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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96화 (19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96화

196화

1434년 5월 초순 모일.

혼하 북쪽. 심양성 인근 회경군 주둔지.

다행히도 혼하 전투 이후 정로군 병사들을 수습해 혼하를 건너고, 이어서 심양성 근처까지 오는 동안 금나라나 북원 병력이 공격해 오는 일은 없었다.

계호대대 역시 며칠 전 무사히 합류한 덕에 양녕은 한시름 덜고 앞으로의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다.

"대군, 계십니까?"

서류를 들여다보던 양녕은 익숙한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예. 있습니다. 들어오시지요."

천막으로 들어온 것은 경략사였다. 경략사는 양녕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심양성에 도착하지 않습니까. 그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 대군과 논의하고자 왔습니다."

"마침 저도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앉으시지요. 차를 내오라 하겠습니다."

"차를요? 조선에서는 차가 귀한 것 아니었습니까?"

"요동은 조선 땅과는 달리 물에 흙 기운이 섞여 있어서 그냥 마셨다가는 배탈이 날 수 있으니 차를 끓여서 마셔야 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조선에서도 차 농사를 많이 짓는지라 값이 그리 비싸지도 않아서 많이 가져왔습니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경략사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경략사는 지난번 혼하 전투 이후로 양녕을 더 정중하게 대할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상담할 일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곤 했다. 어떻게든 자신이 공적을 더 세우려고 들던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뭐, 그럴 만하지. 이전 경략사가 판단을 잘못해 원정을 그르친 죄로 참수당해서 자신이 경략사로 임명된 것인데, 자기도 이번에 혼하에서 크게 패했으니까. 이번 원정을 더 망쳤다가는 자기도 참수당할지 모르니 회경군에 잘 보여 도움을 구해야 할 수밖에 없지.'

양녕이 차를 내오라 시키고 와서 의자에 앉자 경략사가 말했다.

"이번에 원군으로 온 병사들이 각각 왜인과 여진족 출신이라 하셨지요? 조금 전 대군을 뵈러 오면서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모습을 잠시 봤는데, 느껴지는 분위기가 역시 남달랐습니다. 역시 칼로 이름난 왜인과 기병으로 이름난 여진족 출신이라 그런 걸까요?"

"출신도 출신이지만 실제로 실력도 출중합니다. 원래는 한성부 가까이에 두었던 이들이고, 회경군 도원수의 직속부대로 들어가 공험진을 되찾고 국경을 확보하는 일에도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따라온 것이지요."

"수가 적다고는 하지만 어찌 이리 금방 도착했나 했더니, 역시 엄청난 정예병이어서 행군하는 속도도 빨랐던 것이군요."

경략사의 그 말에 양녕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옛 시마즈 가문 방계 출신 병사들이나 동권두나 한성부 가까이에 살았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리고 맡은 임무가 특수한 것이었던 탓에 계호대대가 도원수 직속이었던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내가 말을 절묘하게 한 덕분에 경략사가 듣기에는 마치 왜인과 여진족 출신으로 구성되어 도성을 지키던 금군 정도 되는 부대고, 병력은 적지만 도원수의 명령을 바로 받아 움직일 정도로 위상이 높은 것처럼 보이겠지.'

양녕의 예상대로 경략사는 계호대대를 엄청나게 고평가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런 정예병을 서신 한 통으로 불러온 양녕을 보는 눈빛 역시 조금 달라져 있었다.

때마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두 개가 탁자에 올려졌고, 회경군의 존재감과 자신의 발언권을 동시에 높이는 데 성공한 양녕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차도 나왔으니 어디 앞으로 어떻게 할지 본격적으로 논해 봅시다."

"예. 대군께서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심양성은 둘레는 10리에 이르고 성벽 높이는 30척에 달하는 거대한 성입니다. 요동성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마땅한 성이 없고 여진족들이 기병에 능한 것도 있어서 놈들이 회전을 주로 걸어왔지만, 이 철옹성 같은 심양성을 두고 회전을 택할 리가 없습니다. 반드시 농성하며 버틸 것입니다."

"맞습니다. 비슷한 철옹성인 요동성이 회경군의 힘만으로 뚫리긴 했지만 그건 상황이 좀 다르지요. 요동성은 놈들의 근거지에서 너무 멀어 보급품을 쌓기에도, 병사들을 많이 두기에도 힘들었고, 반대로 조선에 엄청 가까워 방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멀고 지키기 힘든 성에 집착할 필요가 없으니 시간만이라도 끌 목적으로 결사대를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심양성은 놈들이 도읍으로 선포한 곳이니 필사적으로 지키려 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여기까지 오면서 보급선이 많이 길어져서 불리한 점이 있습니다."

경략사는 차분하고 솔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여진족 놈들이 수성전에 약할 것이라는 판단도 다시 고려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혼하에서 놈들을 상대하면서 가장 고전한 것이 진천뢰와 화포였습니다. 진천뢰나 대포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그런데 성을 지키는 상황이면 진천뢰는 위에서 아래로 던지면 그만이고 화포도 성벽 위에 고정해놓고 쏠 수 있으니, 그 위력이 더 커질 것입니다."

"애초에 놈들이 쓰는 화포가 무순성에 방어용으로 설치되어 있던 것을 떼어간 것인데 그걸 회전에서 쓰면서도 잘 다루었다니 정말 보통이 아니겠군요. 게다가 이미 심양성에도 화포가 있을 텐데, 무순성에서 가지고 온 것까지 더해서 배치한다면 절대로 뚫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화포 말고도 또 고생한 것이 있습니다. 중무장한 보병으로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거기로 기병이 뚫고 들어와서 엄청난 피해를 줬는데, 그 병사 개개인의 무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부대 간에 서로 호흡을 맞춰 움직이는 것이 잘 훈련된 군대와도 같았습니다. 그런 놈들이 화포와 보병을 성에 두어 굳게 지치고, 기병을 보내어 우리를 기습하거나 보급선을 끊으러 든다면 매우 버거울 것입니다."

양녕은 고민된다는 듯 흐음 하는 소리를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쉽지 않은 일이군요. 아무래도 여기 앉아서 생각하기만 해서는 답이 안 나올 것 같으니, 직접 보면서 판단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 * *

한참 뒤.

심양성 서쪽 성문 근처.

양녕과 경략사는 호위를 받으며 심양성 근처로 향했다. 언제 적이 나타나더라도 안전히 퇴각할 수 있을 정도 거리에서 멀리 떨어져서 서쪽 성문을 살피던 경략사가 말했다.

"저 안에 물자가 얼마나 있는지도 문제군요. 놈들도 바보가 아닌데 비축을 안 해놨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철통같이 포위를 하더라도 저 안에서 몇 달이고 버틴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공성전은 포위만 잘한다면 공격하는 쪽이 유리하다고는 하나 그것도 쉽지 않겠습니다. 놈들이 몰래 물자를 들여가는 걸 막으려면 모든 성문을 다 지켜야 할 것인데, 그러려면 병력이 분산되고 맙니다. 놈들이 노리기 딱 좋은 상황이지요. 물론 놈들도 보병과 화포, 화약은 대부분 성안에 두고 기병대만 밖으로 다닐 테니 저번 혼하 전투보다 위력은 줄겠지만, 결국 우리도 성문마다 분산되어 있으니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은 변함없습니다."

"그래도 성문 앞에 옹성은 안 만들어 놔서 다행입니다. 그랬다가는 성문을 바로 공격할 수가 없……."

"이런!"

말하는 도중 들려온 갑작스러운 탄식에 옆을 돌아본 경략사는, 양녕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오른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경략사의 말을 듣다 보니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걸 보십시오."

양녕이 가리킨 것은 성문 앞으로 제법 떨어진 곳에 쌓여 있는 흙더미였다.

"흙으로 된 둔덕 아닙니까? 저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높이를 잘 보십시오. 이렇게 정면에 흙더미를 쌓아 두면 대포를 직격으로 쏴서 성문을 노릴 수가 없습니다. 막고 있는 것이 나무나 돌도 아니고 흙더미니, 아무리 쏘더라도 무너지기는커녕 포탄만 흙더미에 박히고 말겠지요. 게다가 흙더미가 좌우로 길게 쌓여 있으니, 아마 둔덕이 가리지 않는 곳에서 성문을 노리려 해도 각도상 성문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경략사도 놀란 듯 말했다.

"이런,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하지만 그래도 성문에서 바로 이어지는 옹성보다 공격하기 낫지 않습니까? 저렇게 멀리 따로 떨어진 흙더미라면 아군이 점령한 다음 오히려 방어벽으로 쓰거나 아예 파서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양녕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반대입니다. 옹성보다 저게 더 방어에 유리합니다. 차라리 높게 쌓은 담이라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점령하고 방어벽으로 쓸 수 있겠지만, 저건 흙더미라서 앞뒤로 비탈이 져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아군이 달려가 저 흙더미 뒤에 숨어 봤자 성 문루 위에서 보면 각도상 훤히 보이고 맙니다. 그러면 놈들이 거기로 화살이나 포탄을 날리겠지요."

그 말에 경략사의 표정도 어두워지는 것을 본 양녕은 다시 성문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성 입구를 직접 포격하지 못하게 가릴 수 있으면서 포격에 바로 무너지지 않도록 흙을 다져 쌓으면서 그 장벽을 직각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만들어 숨을 공간을 없앤다. 전부 원래 역사에서도 화포가 전쟁의 중심이 된 다음에야 나왔던 발상이다. 그런데 이제 막 화약을 다루기 시작했으면서도 이런 것들을 떠올리다니. 야르하치가 정말로 보통 놈이 아니군. 그나마 저런 흙더미를 아예 외성처럼 두르고 해자까지 파지는 않아서 다행인가.'

양녕이 작게 한숨을 쉬는데 옆에서 경략사가 말했다.

"성문을 뚫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성을 뚫는 것만이 공성법은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은 성을 포위해서 놈들을 고립시킨 다음 그래도 정 안되면 그다음으로 성문을 뚫으려 해봐야지요. 지금 회경군 병력을 1이라 치면 정로군에서 싸울 수 있는 병력은 3 정도지 않습니까? 마침 딱 넷으로 나눌 수 있으니, 심양성 동서남북을 나눠 맡아서 포위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회경군 기병여단은 따로 두어 놈들이 기병을 보내 기습하거나 보급선을 공격하는 것을 막아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경략사는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양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병을 빼면 회경군과 정로군 병력 비율이 1대 3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방향 성벽을 지키는 병력보다 훨씬 적어질 것인데, 아무리 회경군이 정예라 하더라도 그것은 조금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거부당한다 생각하고 조심스러워진 경략사가 뭔가 말하기 전에 양녕이 바로 말했다.

"심양성 남쪽에서 포위하겠습니다."

심양성 북쪽은 여진족 세력권이고, 동쪽으로는 야르하치의 본거지인 허투 알라와 사르후가 있다. 서쪽으로는 금나라가 장악한 요하가 있고 그 너머로는 북원이 있다. 세 방향 전부 다 방어에 어려움이 있지만, 심양성 남쪽에는 수량은 적지만 혼하가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가장 방어하기 쉬운 곳을 맡겠다는 상당히 직설적인 요구였지만, 양녕이 말하는 것이 틀린 소리가 아니었기에 경략사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회경군이 남쪽을 맡고, 나머지 방향은 정로군이 맡겠습니다. 대신 기병여단 임무는 믿고 맡기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자, 그러면 이만 지휘부로 돌아가시지요. 저 철옹성을 어떻게 함락시킬지 논의하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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