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97화
197화
1434년 5월 초순 모일.
심양성 남쪽. 회경군 주둔지.
정로군과 회경군이 성의 사면을 포위하고 며칠이 지났다. 양녕은 앞으로의 작전을 상의하기 위해 방문한 경략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다면 경략사께서는 앞으로 한동안은 이렇게 포위한 상태로 지켜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지금이 마침 농사철이지 않습니까. 놈들이 작년에 얼마나 수확을 해서 쌓았는지는 모르지만, 겨울을 지내면서 식량을 적잖이 먹어 없앴을 겁니다. 그러니 보급이 추가로 들어가는 것만 막으면서 포위만 잘 유지하면 말려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뭐 그것도 일리가 있지만, 놈들도 그걸 대비해서 여기에 식량을 많이 비축해 두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일단 포위를 하려는 이유가 혹시 따로 있습니까?"
양녕의 질문에 경략사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사실 어제 성벽을 어떻게 조준해야 하는지, 화약은 어느 정도 써야 적당할지를 확인하고자 성벽에 대포를 한 번 쏴 보았습니다."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거기서 뭔가 있었습니까?"
"시험 삼아 쏜 포탄이 성벽 위쪽에 적중해 일부가 약간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화포로 공격하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오늘 보니 하루 만에 깔끔하게 수리되어 있더군요. 대체 어디서 그렇게 재료를 금방 구한 것인지……."
"여진족들이 점령한 성의 주민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시킨 것은 이미 알려져있지 않습니까. 한때 조선과 명나라를 갈라놓기 위해 삼한 혈통 백성들은 남겨 두었지만 이간질이 먹히지 않았으니, 비축해 둔 물자를 최대한 오래 쓰고자 삼한 혈통 백성들도 다른 곳으로 다 이주시켰겠지요."
"그렇게 생긴 빈집의 벽돌을 헐어다 쓴단 말씀이시군요. 그럼 재료는 넘쳐나겠습니다."
경략사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돌로 된 성벽은 단단하긴 하지만 벽을 이루는 석재 중 하나가 깨지면 그대로 전부 무너질 우려가 있다. 하지만 벽돌 성벽은 단순히 말하면 구운 흙덩이를 흙으로 붙여가며 쌓은 것일 뿐이라, 포탄에 깨지더라도 그 부분만 깨질 뿐이었다. 게다가 그 부분을 떼어 버리고 새 벽돌로 다시 쌓아 수리하기도 쉬웠다.
그 장점이 지금은 역으로 정로군과 회경군을 괴롭히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적들이 성벽을 쉽게 수리하는 것을 보고 일단은 포위를 유지하시기로 하신 겁니까?"
"예. 어설프게 쏴봤자 포탄과 화약만 낭비할 뿐이니까요. 만일 공격하려 한다면 성 사면에서 동시에 멈추지 않고 공격해야 놈들이 수리할 시간을 주지 않고 성을 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적들도 비축을 많이 해 뒀을 것이고, 우리라고 보급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너무 오래 끌면 안 좋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포위하고 있는 동안 계획이 있습니다."
약간 자신 있어 보이는 경략사의 표정을 보고 양녕이 물었다.
"계획이라니요?"
"포위를 유지하는 동안 투석기를 만들어서 돌을 날릴 생각입니다. 인력으로 당기는 것이니 화약도 쓰지 않고, 돌은 널려있으니 포탄도 쓰지 않지요. 그것으로 꾸준히 성벽을 부수는 것입니다."
"화포로 깬 것도 고치는데 투석기로 깬 것은 더 금방 고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꾸준히 깨다 보면 언젠가는 수리가 안 될 만큼 크게 깨지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게다가 조금 전 대군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놈들이 집을 헐어다 수리하는 것이라면, 성안에 집이 무한정 있지는 않을 테니 놈들이 계속 수리를 하더라도 언젠가는 재료가 없어서 한계가 오지 않겠습니까?"
"잘 되면 좋겠군요."
양녕은 어딘가 좀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경략사는 드디어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들뜬 표정이었다.
* * *
1434년 5월 중순 모일.
심양성 남쪽. 회경군 주둔지.
경략사의 지시로 정로군이 투석기를 만들어 사용한 첫 며칠은 성벽도 제법 부수고, 가끔 운 좋게 세게 당겨지면 돌이 성벽을 넘어가 성 안쪽을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석기가 성능에 비해 구조가 너무 간단했던 것이 문제였다. 며칠 뒤 여진족 병사들이 정로군이 쓰던 것보다 크기는 좀 작지만 구조는 같은 투석기를 성벽 위에 만들기 시작했고, 그 투석기로 돌과 진천뢰를 던져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정로군은 물론이고 회경군도 어쩔 수 없이 상대 투석기의 사거리 바깥으로 진영을 물려야 했으니, 투석기 사용은 차라리 안 시작하느니만 못한 일이 되고 말았다.
"오늘은 어떤 내용을 상의하러 오셨습니까?"
또 실패를 겪자 경략사의 양녕에 대한 의존은 더 커져 버렸고, 오늘도 무언가 꾸러미를 들고 양녕을 찾아온 참이었다.
"성에서 몰래 나와서 저희를 정탐하던 놈을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놈의 짐에서 이상한 게 나와서, 이게 뭔지 대군께 여쭤봐야겠다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무엇입니까?"
경략사는 가져온 꾸러미를 탁자에 올려놓고 펼쳤다. 내용물을 본 양녕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지만, 그 모습을 못 본 경략사는 꾸러미의 내용물 하나를 들어 양녕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겁니다. 꼭 밀가루 반죽을 구운 것처럼 생겼는데, 이리 먹지도 못하게 단단하게 구워서 뭐에 쓰려는 건지 모르겠군요."
경략사가 적의 짐에서 나왔다면서 보여준 것은 바로 건병이었다.
'건병 제조법은 내가 5년여 전 동북면을 떠나면서 기병여단장에게 가르쳐 주고 온 것이다. 그게 적들의 짐에서 나오다니! 군량을 보관하는 법으로 가르쳐 준 것이니 백성들에게서 새어 나갔을 리는 없고, 탈영했던 납치당했건 간에 조선군 병사를 통해서 넘어간 것이 분명하다.'
"밀가루를 구운 것이고 병사의 짐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먹는 용도겠지요. 가루를 들고 다니는 것보다 간편하고, 이미 익힌 것이니 그냥 먹어도 됩니다. 단단하긴 하지만 어떻게 쪼개서 입에 넣고 불리면 먹을 수 있겠지요. 그리 좋은 음식은 아니지만 몰래 정탐 다니는 병사들에게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 아니겠습니까."
"대군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역시 농사가 힘든 지역에 사는 놈들답게 별 특이한 보존법을 다 쓰는군요. 대군께서 오늘따라 표정이 피곤해 보이시는데도 제 궁금증을 풀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만 가 볼 테니 편히 쉬십시오."
경략사가 천막을 나가고 잠시 뒤, 옆에 있던 김종서가 굳은 표정의 양녕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철 기술이나 4윤작법도 아니고 건병 제조법이라니. 이건 탈영인지 납치인지는 몰라도 조선 병사가 넘어간 건 확실하군요."
"내 생각도 그렇소. 그리고 화약과 대포를 다루는 법 역시 명나라나 우리나 여진족이 무순성을 약탈하면서 잡아간 포로들을 통해 익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조선 병사를 통해서 익힌 것 같소."
"혹시라도 그 사실이 들키면 분명 조선에 책임을 떠넘길 테니 건병을 대군께서 고안하신 것이라는 얘기는 절대로 하면 안 되겠군요. 차라리 조금 전 경략사가 말한 것처럼 여진족의 보존법이고 그걸 회경군이 배운 것이라 하는 게 낫겠습니다. 그나저나 조선 병사가 넘어갔다니, 정말 큰일입니다."
그 말에 양녕이 끄덕이고 말했다.
"조선 병사들이 아는 것은 건병 만드는 법이나 화약과 대포 다루는 법이 전부가 아니니 말이오. 조선 병사들은 조선군이 어떻게 싸우는지, 병사들이 어떻게 훈련하는지를 잘 알고 있소. 병법의 소양이 있다면 그걸 통해서 병사들을 어떻게 훈련해야 할지 알 수 있고, 조선군의 방식을 익혔으니 조선군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도 알 수 있소. 조선군의 무기가 어떤 것이 있고 어느 정도 위력을 내는지도 물론이고 말이오."
"중요한 무기들은 절대로 여진족과 접한 곳에서는 쓰지 않게 하는 게 이런 상황을 우려해서겠지요. 만일 여진족 놈들이 인화살 같은 무기의 존재를 알고 대비했다면 상황은 더 심각했을 것 아닙니까."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괜찮은 것도 아니오. 놈들이 조선의 병법을 일부나마 흡수했다는 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어차피 투석기가 먹히지 않았고 놈들이 비축 식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해진 상황이오. 이대로 경략사를 찾아가서, 언제까지고 기다려도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으니 성을 공격하기 시작해야 한다 말하겠소."
"지금 경략사가 패배가 걱정되어 수시로 대군께 상담하러 올 정도인데, 아군의 공격이 잘 먹히지 않고 적에게 식량이 있다고 해서 바로 공세로 넘어갈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공세로 넘어가야 할 이유는 충분히 있소. 적들도 지금 자신이 가진 기병만으로는 우리를 제대로 기습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오. 게다가 파종기가 끝나 가고 있지 않소. 농사를 끝낸 청년이 많이 남을 것인데 여진족 사내는 어지간하면 말을 탈 줄 아는 이들이오. 그들을 전부 기병으로 편성해서 공격해오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당할 수 있소. 뭐 이런 얘기를 하면 되지 않겠소?"
그 말에 김종서가 웃으며 말했다.
"공적도 세우지 못하고 패배한다니. 그게 무서워서라도 경략사가 열심히 공세로 나서겠군요."
* * *
며칠 뒤.
심양성 남쪽. 회경군 전방.
양녕의 예상대로 경략사는 적 기병이 늘어나서 습격해 올 수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공세로 나설 결심을 내렸다.
그리고 성 사면의 포위군이 일제히 성벽에 포격을 개시한 첫날, 양녕은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회경군 전방에 와 있었다. 우렁찬 포성과 함께 날아간 포탄이 바로 직전 포탄이 만든 포탄 자국에 정확히 떨어지고, 그 주변 벽돌들이 힘없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 양녕이 마음에 든다는 듯 말했다.
"잘 맞는구려. 꼭 강선을 판 것 같소."
지금 회경군이 쏘는 대포의 사거리와 명중률은 기존의 포보다 확실히 올라가 있었다. 강선을 판 것은 아니지만 강선의 원리를 적용한 덕분이었다.
포탄을 유선형으로 만든 다음, 몸통 뒷부분에 사선으로 깊은 홈을 몇 줄 판 것이다. 뒷부분에 나선형 홈이 생긴 그 포탄을 대포에 넣고 발사하면 폭발하는 화염이 홈을 타고 들어가면서 대각선으로 힘을 주게 되고, 포탄이 회전하면서 강선의 효과를 내는 것이다.
"대군께서 포탄을 개량하신 덕분이지요. 그래서 놈들의 투석기 때문에 뒤로 물러난 상황에서도 명중률이나 위력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행이오. 대신 혹시라도 여진족이 견제하려 쏜 포탄이나 돌덩어리가 바닥에 튕겨서 우리 포병들을 다치게 할 수 있으니, 그걸 막기 위해 포구 좌우에 낮은 흙담이라도 쌓아두면 좋을 것 같소."
"그거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로군은 딱히 포탄을 개량하지도 않았을 텐데 진영을 뒤로 물린 상황에서도 곧잘 대포를 쏘는군요. 그렇다고 사거리나 위력이 떨어진 것 같지도 않고 말입니다. 무슨 다른 기술이 있는 걸까요?"
"화약을 더 넣어서 해결해 버렸다 하더이다. 대신 명중률은 좀 떨어진 모양이오."
지극히 명나라다운 해결책에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던 황보인이 말했다.
"그런 방법이 있군요. 그나저나 이대로 계속 쏘다 보면 곧 성벽도 무력화될 것 같습니다. 성에 돌입하는 것은 언제쯤으로 예상하십니까?"
"며칠 내로 될 것 같은데 장담은 못 하겠소. 확실한 건 정로군이 처음으로 성에 돌입한 다음에야 회경군도 성으로 돌입할 거란 것이오."
"그러면 저쪽에 공적이 넘어가는 것 아닙니까?"
의아해하는 황보인과는 대조적으로, 양녕은 별것 아니라는 듯 시원하게 답했다.
"맞소. 공적을 넘겨주려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