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90화
190화
1434년 4월 중순 모일.
요동. 파저강 인근 숲속.
별동대 역할을 맡은 계호대대는 우선 압록강에서 가장 가까운 파저강 인근의 여진족 마을을 정탐 중이었다.
"뭐 좀 찾아낸 거 있는가?"
흩어져 정탐을 마치고 다시 합류한 동권두가 등자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이고, 중요한 시설도 안 보여. 밭에도 순무만 심어져 있네. 소법 자네 쪽은 어떤가?"
"똑같아. 저 위쪽으로도 밭에 순무만 보이네."
등자사의 대답에 동권두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갈량이 순무를 가리켜 버려도 아깝지 않은 작물이라 했다고 하지. 아무래도 여기는 버릴 생각인가 보군."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걸세. 그냥 버릴 생각이면 마을을 싹 비우고 밭도 그냥 버려두지, 굳이 뭘 심지는 않았을 것이야. 버려도 아깝지 않은 작물인 순무를 심었다는 것은, 다르게 보면 안 버리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니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아직 사람도 머무르고 있는 것이겠지. 아예 아무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야."
"자네 말을 들으니 그게 맞는 것 같군. 그렇다면 일손 하나가 부족한 놈들이 여기 주민들을 위험하게 그냥 두지는 않았을 걸세. 아마 누군가 맡아서 관리 중일 것 같은데."
등자사가 천천히 생각해 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우선 야르하치의 훌리가이부는 여기 북쪽인 허투 알라가 근거지니 그쪽에 있을 것이고, 훌룬부도 근거지인 저 북쪽 송화강 꺾이는 곳에 모여 있겠지. 무타우타는 호이파부를 받았다고 하는데, 호이파가 정확하게 어느 곳인가?"
"허투 알라보다도 북쪽에 흐르는 호이파 강을 말하는 것이네. 원래는 훌룬의 땅이었지."
"그렇다면 역시 여기에서 먼 곳이 근거지로군. 그렇다면 이 일대를 관리하는 것은 이전부터 이 일대에 자리를 잡았던 오돌리부일 가능성이 커. 그렇다면 판차 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있을 테니 측근을 대신 보냈겠지."
그 말에 동권두는 무언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 말했다.
"판차 놈에게 부하투라는 이름의 외동아들이 있긴 하네. 나에게는 사촌이 되지. 성격이 안 맞아서 전혀 친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그러면 그놈이 여기를 맡았을 수도 있겠군."
그 말에 동권두의 눈에 잠시 복수의 불꽃이 튀었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네. 여기에는 일단 제철 시설이 보이지 않으니 다른 곳에 있을 것인데, 허투 알라는 명나라 쪽에 너무 가깝고, 수운을 활용하기도 어려워. 중요한 기술인데 나중에 합류한 훌룬부 쪽에 두었을 리도 없네. 그런데 제철 기술을 완성한 것은 우디거들이고, 그 우디거들이 무타우타가 이끄는 호이파부가 되지 않았는가? 나도 제대로 가 본 적은 없지만 호이파 강은 주변에 숲이 많은 데다가, 강이 크고 지류도 많네."
"과연, 연료를 구하는 것이나 운반하는 것이나 호이파 강 근처가 제철에 유리하니 제철 기술을 가진 우디거들을 거기에 살게 했고, 사는 곳 강 이름을 따서 호이파부가 되었다는 것인가. 그런데 그게 판차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무타우타나 우디거들이나 그리 똑똑한 놈들이 아니야. 단순히 쇠를 만드는 것은 잘 할지 몰라도, 그 밖의 관리 업무를 하기에는 머리가 따라 주지 않으니 오돌리부의 도움을 받고 있을 걸세."
"오돌리부도 호이파 강 근처가 근거지일 것이란 말인가?"
"근거지까지는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순무밭보다는 제철 시설이 더 중요하지 않겠나. 그러니 만일 판차가 자기 외동아들인 부하투를 보내 관리한다면 여기가 아니라 호이파 강 근처의 제철 시설에 보내겠지."
"그럴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괜히 별동대의 존재가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이런 순무밭만 있는 곳을 파괴하느니, 여기는 그냥 두고 북쪽으로 가서 호이파 강 근처의 제철 시설을 노리는 게 낫겠군. 그 부하투라는 놈을 잡기에도 그게 더 확률이 높은 것 아닌가. 혹시라도 여기가 습격당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놈이 몸을 사리고 달아날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 말에 동권두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부하투를 노린다면 그게 좋겠지. 하지만 우리 임무 목표가 판차만 있는 것은 아니야. 순무밭도 일단은 농토고, 사람이 살고 있으니 물자도 있을 것이야. 여기를 파괴하는 게 좋을 것 같네."
"하지만 버릴 생각으로 중요한 것은 다 치운 마을이지 않은가. 거기에 우리의 한정된 무기를 낭비해 줄 필요는 없어. 차라리 가만히 두어 방심하게 만든 다음 제철 시설까지 가서 공격하는 게 더 나아."
"제철 시설이 중요한 것은 놈들도 아는데 여기를 건드리지 않고 간다고 경비가 허술하겠는가? 게다가 시간을 들여서 중요한 시설을 파괴하는 것보다도 급한 일이 있네. 아마 지금쯤 회경군 본대가 요동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걸세. 우리가 별동대로서 후방을 파괴하기 시작해야 적들이 요동성에 원군을 보내는 데에 집중하지 못하고 후방을 지키느라 병력이 분산될 것이야."
잠시 망설이던 등자사가 심호흡을 하고는 동권두에게 말했다.
"자네가 판차에게 복수하겠다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이번 원정이라는 큰일을 그르치려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나도 아네. 하지만 그렇다고 판차에 관련된 것들을 모두 사사로운 감정이라 생각하고 억누르다 보면 오히려 제대로 된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어."
등자사의 직언에 잠시 고요가 찾아왔다. 가만히 있던 동권두는 한참 생각하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등자사에게 말했다.
"자네 말이 맞아. 판차는 내 원수일 뿐만 아니라 오돌리부의 버일러기도 하지.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 정말로 중요한 판단을 그르칠 뻔했군. 여기는 그냥 놔두고 후방을 노리세."
"내 말을 받아들여 줘서 고맙네. 그럼……."
그때 풀숲에 숨어 마을을 살피던 회령중대원 하나가 동권두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적 병력 십여 명이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숫자나 무장을 보아서 어딘가 공격하러 가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요동성에서 전투가 시작된 것을 보고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고 온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동권두와 등자사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기척을 죽이고 풀숲으로 가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기병 몇 기와 보병 몇 명이 마을로 들어와 있었다.
그 기병 중 가장 튼튼하게 무장한 놈을 조심스럽게 가리키며 등자사가 물었다.
"저놈이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 같은데, 혹시 저놈이 부하투인가?"
"투구를 눌러써서 확실하지는 않네. 하지만 갖춰 입은 모양새를 보면 중요한 녀석인 것은 확실해. 저놈은 붙잡을 만하겠군."
"자네는 이 마을을 공격하자는 의견이었고, 나는 이 마을은 그냥 두고 다른 놈을 노리자는 의견이었는데 한 번에 해결되었군."
그 말에 동권두가 즐겁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그러면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겠군. 급습할 준비가 되면 손짓으로 알려 주게. 이걸 던져서 터뜨리고 그걸 신호 삼아서 돌격하는 걸세. 알겠지?"
"알겠네."
등자사가 부대원들을 이끌고 위치를 잡으러 이동하자, 동권두는 손에 든 것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걸 쓸 때가 되었군."
동권두가 손에 든 것은 주먹만 한 크기의 둥근 쇳덩어리였다. 철과 화약 생산이 늘어난 덕분에, 양녕은 이번 원정을 앞두고 원래 역사보다도 백여 년 일찍 비격진천뢰를 개발해 보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격진천뢰에 쓰인 기술을 응용해 기존에 쓰이던 질려포통도 개량했다.
마름쇠와 화약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 던져 터뜨려 공격한다는 질려포통의 기본적인 요소는 그대로 두었지만, 비격진천뢰처럼 몸체를 통짜 무쇠로 만들어 폭발 시 쇠파편이 날아가도록 만들었다. 거기에 몸통 안에 들어가는 심지를 사용해 던져도 심지가 꺼지지 않으며, 불을 붙인 다음 터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도 상당히 균일하게 만든 덕분에 사용하기 더 좋았다. 질려포통의 이름을 계승했을 뿐, 사실상 원래 역사에서 훗날 만들어졌던 수류탄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준비가 다 끝난 모양이군. 준비해라."
저 아래쪽에서 등자사가 손짓하는 것을 본 동권두는 병사들에게 그렇게 지시하고는 품에서 백린 성냥을 꺼냈다. 질려포통 몸체에 성냥을 그어 불을 켠 다음 심지에 불을 붙이고, 타들어 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잠시 들고 있다가 힘껏 집어던졌다.
멀리 날아간 질려포통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병사들 근처 땅바닥에 떨어졌다.
"뭐야 이건?"
"쇳덩어리 같은데?"
"저쪽에서 날아왔는데, 혹시 조선군이 쏜 거 아냐?"
"조선군이 대포도 아니고 이런 주먹만 한 쇳덩어리를 날려서 우리를 공격한다고? 이걸로 누구 머리 하나나 제대로 깨겠냐?"
"하긴 그건 그렇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까이 가지 말고, 나하고 같이 몇 명 가서 이게 날아온 쪽에 뭐 있는지 확인해보자."
그렇게 말한 병사가 발걸음을 옮기려 하기가 무섭게 질려포통이 폭발하며 금속 파편을 사방으로 날렸다.
가까이 있던 병사들은 파편과 폭발에 맞아 쓰러지고, 맞지는 않은 병사들도 놀라서 당황했다.
적의 기병들이 탄 말이 폭발에 흥분해 날뛰기 시작하는 것을 본 등자사가 허리춤에서 계림도를 뽑아 들며 외쳤다.
"돌격 앞으로!"
이미 질려포통의 폭발에 놀란 상태에서 풀숲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계림도 칼날을 든 석주중대 병사들까지 뛰쳐나오자, 날붙이가 주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빠진 여진족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놀랄 것 없다! 아까 건 모양만 다르지 우리가 쓰는 진천뢰하고 같은 거야! 그리고 놈들이 가까이 온다는 얘기는 놈들도 진천뢰를 더 쓰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다! 침착하게 막아!"
그 말에 여진족 궁수 몇이 정신을 차리고 화살을 쏘려 했지만, 돌격하는 석주중대의 뒤에서 날아온 회령중대의 화살에 맞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회령중대의 화살을 피한 여진족 궁수들이 화살을 쏘았지만, 돌격해 오는 석주중대의 모습에 위축되어 제대로 맞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껏 제대로 쏜 화살도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화살비를 무사히 뚫고 가장 먼저 마주친 여진족 병사를 단칼에 베어 버리며 등자사가 외쳤다.
"하하하! 이 갑옷이 그야말로 비사문천의 가호와 같구나!"
석주중대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돌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과, 자신들을 엄호해 줄 회령중대에 대한 신뢰감도 있었지만 입고 있는 갑옷의 방어력이 뛰어난 것도 큰 이유였다.
칠주도 정벌 과정에서 일본 갑옷이 조총에는 뚫렸지만 조선의 화살은 잘 막아 냈던 것에 주목한 병조가, 칠주도에서 일본 갑옷 장인들을 데려와 군기시 갑옷 장인들과 협력해 만들게 한 신형 갑옷이었던 것이다. 일본 갑옷의 화살 방어력을 추가로 얻은 대신 기존의 두정갑보다 조금 무거워지기는 했으나, 석주중대는 활과 화살을 휴대하지 않으니 그 점을 따져보면 별 차이도 없었다.
"좋아, 석주중대가 적에게 근접했으니 우리도 사격을 멈추고 마을로 들어간다! 놈들이 습격 사실을 알고 대비하는 걸 막으려면, 습격 사실을 알릴 놈이 없으면 그만이지. 한 놈도 달아나지 못하게 하도록!"
"예!"
우렁차게 대답한 회령중대 병사들이 마을 전체를 포위하듯 전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