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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95화 (19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95화

195화

1434년 4월 하순 모일.

혼하 남안. 정로군 진영.

제방 쪽에 있던 회경군은 정로군 쪽에서 들린 폭음에 급하게 되돌아왔다.

하지만 회경군이 되돌아왔을 때 이미 여진족 병력은 사라지고 없었고, 큰 피해를 본 채 혼란에 빠진 정로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급하게 정로군 진영 중앙으로 향한 양녕은 경략사를 발견하고 다가가 물었다.

"경략사, 무사하셨군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경략사는 진영 중앙에 있던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지쳤는지 힘없이 주저앉은 상태로 대답했다.

"대군께서 가신 다음 갑자기 여진족 놈들이 습격했습니다. 진천뢰는 물론이고 화포까지 쏴대고, 궁병에 보병, 기병까지 잘 짜여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 이것이 오랑캐 놈들의 군대가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놈들은 지금 어디 있는 겁니까?"

"애초에 놈들도 숫자가 더 큰 정로군 전체를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정도 공세가 둔해지자 금방 군대를 물려서 빠져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대군께서 회경군을 이끌고 돌아오시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달아난 것 같습니다."

"피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그 말에 경략사는 잠시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솔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어를 굳혀 놓고 있다가 당한 것이라 심각하게 당하지는 않았지만, 절대로 적지 않은 피해입니다. 병사들도 병사들이지만, 필사적으로 막느라 화약도 많이 써 버렸습니다."

사실상 패배를 코앞에 두고 있다가 회경군이 구원하러 온 덕에 적들이 물러간 것만 같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경략사는 바로 얘기를 돌렸다.

"제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는데, 점령은 잘 되었습니까?"

양녕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점령할 것도 없었습니다. 빈 제방이더군요. 그것도 물이 빠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비어 있었습니다."

"놈들이 수공을 준비하던 것 아닙니까? 제방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고, 있었는데 비어 있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무순관을 통째로 헐어다 쓰다시피 해서 그럴싸하고 큰 제방을 만들어 놓긴 했더군요. 게다가 약간 허술해 보이게 쌓아 놓아서, 터뜨릴 생각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걸 멀리서 확인하고 습격에 대비해서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가서 확인해 봤습니다."

"그런데 그게 속임수였단 말입니까?"

"예. 애초에 갈수기였는지 아예 물이 얼마 없었습니다."

경략사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애초에 부대를 나뉘게 움직이도록 할 작정이었단 거로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상황이 그럴싸하니 속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 말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얼핏 지금 상황에 경략사가 좌절한 것 같았지만, 양녕이 보기에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회경군에 책임을 떠넘길까 싶어서 아예 누구 책임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역시 회경군 기병을 빼서 보낸 것은 자신이다 보니 그걸 신경 쓰고 있군. 뭐 원정에 좀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어차피 많이 죽은 것은 정로군이지 회경군이 아니다. 앞으로 경략사도 좀 조용해지겠군.'

너무 조용한 상황이 어색했는지 경략사가 다시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럼 수공 걱정은 없는 것이군요."

"예. 경략사 말씀대로 놈들이 회경군이 오는 것을 보고 달아난 것이라면 곧바로 덤비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틈에 빠르게 병사들을 수습하고 혼하를 건너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회경군에 지시를 내리고, 조정에도 서신을 보내야겠습니다."

"조정에 서신을요?"

"예. 혼하를 건너면 곧 심양성인 데다가, 놈들이 이렇게 작정하고 덤빈 걸 보면 곧 결전입니다. 조금 더 병력을 보내 달라 해야겠지요."

이미 병력을 최대한 모아 왔다고 했었고, 이미 심양성이 코앞인 상태에서 조선에서 추가 병력을 바로 보내준다 한들 시간이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경략사는 더 묻지도 못하고 알겠다고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 * *

며칠 뒤.

호이파 강 근처 수풀.

"……이상이 대군께서 보내신 서신의 내용이네. 결국 경략사가 판단을 그르쳐서 상황이 급박해진 모양이야. 우리도 이 일만 끝내고 빨리 가서 합류해야 하네."

등자사의 말에 동권두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를 추격하러 오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병력을 한데 모아 정로군을 치다니. 별동대의 존재는 모른다 하더라도 후방이 공격받는 건 알았을 텐데 그렇게 한 걸 보면 우리가 성과를 너무 못 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자책할 것 없네. 우리 첫 임무를 생각해 보게. 아직 습격이 한 번도 없던 상황인데도 파저강 인근 작은 마을까지도 이미 대피시키려 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 정도로 후방에 신경 쓴 놈들이니, 설령 별동대 존재를 알더라도 병력을 보내는 대신 대피만 서둘렀을 것이야."

"그랬다면 좋겠군."

"그리고 여기까지 오면서 한 명도 잃지 않았고, 적에게 들키지도 않았네. 그 덕분에 가장 중요한 임무를 할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소법 자네 말이 맞네. 그 어떤 다른 임무보다도 지금 하려는 임무가 중요하지. 그걸 생각해 보면 놈들이 우리를 추격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군."

한결 표정이 나아진 동권두는 수풀 너머 먼 곳을 보았다. 거기에는 호이파강 근처에 늘어선 제철 시설들이 굴뚝마다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우리의 마지막 별동대 임무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해야겠군. 제철 시설을 파괴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긴 하네. 하지만 결전을 코앞에 둔 지금 제철 시설을 파괴한들, 곧 벌어질 결전에 큰 영향은 주지 않아. 그러니 이번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제철 시설의 관리자인 부하투를 잡는 거야. 오돌리부의 버일러 판차의 아들인 부하투 놈만 잡는다면 오돌리부는 확실히 동요시킬 수 있네."

"하지만 그렇다고 제철 시설을 그냥 두기도 좀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부하투 놈을 찾으려면 다 헤집기도 해야 하고 말이야."

"애초에 시설을 파괴하는 거에 집착할 필요가 없네. 부수기는 힘들면서도 당장 이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새로 지으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제철 시설을 습격하면서 기술자들도 죽일 것이니, 적의 철 생산을 방해하는 건 그 자체로 이미 이루어지는 게야."

"자네 말이 맞아. 그럼 습격을 어떻게 진행할지를 생각해야겠군. 우선 제철 시설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고 사람도 많을 테니 이놈은 무조건 써야 할 거고 말이야."

동권두는 그렇게 말하고는 옆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풀을 뜯어먹고 있는 말 몇 필을 보았다. 첫 임무에서 여진족 기병들이 타고 있던 것을 노획해 온 말들이었다. 여진족 방식으로 키운 말들이라 추가적인 보급 걱정 없이 풀만 뜯어 먹이면서도 여기까지 데려올 수 있었고, 전령이 요동성과 계호대대를 오가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일단 냅다 시설 안에다 인화살이나 파편 화살, 질려포통을 써서는 안 되네. 만약 안에 부하투가 있었다면 그걸 맞고 죽을 위험이 있으니 말이야. 사실 뭐 죽여서 목만 들고 가도 상관없지만, 놈은 분명 중요한 것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니 기왕이면 산 채로 잡는 게 좋아. 다른 여진족 장수 놈들도 마찬가지고."

"물론이지. 그럼 우리 회령중대는 인화살은 건물 위에만 쏘겠네. 건물에 불이 나서 뛰쳐나오게 만드는 거지. 파편 화살은 뭉쳐서 도망치는 놈들 가운데에 장수가 없는 경우에만 쏴서 몰살하게 하고, 이 말들은 말 위에서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난 이들에게 주어 도망치는 놈들을 추격하게 하겠네."

"그럼 석주중대는 다니면서 살펴서 중요한 놈이 없어 보이는 건물이면 안에 질려포통을 던져놓고, 중요한 놈이 있어 보이면 뛰어들어서 계림도로 나머지를 베어 버리고 생포하겠네."

"좋아. 그럼 우리 질려포통을 석주중대에 몰아주겠네. 자, 시작해 볼까."

* * *

잠시 후.

제철 시설이 습격당할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더라도, 기본적으로 중요한 시설이다 보니 경비를 위한 여진족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기는 했다. 그 병사들이 어떻게든 저항해보려 했지만, 이미 여진족을 상대하는 데에 익숙해진 계호대대를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이쪽은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습니다.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등자사에게 그렇게 말한 회령중대 병사는 방금 자신이 목덜미를 쏘아 죽인 여진족 궁수의 시체에 다가가서는 몸통을 밟고 화살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등자사는 자기를 따르는 병사 몇을 이끌고 그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자네 활 솜씨가 정말 대단하군. 고맙네."

"감사합니다."

등자사가 병사를 지나쳐 조금 더 갔을 때, 옆에 있던 석주중대 병사 하나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작지만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길 보십시오!"

병사가 가리킨 곳에서는 제법 갑옷을 잘 차려입은 여진족 장수 하나가 말에 올라타려 하고 있었다. 등자사 일행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이 된 여진족 장수는 서둘러 등자를 밟고 말에 타려고 했다. 등자사가 계림도를 뽑아 들고 달려갔지만, 아무리 빨리 뛰어가더라도 여진족 장수가 말에 타고 달아나는 것을 따라잡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빌어먹을!"

등자사가 어금니를 깨문 그때, 등 뒤에서 화살이 하나 날아왔다.

화살은 등자사의 옆을 지나 여진족 장수 쪽으로 날아갔고, 넓은 날이 달린 촉으로 여진족 장수가 잡고 있던 고삐를 모조리 잘라 버리며 지나갔다. 잡고 있던 고삐가 잘려 균형을 잃은 장수는 그대로 뒤로 떨어지듯 넘어져 버렸다.

예상 밖의 상황에 등자사가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의 회령중대 병사가 활을 한 손에 들고 씨익 웃어 보였다.

"오늘 자네에게 신세 많이 지는군. 고맙네!"

호쾌하게 웃으며 말한 등자사는 다시 장수 쪽을 보았다. 장수는 재빠르게 다시 일어났지만, 타려던 말은 놀란 나머지 저만치 이동해 있었다. 퇴로가 막힌 것을 확인하고는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든 장수의 얼굴을 본 등자사가 약간 놀란 듯 말했다.

"네놈이 부하투로구나."

"너, 나를 처음 보는 거 아니냐? 내 이름은 어떻게 알지?"

장수가 자신이 부하투임을 인정하자 등자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더라도 사촌이라는 혈연관계는 지울 수가 없는 것인지, 부하투의 얼굴은 동권두와 제법 많이 닮아 있던 것이다.

"다 아는 법이 있지. 그나저나 항복하는 대신 칼을 뽑아 들고 저항하는 그 기개는 인정해줄 만하다만, 그걸로는 턱도 없다."

휘하 병사들도 계림도를 뽑아 들고 부하투를 둥글게 포위하듯 자리를 잡자, 등자사는 계림도를 양손으로 고쳐 들고 천천히 부하투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등자사는 칼끝으로 부하투를 겨누며 자세를 바꾸었다. 등자사는 부하투의 시선이 칼끝에 집중된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발끝으로 흙을 차서 부하투의 얼굴에 뿌렸다.

"걸렸구나!"

부하투의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등자사는 앞으로 도약하듯 달려 나가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칼날로 부하투의 갑옷 입은 손등을 가볍게 쳐 칼을 떨어뜨리게 한 다음 연달아 칼등으로 어깨를 치자, 부하투는 쇄골이 깨지는 듯한 통증에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대로 부하투를 걷어차 뒤로 넘어지게 하고 목덜미에 칼을 겨누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등자사가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적장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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