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92화
192화
1434년 4월 중순 모일.
요동성 북부.
준비를 마친 정로군과 회경군은 요동성을 떠나 북쪽의 심양성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다. 적 영토 깊이 들어가는 것인 데다가, 동쪽에는 산, 서쪽에는 강을 끼고 올라는 것이다 보니 각각 호이파부와 훌룬부의 공격이 우려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대신 중간중간 병사들을 쉬게 하면서 멈추는 동안 양쪽 군대 지휘관들이 모여 현 상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수시로 검토하기로 했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별일은 없습니다. 이대로 계속 북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경략사의 말에 양녕이 대답했다.
"예. 하지만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진족 놈들이 심양성을 점령하고는, 그곳이 자신들의 융성할 도읍이라면서 성경성이라 이름을 바꿔 부를 정도지 않습니까. 아무리 갓 자리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수도인데, 그 근처까지 명나라와 조선의 군대가 아무런 방해 없이 오게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건 맞습니다. 아마 혼하를 건널 때 가장 적극적으로 막으려 들 것 같습니다. 혼하가 물살이 거칠고 빨라 건너기 어려우니 건너려고 기다리는 동안이나 건넌 직후는 물론이고, 여진족 놈들이 배 타는 데에도 능하니 혼하를 건너는 도중에도 강 위에서 배를 타고 습격할지 모릅니다."
낙수의 북쪽에 있다 해서 낙양이고, 한강의 북쪽에 있다 해서 한양인 것처럼 심양 역시 심수, 즉 혼하의 북쪽에 있었다.
명나라가 요동 일대를 통제할 때에는 큰 상관 없는 요소였지만, 막상 심양성이 여진족 손에 떨어지고 나니 그 남쪽을 흐르는 혼하는 명나라와 조선 쪽에서 오는 것을 막는 거대한 천혜의 방어선이 되어 버렸다.
"혼하를 건널 때도 막으려 들겠지만 그 전에도 분명히 기회를 잡으면 덤벼들 것입니다. 까다롭군요."
양녕과 경략사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잠시 밖에 나갔던 김종서가 심각한 얼굴로 들어왔다.
"대군, 경략사. 급한 소식입니다."
"무슨 일이오?"
"후방에서 적이 나타났습니다. 대규모 기병대입니다."
그 소리에 경략사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규모 기병대가 말이오? 여진족 놈들이 무슨 수로 우리 뒤에 기병대를 대규모로 보냈단 말이오?"
"여진족 기병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갖춰 입은 갑옷이나 깃발이 몽골인들의 것 같았습니다."
경략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북원 기병대란 말이오? 놈들은 이번 원정을 틈타서 장성을 넘어 약탈이나 하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여기에? 아!"
경략사가 당황한 나머지 자기 입으로 북원이 장성을 넘어 약탈하고 다닌다는 소리를 했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놀랐지만, 거기에 신경 쓰거나 비웃을 시간은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기병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회경군의 방어는 군단장께 맡기겠소."
"예. 전 병력에 알려서 바로 방진을 짜고 적 기병에 대비하라 하겠습니다. 또 기병여단을 보내 적들을 살펴보고 오라 하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김종서가 바로 천막 밖으로 나가고, 옆에서는 경략사가 총병관들을 모아 지시 내리는 것을 들으며 양녕이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몽골 기병은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이들이다. 비록 중원에서는 물러났지만, 그것은 몽골인들이 농경과 치수, 통치에 약했기 때문이지 결코 기병대가 약해서는 아니야. 특히나 몽골의 말이 질주력과 지구력, 인내력과 선회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북방의 평원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 * *
잠시 후.
지휘소 천막.
경략사와 양녕이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2기병여단장 이징옥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적들은 살펴보고 오셨소? 뭔가 알아낸 것은 있소?"
급하게 물어보는 경략사의 질문에 이징옥이 대답했다.
"역시 몽골인들이 맞았습니다. 규모도 제법 됩니다."
"이런, 정말로 북원 기병대라니……."
이징옥은 이어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양녕에게 주며 말했다.
"그리고 마침 요동성에서 북쪽으로 오던 회경군 기병 몇과 만났습니다. 서신을 가지고 오고 있더군요."
서신을 받아든 양녕의 낯빛이 순간 흔들렸다. 서신에 점점이 피가 튀어 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던 것이오?"
"북원 기병 놈들에게 공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말 타는 데에 능한 신백정 출신 기병들을 골라 보낸 것이라 금방 따돌리고 피했다 합니다. 지금은 군승들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데, 군승들 말로는 조금 다쳤을 뿐이라 치료하면 금방 나을 것이라 합니다."
"다행이오. 그럼 어디."
양녕은 탁자 위에 서신을 펼치고는 경략사와 함께 읽어 내려갔다. 서신을 다 읽은 경략사가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천자를 세운다니, 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란 말입니까. 게다가 이 내용을 명나라와 조선에 이미 보냈다니!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여진족 놈들이 북원과 협력했을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양녕 역시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예. 정말로 북원 기병대가 나타난 것을 보니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소식이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더 빨리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인데……."
"소식은 급하게 보냈으나, 빨리 받아보고 대처하지 못하도록 북원 놈들이 방해한 것일 겁니다. 그게 아니면 요동성에서 여기로 오는 대규모 증원도 아니고 고작 기병 몇 명을 왜 공격했겠습니까. 그보다도 일단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대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략사의 질문에 양녕이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다들 북원이 여진족과 협공하려 들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조금 전에는 나도 상황이 다급해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은 적다. 내가 거의 관여하지 않은 몽골 지역의 상황은 원래 역사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인데, 그렇다면 북원은 여전히 오이라트와 교착상태일 것이야. 오이라트를 상대할 병사 하나가 아까운 상황인데 요동에서까지 피해를 감수한 군사행동을 할 가능성은 얼마 없다.'
"아마 놈들이 먼저 우리를 공격하려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양성으로 빨리 가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려는 목적이겠지요. 물론 여기서 놈들을 상대하느라 시간을 끄는 것이나, 이대로 놈들을 남겨두고 북진하는 것, 둘 다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놈들이 우리를 붙잡아 두려고 한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인데, 굳이 그걸 들어줄 필요는 없지요. 이대로 심양성 쪽으로 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대로 심양성까지 갔다가 저 북원 놈들이 여진족과 합류해서 같이 공격해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경략사의 말에 양녕은 속으로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북원과 오이라트가 교착상태라 저놈들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적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으니 역시 저런 얘기가 나오는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조선 내에서야 내가 별걸 다 아는 모습을 보여도 다들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지만, 명나라 경략사 앞에서 몽골 상황을 잘 아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조선이 북원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명나라 조정에서 나와 버릴 수 있어.'
양녕이 딱히 대답이 없자 경략사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기병을 상대하는 데에는 기병이 가장 좋고, 또 조선의 기병이 강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여기서 회경군 기병이 저 북원 기병들을 격파해 버리고 간다면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북원과 오이라트의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여기서 북원 기병을 미리 잡고 가자는 것은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뻔히 보이는 노림수도 있었다.
'저 북원 기병들을 격파한다 해도 애초에 북원은 이번 원정의 목표가 아니니 큰 공적으로 들어가지는 않겠지. 만일 그 상황에서 우리 기병이 피해까지 보았다면, 그 뒤에 여진족을 상대할 때 활약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여진족을 상대하는 중요한 전투에서 공을 세우는 것은 전부 명나라, 정확히는 경략사 자신이 되겠지. 영악하군.'
보고를 마치고 그대로 서 있던 이징옥도 그 노림수를 읽었는지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양녕은 또 걱정에 빠졌다. 원래 역사에서도 사신으로 온 윤봉이 패악질을 부려 백성의 개를 빼앗자 도로 빼앗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 적이 있을 정도로, 이징옥은 정의감이 투철한 나머지 가끔 접어주기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지금도 꼭 경략사에게 뭐라고 할 것만 같아 양녕이 조마조마했는데, 정작 이징옥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기병여단을 몰고 가서 놈들을 쓸어버리고 오겠습니다. 그러면 아무 걱정 없겠지요."
이징옥이 냅다 받아들여 버리자 경략사는 오히려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아예 자기 꿍꿍이를 못 읽어서 바로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또 무슨 계획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경략사의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조금 나아진 양녕이 이징옥에게 물었다.
"괜찮겠소? 상대는 그 강하다는 몽골 기병이오."
"괜찮습니다. 몽골 놈들이라고 살가죽이 쇠로 된 것도 아니고, 찔리면 피 나고 맞으면 부러지고 심해지면 죽는 건 똑같지 않겠습니까."
이징옥은 경략사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데다가, 자신만만함까지 더해져서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당당한 모습에 경략사는 고민에 빠지고, 양녕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괜찮군. 대신 기병 전력이 잠시 멀어지는 것이니, 그동안 남은 부대는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고 기다리고 있겠소. 마침 슬슬 뭐라도 먹을 시간이니, 밥이라도 지어 두고 있겠소. 식기 전에 오시오."
"알겠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강한 적이니 조심하시오. 또 멀리까지 나가 적을 상대하는 것이라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소. 위험해지더라도 우리가 바로 도와줄 수 없으니, 상황을 잘 살피고 판단해야 할 것이오. 대신 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써서 적들을 상대하시구려. 괜찮겠소?"
양녕이 옆에 앉은 김종서를 돌아보며 묻자, 김종서 역시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적들을 박살 내고 와서 따뜻한 밥을 먹어야겠군요."
승인을 받은 이징옥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천막 밖으로 나갔다.
* * *
잠시 후.
지휘부 천막을 나선 이징옥은 바로 준비를 하러 기병여단 지휘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따라오던 군관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경군 기병으로 북원 기병을 상대하는 걸 망설이시던 대군께서 갑자기 흔쾌히 승인하시는 것을 보니, 경략사가 뻔히 보이는 수를 쓰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 말에 이징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항상 신중하신 대군께서 설마 감정에 휘둘려 판단을 내리시겠는가? 대군께서도 다 방법이 있으셔서 저러신 걸세."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군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는가?"
"예. 멀리 나가 싸우는 것이라 바로 도와줄 수 없으니 조심하고, 대신 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써서 상대하라 하셨지요."
"그래. 경략사가 있어서 돌려 말씀하셨지만 그게 바로 대군께서 내리신 지시야. 기병여단만 멀리 나가서 싸우니 명나라의 눈에서 멀어진다. 그러니 명나라 눈에 띄는 것을 걱정해 사용을 자제하던 무기들도 마음껏 쓰도록 하라. 이런 뜻이지."
그 말을 이해한 군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이었군요. 알겠습니다. 다들 인화살부터 챙기라고 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