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94화
194화
1434년 4월 하순 모일.
혼하 남안.
북원 기병대를 격파한 이후, 정로군과 회경군은 전투 없이 혼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양녕과 함께 혼하 남안에 서서 강 건너를 살펴보던 경략사가 말했다.
"역시 놈들이 북원과 협력했던 게 확실합니다. 그러니 그 강한 북원 기병대가 패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 뒤로는 안 덤벼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혼하까지 왔는데도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는 건 수상합니다."
"혼하가 이런 상황이라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경략사가 가리킨 혼하는 수량이 심각하게 줄어 있었다. 강바닥이 거의 드러나 있었고, 겨우 여러 갈래로 흩어진 물줄기만이 졸졸 흐를 뿐이었다.
"이렇게 강바닥이 다 보여서 그냥 걸어서 건널 지경인데, 어떻게 도하하는 틈을 노려 공격하겠습니까."
경략사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혼하 상류에서 자리 잡고 살던 놈들이 혼하의 수량이 달마다 어떻게 늘고 주는지를 몰랐을 리도 없고, 아무리 도하하는 때를 노려 공격할 수가 없다고 한들 여기가 심양성 바로 남쪽의 큰 강인데 건너게 그냥 둘 리도 없지요. 분명 함정입니다."
"역시 경략사께서도 놈들이 뭔가 꿍꿍이가 있다 생각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혼하 상류로 가면 무순성이 있고, 더 올라가면 사르후가 있고 그 안쪽에는 허투 알라가 있지요. 놈들의 본거지 가까운 쪽이고, 산지라서 골짜기 사이로 강물이 흐르고, 주변에서 흙과 나무를 구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니 아마 제방을 쌓아 혼하 강물을 막아두고 있을 것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강물이 얼마 없는 것을 보고 건너려고 하면 제방을 터뜨려서 수공을 가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놈들의 꾀를 알았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수공이 올 것을 알고 걸음을 빨리하더라도 이 많은 병사가 제때 모두 건너가기란 불가능합니다. 분명히 피해가 생기지요. 제일 좋은 것은 상류로 병사들을 보내 제방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점령하지 못하고 제방이 무너졌다 하더라도 강을 건너던 중이 아니니 피해는 없고, 오히려 놈들이 금방 새로 제방을 쌓아 수공을 시도할 수가 없으니 그 틈에 수공 걱정 없이 도하하면 됩니다."
병력을 분산시킨다는 경략사의 말에 양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분명 저번에 북원 기병대와 싸울 때에도 병력을 분산시키긴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그때 싸웠던 요동성 근처보다도 더 북쪽으로 올라온 곳입니다. 놈들이 도읍을 선포한 심양성의 코앞일 뿐만 아니라 근거지인 허투 알라에서도 가깝지요. 이렇게 언제 적의 병력이 나타날지 모르는 곳에서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앞선 정로군도 숫자는 많았지만, 괜히 흩어져서 행동하다가 각개격파 당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수공이 올 것을 뻔히 아는데 이대로 그냥 건널 수도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제방은 지키다가 터뜨리고 나면 그만인 것이라 병사를 많이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병력을 많이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빨리 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혼하에 도달한 것을 놈들도 분명히 알 것인데, 아무리 무사히 건너가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너무 끌면 결국 적진 앞에서 진격을 멈추고 기다린 꼴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경략사가 양녕을 슬쩍 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회경군 기병여단이 가서 상류의 제방을 점령하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진족 본거지 코앞인데 기병 전력을 뺀단 말씀이십니까?"
약간 날카로워진 양녕의 말에도 경략사는 태연히 대답했다.
"대군께서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제방 역시 적들 본거지인 허투 알라의 코앞 아닙니까. 그런 곳에 병력을 적당히만 보내서 제방을 점령해야 하는 일이니, 오히려 기병에 취약한 보병을 보내는 게 더 위험할 것입니다. 회경군 기병여단은 저번에 몽골 기병도 쉽게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안심하고 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얼핏 듣는다면 맞는 말인 데다가, 회경군을 띄워 주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양녕에게는 그 뒤에 숨은 꿍꿍이가 뻔히 보였다.
'저번에 우리에게 북원 기병대를 상대시킬 때 제 뜻대로 되지 않고 역효과만 났던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이군. 이번에야말로 중요하지만 큰 공적은 되지 않고, 위험성도 있는 제방 점령을 시켜서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이후의 공적을 독점하려는 생각일 것이야.'
양녕의 눈치를 슬쩍 본 경략사가 말했다.
"도하하는 동안 공격받는 것이 위험한 것이지, 여기서 방어를 굳혀놓고 있으면 괜찮을 겁니다. 또 혼하 강물이 줄어들어 있다고 하지만 발목까지는 찹니다. 여진족 기병이라고 해서 이걸 빠르게 건너올 수는 없으니, 혼하는 우리 입장에서도 방어선으로 쓸 수 있지요."
"혼하를 바로 건너지 않고 우회해 건너서 남쪽에서 공격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보병이 기병에 약하다고는 하지만 정로군에는 화포가 있으니 마냥 불리한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어차피 여진족 놈들도 제방을 지키기 위해서 병력 일부를 쪼개어 보냈을 것 아닙니까. 충분히 방어할 만합니다. 정 걱정되신다면 정로군이 방어 준비를 마치는 것을 확인하신 다음 출발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마치 회경군이 제방을 점령하러 가기로 이미 결정이 난 것 같은 말이었지만 양녕도 더 뭐라 하기는 쉽지 않았다. 경략사의 말에 아예 근거가 없던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자인 양녕을 함부로 낮게 대할 수가 없을 뿐 경략사가 이번 원정 전체의 총책임자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양녕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방을 지키는 적 전력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만일을 대비해서 회경군 전원을 이끌고 갔다 오겠습니다."
경략사가 원하는 대로 기병여단만 위험한 임무에 보내서 전력이 약해져 줄 생각은 없으니, 아예 회경군을 다 데리고 가서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말이었지만, 경략사는 그 정도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 * *
한참 뒤.
혼하 남안. 사르후 인근.
주변을 철저히 경계하며 겨우 무순성을 지나 동쪽으로 간 회경군 앞에 나타난 것은 무순성 동쪽에 지어진 관문인 무순관이었다. 더 정확히는 무순관으로 추정되는 폐허였다. 그 모습을 본 김종서가 양녕에게 말했다.
"아예 요새를 통째로 없애다시피 했군요. 성벽 기초나 잔해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무순관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우리는 무순성 동쪽에 무순관이 있다는 것을 아니 짐작이라도 하지, 이렇게 아예 다 헐어 냈으니 처음 보는 사람은 뭔지도 모를 것이오."
"예. 그리고 아마 무순관이 헐린 이유는 저것 때문이겠지요."
양녕에게 대답하며 김종서가 가리킨 것은 한참 떨어진 앞쪽에 혼하를 틀어막듯 지어진 거대한 제방이었다.
"그렇소. 보아하니 벽돌로 쌓은 제방 같은데, 여진족이 저렇게 많은 벽돌을 금방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지. 무순관을 헐어 그 재료로 쌓은 것이 확실하오."
"제방을 보니 쌓은 모양은 조금 어설프지만 그래도 제법 기술이 있습니다. 물이 전혀 새어 나오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김종서의 말대로 제방은 조금 엉성하게 쌓여 있었지만, 강물은 조금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저 제방에 막힌 구간 이후에 혼하에 합류하는 작은 하천이 있어서, 그 이후로만 강물이 좀 흐를 뿐이었다.
"그렇게 말이오. 하류에서 보이던 강물도 저 합류하는 하천에서 나온 것이 전부고, 혼하 본류는 완벽히 막은 모양이오. 그 정도 기술이 있다고 보면 사실 저렇게 엉성해 보이게 쌓은 것도 이해는 가오. 놈들이 이 제방을 만든 목적이 치수는 아닐 것 아니오."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필요할 때 터뜨리려면 너무 튼튼하면 안 되지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회경군은 점점 사르후로 접근해 갔다. 언제 적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병사들은 각자 무기를 쥔 채 긴장하며 천천히 주위를 살펴 가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갔을까.
"대군. 뭔가 좀 이상합니다. 이제 곧 제방인데도 왜 아무런 반응이 없을까요?"
김종서의 말대로 회경군이 제방 가까이 왔는데도 여진족은 전혀 나타날 낌새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도 그게 이상하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일단 제방에 거의 다왔으니, 혹시 습격당해도 바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기병들을 보내서 제방을 살피고 오게 하겠습니다."
"알겠소."
지시를 내리고 온 김종서는 양녕과 말없이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다급하게 뛰어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양녕과 김종서가 그쪽을 보자 군관 하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몰고 달려오며 외쳤다.
"대군! 군단장! 큰일입니다!"
그 다급한 목소리에 잔뜩 놀란 양녕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적이 나타난 겐가?"
"아닙니다, 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일입니다."
그 말에 김종서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적이 나타난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라니, 대체 무언가?"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던 군관이 겨우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제방 안에 물이 없습니다. 아예 없지는 않으나 제방 크기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양입니다. 물이 제방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고여 있다고 해야 할 수준입니다."
충격적인 보고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김종서였다.
"물이 없다니? 혼하 강물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때 옆에서 심각하다 못해 창백해진 표정으로 양녕이 말했다.
"아마 처음부터 물이 없었을 것이오. 아마 지금이 갈수기일 것이겠지. 이 안쪽 허투 알라가 근거지였으니 금나라 놈들도 잘 알고 있겠지."
"그게 무슨……. 물이 없는데 왜 이 큰 제방을 만들었단 말입니까?"
"물 말고 다른 것을 잡아두기 위해서일 것이요."
그 순간 뒤쪽 멀리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양녕이 말한 의미를 알아차린 김종서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 * *
같은 시각.
혼하 남안.
쉴 새 없이 날아들어 터지는 진천뢰와 포탄에 정로군 방어선은 이미 곳곳이 무너지고 있었고, 그 무너진 곳을 완전히 돌파하기 위해 우디거 출신 보병들이 중무장하고 달려가고 있었다. 보병들 뒤를 따라가는 기병들은 지금은 화살을 쏘며 보병들을 엄호할 뿐이었지만, 방어선이 완전히 뚫리고 나면 그 안으로 뛰어들어 정로군을 무참히 도륙낼 것이었다.
순조롭게 풀리는 그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던 오돌리부의 버일러, 판차가 즐거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계략에 완전히 걸려들었군요. 그것도 껄끄러운 조선 기병을 제방 쪽으로 보내다니 기대 이상의 결과입니다."
판차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 어떻게 되는지 뼈저리게 느낄 때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