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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91화 (191/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91화

191화

1434년 4월 중순 모일.

요동성. 모 관아건물.

새로 편성된 정로군을 이끌고 바로 요동성으로 온 새 경략사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첫째로는 요동성이 이미 조선군에게 점령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성전 중이거나 막 함락시켰을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완전히 점령한 후 기다리고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설마 조선의 대군께서 직접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두 번째는 요동성에 양녕이 직접 와 있기 때문이었다.

"워낙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 데다가 일이 커졌으니까요.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질 사람이 와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양녕이 슬쩍 자신이 이번 회경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긴 하지만 군사에 관한 권한은 없다는 것을 흘리자 경략사는 약간 안심한 듯했다.

"그렇군요. 대군께서 실로 조선 왕실의 인재로서 사대부와 백성들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은 명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고, 저도 그 명성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대군께서 함께해 주신다니 든든합니다."

"과찬이십니다. 미력하나마 나라를 위해서 힘쓸 뿐이지요."

그렇게 대답한 양녕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일단은 명나라가 조선의 상국이기도 하고, 병력도 저쪽이 더 많으니, 원래대로라면 명나라에서 보낸 경략사가 조선의 총지휘관을 아래로 보고 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 경략사도 그렇게 생각하고 왔겠지. 하지만 나는 대군. 아무리 조선의 품계는 명나라보다 두 품계 낮은 것으로 취급한다고 하지만, 왕의 형인 나를 명나라의 정3품 정도로 대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조금 전에는 모범이 된다거나 명성이 높다는 식으로만 말했지만, 양녕이 지금까지 조선이 명나라에 보내던 조공 조건을 조선에 유리한 쪽으로 바꾸는 데에 영향력을 발휘한 당사자라는 것도 이미 명나라에 소문이 나 있는지, 경략사는 꼭 협상에 나서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양녕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요동성을 함락시키시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예. 그리 어렵지 않게 금방 뚫었습니다. 애초에 지키는 여진족 놈들부터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대신 놈들이 최후의 발악으로 군량고에 불을 질러서 거기서 좀 애를 먹었습니다."

"이런, 큰일이군요. 별문제는 없었습니까?"

"예. 다행히 크게 번지기 전에 화재는 잡았습니다. 대신 군량고에 있던 미곡들이 전부 재가 되어 버렸지요."

"여진족들은 습격당하면 식량을 파묻어 놓고 도망가는 법만 아는 줄 알았는데, 군량을 불태우고 결사 항전할 줄도 아는군요. 그럼 혹시 사로잡은 놈은 있습니까?"

"있습니다. 문초도 해 봤는데 별다른 중요한 건 모르는 것 같더군요. 직접 심문하실 수 있도록 넘겨드릴까요?"

그 말에 경략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여진족 놈들도 머리가 있다면 결국 죽거나 붙잡힐 것이 확실한 결사대에게 중요한 내용을 알려 주지는 않았겠지요. 그나저나 이렇게 정로군이 오기도 전에 함락시켜놓고 기다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경략사의 눈빛에는 약간 혼란이 감돌고 있었다. 성문이 박살이 나 있긴 하지만, 성벽이 멀쩡한 것이나 회경군에 환자가 딱히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무리하지 않고 함락시킨 것은 맞는 것 같았다.

다만 그것이 여진족 수비 병력이 약해서인지, 조선이 강해서인지를 짐작할 수 없던 것이다.

"어려운 것은 없었습니다. 여진족 놈들이 요동성을 포위해 식량이 떨어지게 한 다음 점령했으니 성안에 식량도 얼마 없었을 것이고, 수비 병력도 적고 성을 지켜본 경험도 없으니 제대로 막지도 못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회경군만으로도 가능하리라 판단하고 바로 점령을 시도해 성공한 것입니다. 만약 놈들이 강해 보였다면 기다렸다가 정로군과 함께 공성전을 했겠지요."

"그건 그렇군요."

여진족이 약한 덕분이라는 식으로 말한 양녕은 슬쩍 주제를 돌렸다.

"그리고 이제 두 나라의 군대가 합류했으니, 이번처럼 회경군이 단독으로 공성전을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경략사께서 지시하시는 것을 따라야겠지요. 그래서 말씀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아무리 수비 병력이 적었다고 하지만 철옹성으로 이름났던 요동성이 이리도 금방 함락되었으니, 앞으로 놈들은 최대한 수성전을 피할 것입니다. 애초에 여진족은 기병이 주력이기도 했으니, 앞으로는 요동의 이 넓은 평야에서 회전으로 명나라와 조선을 상대하려 들 것이 분명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경략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기병을 상대하는 데에는 같은 기병만 한 것이 없지요. 조선의 기병이 강하기로 유명하고, 지금 회경군에도 기병이 많이 있는 것 같으니 그 부분은 회경군을 믿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정로군 업무를 보러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경략사가 인사하고 나가자, 옆에 있던 김종서가 작게 말했다.

"탐탁지 않아 보이는군요. 앞으로 적 기병을 상대해야 하는데 조선 기병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예 조선에 원군을 요청한 것이 괜한 짓 아니었나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소. 원정의 부담을 덜고자 원군을 요청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강할 것이라는 생각은 못 한 것이지."

"아마 그것이겠군요. 원정이 끝난 다음에 회경군이 요동에 계속 남아 있으려 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뭐 어쩌겠소. 이미 저번 경략사가 당장의 내통이 의심된다며 회경군을 돌려보냈다가 요동성을 잃고 참수되었으니. 이번에도 금나라를 멸망시킨 다음이 걱정된다면서 또 회경군을 돌려보냈다가는 참수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아니오. 그나마 조선의 영향력을 줄이기라도 하려면 이번 원정에서 회경군이 활약할 기회를 줄여야 하는데, 그러면 또 자신들이 열심히 싸워야 하오. 그런데 보병 중심인 명나라로는 기병 중심인 적들을 상대하기 어렵지."

양녕은 즐겁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우리가 유리한 쪽으로 정로군을 써먹을 수도 있을 것 같소."

* * *

같은 시각.

요동. 파저강 인근 마을.

계호대대의 공격을 받은 적들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애초에 석주중대에게 근접전을 허용한 시점에서 예정된 결말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 마을 중앙에는 석주중대의 계림도에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다. 그 가운데 한 사내가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조금 전 병사들 무리의 대장이었던 사내였다.

"아쉽군. 정말로 부하투를 잡은 거였다면 조선에 큰 이득이 되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을 텐데 말이야."

아깝다는 듯 혼잣말을 한 동권두가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놈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지만 판차 놈하고 친하게 지내던 녀석인 건 기억나는구나. 좋아. 그럼 몇 가지 묻겠다. 네놈들이 여기 주민들을 피신시키려고 왔는데 정확히 지금 요동의 조선군과 명나라군의 움직임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지, 금나라 각 부의 버일러들과 그 가족들은 각각 어디에 있는지, 제철 시절이 호이파 강 인근에 있는 것이 맞는지, 있으면 위치가 어디인지 그리고 내가 거론한 게 아니더라도 아는 게 있다면 전부 말해라."

자신의 질문에도 사내가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동권두는 한숨을 쉬었다.

"뭐, 그럴 것 같기는 했다. 붙잡아라."

동권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에 서 있던 회령중대 병사들이 사내의 등을 걷어차 바닥에 엎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명은 등에 올라타 짓누르고, 다른 몇은 한쪽 손을 앞으로 뻗게 하더니 체중으로 눌러 고정했다.

"두만강 근처에서 배반자 놈들에게 하도 해서 익숙해질 지경이야."

중얼거린 동권두가 허리춤에 찬 장도를 뽑아 들고는 사내의 손이 있는 곳까지 와 몸을 낮추었다.

다음 순간 사내는 장도 칼날이 손톱 밑을 파고드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장도가 손톱 밑을 헤집을 때마다 사내가 고통에 몸을 꿈틀거렸지만, 장도를 든 동권두나 사내를 누른 병사들이나 아무런 망설임이나 거리낌 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하나같이 판차가 먼터무를 배반하던 날 가족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이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됐군."

뽑아낸 손톱을 옆으로 집어 던진 동권두가 다시 사내에게 물었다.

"다시 기회를 주겠다. 아는 걸 전부 말해라."

사내가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동권두가 다시 태연히 말했다.

"두 번째로 물었는데도 대답이 없었으니 이번엔 두 개다. 중간에 대답하겠다고 하더라도 시작한 게 끝날 때까지는 멈추지 않을 거고."

동권두가 다시 사내의 손으로 장도를 가져갔다.

사내는 계속 몸부림쳤지만, 동권두가 손톱 두 개를 연속으로 파내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좀 말할 생각이 들었나?"

동권두의 질문에 사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좋아, 말해라. 지금 저쪽에서 다른 놈들도 심문을 받고 있는데, 너희가 하는 말이 일치하지 않으면 손톱 정도로 안 끝날 거라는 건 알아두고."

"조선군과 명나라군의 자세한 움직임은 모른다. 그저 조선군이 요동성으로 접근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니, 조선에 가까운 쪽 마을 주민들을 미리 대피시키라는 지시가 있었을 뿐이다."

"애초에 요동성이 오래 버틸 거라는 생각도 안 한 것이군. 그리고?"

"각 부 버일러들은 직접 부대를 이끌고 다니고 있다. 버일러의 가족들은 나눠진 부대를 이끌거나 중요한 시설에 보내져서 관리를 맡은 것 같은데,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럼 아는 것만 말해라. 네놈이 판차하고 가까웠으니 판차의 가족들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알 것 아닌가."

한층 싸늘해진 동권두의 목소리에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이파 강 근처에 제철 시설이 넓게 퍼져 있고, 그 시설들을 관리하러 부하투 님이 가 있다. 그거 말고 자세히는 나도 정말 몰라."

"그 정도면 충분하군. 다른 건?"

"조선과 명나라로 사신이 갈 거다. 장차 세상에 여진, 몽골, 삼한, 중국의 네 천자를 세워 솥의 네 다리처럼 균형을 세울 것이라는 야르하치님의 국서를 전달하러 가는 사신이지. 이 이상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정말이야."

"네 천자를 세워? 별 특이한 소리를 다 하는군."

그때 저쪽에서 굳은 표정의 등자사가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소법? 자네가 심문한 놈들한테서 뭐라도 알아낸 건가?"

등자사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놈도 네 천자를 세울 것이라는 국서를 조선과 명나라로 보냈다는 소리를 했나?"

"그래. 했네. 대체 뭔지 모를 소리지. 자네가 심문한 놈도 그 소리를 했나 보구먼."

"내용이 일치하는 걸 보니 진짜인가 보군. 큰일인데 이거……. 빨리 요동성과 한성부로 전령을 보내야겠어."

동권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이놈이 한 네 천자 운운이 대체 무슨 뜻이기에 자네가 그리 당황하는가?"

"그 이상한 소리가 대체 무슨 뜻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세우려는 것은 네 천자인데, 사신을 보내는 것은 명나라와 조선뿐이라는 게 중요한 것이지."

그 말에 드디어 상황을 이해한 동권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그래. 북원은 이미 네 천자를 세운다는 야르하치의 계획을 알고 있고 동조도 했다는 것이지. 그런데 북원이 계속 명나라 후방의 장성을 넘어서 약탈이나 하는 대신, 금나라와 협력해서 요동에 와 있는 명나라와 조선의 병력을 궤멸시킬 수만 있다면 더 확실하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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