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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93화 (19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93화

193화

1434년 4월 중순 모일.

요동성 북부.

북원 기병대는 다가오는 회경군 기병여단의 상황을 지켜보며 천천히 이동 중이었다.

별도로 정찰을 내보내지는 않았는데, 어차피 말을 타고 질주해 와서 화살을 힘껏 쏘아도 닿지 않을 정도의 먼 거리에서도 상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몽골인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바로 우리를 상대하러 올 줄은 몰랐는데."

당당하게 접근해오는 기병여단을 보던 북원 기병대장이 툭 던지듯 말하자, 옆에서 다른 병사가 동감한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보통은 우리 북원 기병대가 나타나면 우왕좌왕하느라 행동을 하까지 시간이 한참 걸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그건 명나라라서 그랬던 것 같다. 애초에 기병을 운용하는 것도 상대하는 것도 능숙하지 못한 데다가, 우리 몽골인들에게 철저히 짓밟혔던 기억이 있으니 당황하는 것이지. 하지만 조선은 달라. 삼한인들은 이자들이 정말로 농사로 먹고사는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병을 중요시하고 또 강력하다."

"아, 제 할아버지께 들은 기억이 납니다. 똑같이 농사를 짓는 나라인데, 평지가 많은 중국은 기병이 약하고, 오히려 산이 많은 삼한에서 강한 기병이 있는 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라고 하곤 하셨지요."

"그래. 게다가 저들은 우리 몽골이 온 세상을 휩쓸었을 때 끈질기게 저항했다. 덕분에 칸의 군대에 저항하고도 몰살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칸의 부마국이 되었지. 그러면서도 저들은 우리 몽골을 자신들의 땅에서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칸의 사위로서 몽골제국 안에서 황금 씨족 다음가는 지위를 누리던 왕씨 가문 역시 조선 첫 임금에게 몰살되어 쇠락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으니 저들이 우리 몽골인들에게 경계심이나 적대심을 품으면 품었지 두려움을 품지는 않겠군요."

기병대장이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우리 목적은 놈들을 붙잡아 두는 것이지, 싸우는 게 아니야. 괜히 싸워서 우리 전력을 깎아 먹었다가는 오이라트 놈들에게 좋은 일만 해 줄 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입니까?"

"어차피 놈들이 작정하고 추격해 오더라도 초원에는 우리가 익숙할 뿐만 아니라 몽골의 말이 더 지구력이 좋으니 붙잡힐 일은 없어. 하지만 저들의 활이 우리 것보다 사거리가 멀고 위력이 강하고, 타고 있는 말도 제법 좋아 보이는군. 자칫 방심했다가 저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다면 위험할 수 있다. 그러니 계속 거리를 유지하면서 놈들이 쉽게 북쪽으로 이동하지 못하게만 만든다."

알겠다고 대답하려던 병사가 기병여단 쪽에서 이상한 것을 보고는 말했다.

"놈들이 화살을 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한 열 명 정도 되는 것 같군. 그런데 무슨 의도지? 아무리 삼한인들의 화살이 강하다고 해도 이 정도 거리면 겨우 날아올 수 있을 뿐 위력은 별로 없을 텐데. 게다가 저렇게 몇 개 안 쏜다면 더더욱 위협이 되지 않는다."

기병대장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북원 기병대를 향해 날아오던 화살들이 공중에서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붙은 백린 조각을 흩뿌린 것이다.

백린 조각들이 몸에 달라붙어 타기 시작하자 말들이 흥분해서 콧김을 내뿜고, 병사들 역시 털어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옮겨붙어 타는 백린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게 뭐야! 불화살인가? 놈들이 불화살을 계속 쏜다! 서로 가까이 붙어있으면 위험하니까 거리를 벌려!"

기병대장의 지시대로 북원 기병대가 거리를 벌려 넓게 흩어졌지만, 기병대장의 예측과 달리 다음 화살이 터지며 사방으로 쏘아낸 것은 백린이 아니라 쇳조각이었다. 인화살로 적들이 거리를 벌리게 만들고, 거기에 파편 화살을 쏘아 위력을 극대화한다는 이징옥의 작전에 제대로 당한 것이다.

"워, 워! 진정해라! 빌어먹을! 더 이상 접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속도를 올려 이대로 이탈한다!"

큰 소리로 지시한 기병대장은 타고 있는 말이 흥분한 나머지 자꾸 다른 방향으로 가려 하자 어금니를 꽉 물었다. 몽골의 말은 적진에 돌진하면서도 망설임이 없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익숙한 상황일 때의 얘기였다. 머리 위에서 무언가 큰 소리를 내며 터진 데다가, 몸에 불덩어리가 달라붙어 독한 연기를 내뿜으며 타고 있고, 또 큰 소리가 나더니 살갗에 쇳조각들이 박히는 것을 처음 겪은 말들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장, 말이 흥분해서 제어가 잘 안 됩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놈들이 오기를 얌전히 기다릴 셈이냐? 어떻게든 말을 움직여서 머리 방향만 놈들 반대쪽으로 돌려라! 그러면 말이 흥분해서 제 마음대로 달려간다고 해도 놈들에게서 멀어지기는 하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들려온 보고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기병대장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전방에 적 중기병대 출현!"

* * *

같은 시각.

다가오던 북원 기병대가 자신들을 발견하고 어떻게든 방향을 틀어 벗어나려 하는 것을 본 이징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미 늦었다! 멀리서 다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너희만 눈이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지!"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에 사는 몽골인들 만큼은 아니지만, 사냥이 생업인 여진족이나 목축이 생업인 신백정들도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기병들이 대놓고 접근하며 인화살과 파편 화살로 북원 기병대의 주의를 끄는 동안, 이징옥은 여진족과 신백정 출신으로 시력이 좋은 병사들에게 정찰을 맡겨가며 중기병들을 이끌고 멀리 빙 돌아 퇴로를 막고 있던 것이다.

"연기가 줄어드는 걸 보아하니 반대쪽 아군이 인화살과 파편 화살을 거의 다 쓴 것 같습니다. 슬슬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부관의 말에 끄덕인 이징옥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명심해라! 놈들은 우리를 붙잡아두려고만 했는데 우리가 선공을 가한 데다가, 인화살과 파편 화살이라는 처음 보는 무기에 공격당해 혼란에 빠져 퇴각 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들이 천하를 호령하던 몽골 기병이 아닌 것은 아니니 절대 방심하지 마라! 저놈들이 오이라트를 상대하기 위해 병력을 온존하려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아직 더 할 일이 많으니 여기서 쓰러져서는 안 된다! 알겠지!"

"예!"

"좋아! 우리 목적은 어디까지나 놈들이 다시 우리를 붙잡아 둘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만 패주는 것임을 잊지 말도록! 자, 그럼 저놈들에게 조선의 편곤 맛을 보여 주러 가보자! 전군 돌격!"

"와아아아아!"

맨 앞에서 편곤을 치켜든 이징옥이 말을 몰아 달려 나가자, 중기병들이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뒤따르기 시작했다. 땅이 흔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육중한 돌격이었지만, 그 육중함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중기병대와 북원 기병대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달단마가 대단하다더니 중무장한 우리 말에 따라잡히는 걸 보니 그렇지만도 않구나! 자, 어서 가서 밟아 버리자!"

이징옥은 사기를 더 올리기 위해서 외친 것이었지만 사실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몽골인들의 말은 전투에 쓰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유목 생활에 필요한 가축이다. 따라서 조금 먹고도 잘 움직여야 하며, 지구력과 참을성도 뛰어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조선의 군마는 기병으로만 쓰일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돌진력과 체력, 체구에만 집중해서 개량할 수 있다.

그 차이가 지금처럼 순간적인 돌격에서 나타난 것이다.

"신호 화살 발사!"

병사 하나가 말을 달리며 허공으로 쏘아 올린 화살이 터지며 선명한 붉은색 불꽃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돌격이 개시되었으니 인화살과 파편 화살을 그만 쏘라는 신호였다.

이윽고 북원 기병대 측면에 도달한 이징옥이 편곤을 휘둘러 북원 기병 하나를 말 등에서 날려 버린 것을 시작으로, 중기병대가 북원 기병대 측면 진형을 부수며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장군! 어떤 놈이 적장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괜찮다! 직접 본 우리도 못 찾는데 명나라가 무슨 수로 알겠어!"

큰 소리로 대답한 이징옥의 눈에 마침 좋은 투구와 갑옷을 차려입은 북원 기병 하나가 들어왔다. 고삐를 단단히 잡고 편곤을 쥔 손에도 힘을 준 이징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놈이 괜히 좋은 갑옷을 차려입은 잘못으로 여기서 죽는구나! 그래도 죽어서라도 장수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감사히 죽어라!"

* * *

한참 뒤.

지휘소 천막.

지휘소로 돌아온 이징옥은 말에서 풀쩍 내리더니, 천막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경략사와 양녕에게 말했다.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패주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이징옥은 태연한 표정으로 안장 뒤에 싣고 온 시체를 들어 바닥에 대충 던져 놓으며 이어서 말했다.

"적장입니다."

사실은 조금 전 재수 없게 이징옥의 눈에 띈, 잘 차려입은 북원 기병일 뿐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적들을 가까이서 보고 온 것은 회경군 기병여단뿐이었으니 경략사와 정로군 뿐만 아니라 회경군의 다른 병사들까지도 모두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양녕만이 대강 눈치를 챘을 뿐이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오. 아군 상황은 어떻소?"

"죽은 사람은 없고, 몇 사람이 가볍게 다쳤을 뿐입니다."

그 말에서 양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소. 여단장께서 아주 큰 공을 세우셨구려."

"과찬이십니다. 명을 받들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싸우고 왔더니 배가 고픈데, 밥은 다 되었습니까?"

"아직이오.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소."

"괜찮습니다. 오히려 말을 매어놓고 몸도 씻고 할 여유가 생겼군요. 밥은 씻고 와서 개운한 기분으로 먹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되겠구려. 알겠소.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시오."

고개 숙여 인사한 이징옥이 말을 끌고 떠나가고 나서도 여전히 경략사는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아는 양녕이 속으로 웃었다.

'나와 여단장이 대놓고 관우가 화웅을 격파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하다시피 했으니, 자신은 졸지에 조조가 되어버렸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다.'

경략사는 회경군이 북원 기병대를 상대하게 한 다음 이후의 공적을 차지할 욕심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회경군 기병여단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이끄는 동로군 병력들이 회경군을 관우가 있는 군대처럼 여기게 만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정작 자신의 평가는 깎는 짓을 하고 만 것이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역사 속의 명장을 넘어서 신과도 같은 존재로 여긴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책도 이런 실책이 없지.'

양녕은 하던 생각을 잠시 멈추고 경략사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북원 기병대를 격파했으니 안심하고 계속 심양성으로 향하면 되겠군요. 하지만 오늘 이미 회경군 기병여단이 전투를 치른 뒤라 또 적을 상대하는 일이 생기면 제 실력을 낼 수 없으니, 오늘은 조금만 이동한 다음 쉬고 내일 다시 속도를 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시오."

경략사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하려는 것을 보고 양녕은 또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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