에 포격을 더 집중해라!"
* * *
1434년 5월 초순 모일.
심양성 남쪽.
성문 위에 있던 문루는 쉴 새 없이 집중된 회경군의 포격에 결국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같이 포격을 얻어맞은 문루 좌우 성벽 역시 제대로 위를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드디어 무너졌군! 이제 남은 장애물은 문 정면을 가린 저 흙더미뿐이다! 전원 작전 개시!"
황보인의 지시에 포격의 빈도가 약간 줄어들자 여진족 병사 하나가 성벽 위를 지나서 무너진 문루 쪽으로 가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발밑이 엉망인 탓에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했고, 몇 걸음 가지 못해 천보총 사수가 쏜 총에 맞고 그대로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전방에서 대기하던 보병 군교 하나가 외쳤다.
"좋아, 우리 차례다! 성공만 하면 포상이 기다린다! 돌격!"
군교가 소리를 치며 앞으로 달려 나가자 병사 몇이 뒤따라 달렸다. 아무리 대포와 천보총의 엄호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적진 코앞까지 달려가서 흙더미를 제거해야 하는 위험한 임무다. 그래서 강제로 시키는 대신 진급을 포함한 각종 포상을 내걸고 자원자를 모집했고, 지금 달려가는 군교와 병사들은 그렇게 자원한 이들이었다.
"무사히 흙더미까지 왔다! 빨리 파!"
흙더미에 도착한 군교와 병사들은 손에 든 삽으로 흙더미를 미친 듯이 파기 시작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무기마저 두고 왔기에 자신을 지킬 방법이 없으니, 살고 싶으면 최대한 빨리 완수하고 돌아가야 했다.
성벽에서 날아온 화살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자 육두문자를 내뱉으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고 흙더미를 판 덕분에 흙더미에는 금방 큼직한 구멍이 몇 개 생겼다.
"좋아, 간다!"
병사들이 가져온 폭발물 꾸러미를 하나씩 꺼내 들자, 군교가 허리춤에서 성냥을 꺼내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하나, 둘, 셋!"
군교의 구령과 함께 병사들이 일제히 성냥을 켜서 심지에 불을 붙였다. 이윽고 흙더미의 구멍마다 폭발물 꾸러미를 하나씩 집어넣고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뒤로 돌아 회경군 진영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를 노리고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갈지자로 질주한 군교와 병사들이 회경군 진영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 굉음을 내며 흙더미가 폭발했다.
이윽고 높이 솟아올랐던 흙먼지가 거의 가라앉자 황보인이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흙더미가 아예 다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높이는 충분히 낮아졌으니, 이제 대포로 조준할 수 있겠군. 지금부터 성문을 노릴 수 있는 모든 대포는 성문을 조준하고 쏴라!"
"예!"
그때 저 멀리 심양성 동쪽에서 정로군 병사들이 큰 함성과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성문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정로군이 드디어 돌파하려나 보군. 저쪽에서 돌파에 성공하면 우리도 이어서 돌파한다! 우리도 너무 늦지 않게 돌파해야 하고, 이쪽 성문을 지키는 놈들이 저쪽을 도우러 갈 여유를 줘서도 안 되니 포탄을 더 쏟아부어라!"
* * *
같은 시각.
심양성 동쪽.
성문까지 병사들을 이끌고 온 정로군 장수는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이미 이 문짝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처음으로 뚫고 들어가는 자는 큰 상을 내릴 것이니 어떻게든 뚫어라!"
이미 너덜너덜해진 성문이었지만, 안에서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성문 곳곳에 구멍이 뚫린 것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는데, 잊을 만하면 그 구멍을 통해 밖으로 진천뢰가 던져진 탓에 폭발을 피해 우르르 흩어지느라 공성이 멈추곤 했던 것이다.
"왜 제대로 된 옹성도 없는데 이리도 성문이 안 뚫린단 말인가. 충차라도 만들어 와야 한단 말인가?"
장수가 짜증을 내며 혀를 차는데 옆에서 병사 하나가 외쳤다.
"문이 움직입니다! 열리려나 봅니다!"
그 말에 장수가 환한 얼굴로 성문을 보았지만, 일어난 일은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안에서 성문 연결부를 통째로 부수고 문짝을 밀어버린 탓에, 거대한 문짝으로 앞으로 쓰러지며 정로군 병사들을 덮친 것이다. 그 광경에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진 장수가 악을 쓰듯 외쳤다.
"열렸으면 들어가! 맨 처음 들어가는 자는 포상을 주고 군역도 면해 주겠다!"
문짝이 코앞에서 넘어져 잠시 굳어있던 정로군 병사들이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조금 전 같이 싸우던 이들이 밑에 깔린 것은 상관도 하지 않고 문짝을 밟고 성문 안으로 우르르 뛰어 들어갔다.
"좋아, 쭉쭉 들어가는군. 그대로 들어가자마자 좌우 계단으로 올라가서 성문을 완전히 점령해라! 그러면 나도 너희도 큰 포상을……."
장수가 외치는 소리는 별안간 들린 묵직한 폭음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폭음과 동시에 성문 윗부분이 그대로 무너져내리며 아래 있던 병사들을 그대로 덮쳤다. 몇 걸음 차이로 화를 면한 병사들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뒷걸음질 치고, 장수도 경악한 표정으로 무너진 성문을 바라보았다.
성문 위에 있던 문루까지 같이 무너지면서 일어난 흙먼지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장수는 몇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무너진 성문에 깔린 병사들은 죽었고, 성문이 무너지며 안에 고립된 병사들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 * *
심양성 동쪽. 정로군 진영.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두 눈으로 본 경략사는 당황과 경악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독한 놈들! 뚫릴 것 같으니까 성문을 터뜨려서 아예 막아 버렸단 말인가?"
옆에 있던 한 총병관이 말했다.
"큰일입니다. 병사들이 깔려 죽고 안에 고립된 거야 그렇다 치고, 이제 저 문으로는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경략사는 양녕에게 물어보고 싶은 듯 회경군 쪽을 슬쩍 보았지만, 이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여기가 무너졌다고 우리가 다른 쪽으로 옮기면 그게 놈들이 원하는 일일 것이오. 이쪽 성문을 막던 병사들을 다른 세 곳으로 나눠 보내서 돕게 할 수 있지 않소."
"그렇……."
"후방에 적 기병대 급습!"
총병관의 대답 대신 적의 습격 소식이 들리자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분노에 경략사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우리 병력이 성문을 돌파하러 분산되고 방진이 허술해진 틈을 노렸구나! 뭐 하느냐! 빨리 도움을 요청해!"
경략사의 외침에 병사 하나가 부랴부랴 신호용 화살의 심지에 불을 붙인 다음 하늘로 쏘아 올렸다. 여진족 기병대에 습격당했을 때 이것으로 신호하면 회경군 기병여단이 가서 도와주겠다며 회경군이 준 것이었다.
이윽고 저 높은 곳에서 새빨간 불꽃이 터졌지만, 지난 몇 번의 습격에서 그게 조선군을 부르는 신호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적 기병대는 잽싸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빌어 처먹을 여진족 놈들아! 도망가는 길에 벼락이나 맞아라!"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경략사를 비웃듯, 적 기병대는 이미 느긋하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