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89화
189화
1434년 4월 초순 모일.
요동. 요동성 성문 앞.
성문 근처까지 따라온 병사들을 남겨두고, 홀로 말을 타고 성문 가까이 간 김종서가 위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나는 조선군 총대장 김종서다!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분위기가 잔뜩 긴장된 가운데, 갑자기 성문 위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김종서의 투구 위를 스치고 날아가 땅에 박혔다.
뒤에서 지켜보던 회경군 병사들이 깜짝 놀라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준비를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김종서는 놀라기는커녕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 섞인 큰 목소리로 외쳤다.
"화살 말고 내 말 들을 사람을 보내라고, 이 멍청한 오랑캐 놈들아!"
그 모습에서 보통 사람이 아님을 느꼈는지 여진족 병사 몇이 성문 위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 제일 가운데에 선, 지휘관으로 보이는 여진족 병사가 김종서의 담력에 지지 않겠다는 듯 목청을 키워 외쳤다.
"그래, 무슨 할 말이냐!"
모습을 드러낸 병사가 여럿이고 차림새가 제각각인 것을 확인한 김종서는, 분명 수비 병력은 여러 부족에서 고르게 모았을 거라는 양녕의 조언을 떠올리며 말했다.
"홀랑 속아서 사지에 버림받은 너희하고 굳이 싸울 것까지도 없어서 항복을 권고하려고 왔다!"
"하하하! 그런 뻔한 소리에는 우리도 안 속는다! 증거도 없는 소리를 할 거면 당장 꺼져라! 안 그러면 다음 화살은 제대로 머리통에 조준하고 쏴줄 테니까!"
"증거라면 있지! 설마 증거도 없이 이렇게 왔겠느냐!"
그 말로 여진족 병사들을 집중시킨 김종서가 이어서 외쳤다.
"너희들 중에 사이 안 좋은 부족 놈들이랑 같이 여기에 보내진 놈은 없을 거다! 그 부족 놈들이 너희를 죽으라고 버린 거니까!"
"그게 증거라고? 괜히 서로 싸울 수 있으니 사이 안 좋은 부족끼리는 같이 배치 안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으하하하!"
비웃는 병사를 향해 김종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데 왜 그중에서도 하필 너희가 속한 부족에서만 뽑아서 보냈는지도 당연한 것 같으냐?"
"무슨 소리지?"
"똑같이 야르하치 밑에 복속되면서도 너희하고 사이가 안 좋은 부족들이 너희 부족들보다 더 많은 대접을 받지 않았느냐? 거기서 이미 너희보다 우대를 받아 중요한 자리를 꿰찬 것이고, 이렇게 죽으라고 보내는 곳에 너희를 보낸 것이지!"
그 말에 여진족 병사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는 것을 보고 김종서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원래 똑같은 대접을 받더라도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다. 하물며 그냥 남도 아니고 사이 안 좋은 부족이 대상이라면 무조건 그 부족들이 과분한 대접을 받은 거로 보일 수밖에 없지. 지금 저놈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면, 너희도 너희하고 사이 안 좋은 부족이 너희 부족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았냐며 서로 물어보고 있는 것이겠군.'
"어때! 이제 너희가 속아서 사지에 버려졌다는 내 말이 좀 믿어지느냐!"
가운데에 서 있던 여진족 병사 하나가 웅성거림을 진정시키더니 말했다.
"그럴싸하긴 하군! 하지만 우리가 다른 부족에게 버림받았는지 조선인인 너희가 어찌 아느냐?"
"야르하치, 판차, 무타우타 전부 조선이나 명나라 밑에 있던 놈들이고, 우리를 여러 번 속인 놈들이다. 우리가 놈들 수법에 너희보다 더 많이 당했으니 당연히 잘 알지! 이리도 멍청한 소리만 하는 걸 보니 왜 속아서 왔는지 알겠구나!"
김종서는 이어서 준비해 온 마지막 말을 날렸다.
"그래도 못 믿겠다면 너희 식량 상황을 다시 계산해 봐라! 아마 너희가 적당히 우리를 막다가 죽으라는 생각으로 보낸 것이라, 우리의 포위를 오랫동안 견디기에는 부족하게 챙겨 줬을 테니까! 그리고 요동성 주민들도 거의 다 데려갔을 거다! 너희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주민들은 데려가서 일을 시켜야 하니까!"
"너희 얕은수에는 안 넘어간다!"
병사는 무언가 더 이어서 말하려 했지만, 김종서는 시큰둥한 얼굴로 끊으며 말했다.
"안 믿으면 말아라! 너희가 믿건 말건 우리는 요동성을 함락시킬 거니까! 오늘 중으로 항복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는 내 목소리가 아니라 조선의 대포 소리를 듣게 될 거다!"
그대로 말을 돌려서 되돌아가는 김종서의 뒷모습을 보며, 여진족 병사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퍼져 갔다.
* * *
잠시 후.
회경군 지휘부 천막.
"정말로 대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더니 놈들이 엄청 동요하더군요. 어떻게 아신 겁니까?"
김종서의 질문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흔히들 당 태종이 요동성을 금방 함락시킨 것을 대단하다고 여기지만, 사실 수 양제에게서 요동성을 지켜낸 고구려 군사들이 더 대단하오. 요동성은 크기가 클 뿐만이 아니라 평지에 있기 때문이오. 성벽이 크고 기니 위에 올라가서 지켜야 할 사람이 많아지고, 평지에 있으니 포위를 뚫고 몰래 보급을 받기도 어렵지.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 수나라의 공격을 버텨 냈기에 고구려 군사들이 대단한 것이오."
"그런 것이군요. 그런데 그게 놈들의 동요와 관련이 있습니까?"
"지금 성벽이 비교적 멀쩡한 것을 보니 놈들 역시 요동성을 포위해서 항복을 받아 낸 것 같소. 요동성에 주둔 중인 명나라 병력이 적지 않았을 테니 식량이 금방 바닥났을 것이고, 요하가 놈들 손에 떨어지면서 고립되었으니 원군을 기대할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오."
"아, 이제 좀 알겠습니다. 막상 요동성을 점령하고 보니 방어의 어려움이 그대로 자신들에게 돌아왔겠군요."
양녕이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렇소. 놈들은 저 큰 요동성을 지키기에는 숫자도 적고, 애초에 이런 성에서 적을 방어해 본 적도 없을 것이오. 그렇다고 이런 요충지의 성을 비워 둘 수도 없지. 어쩔 수 없이 병사들만 배치하고 주민들은 모두 이주시켰을 것이오. 식량 소비를 줄이려면 그게 최선이니 말이오."
"그런데 식량이 부족할 거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놈들이 의심에 빠져서 식량도 부족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계책입니까?"
"그것도 있지만, 실제로도 조금 부족할 것이오. 여기 요동성은 요충지의 중요한 성이긴 하지만, 명나라도 지키기 어려워해서 자신들이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인 만큼 금나라 쪽에서도 끝까지 지킬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오. 조선과 명나라의 병력을 어느 정도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함락되더라도 목적은 달성한 것이라 생각하겠지."
"요동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결사의 각오로 방어를 맡았는데, 그게 사실은 자신들이 속아서 맡게 된 것이라는 의심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군요."
"그렇소. 포위된 상황에서 성을 지키는 데에 물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강한 의지요. 그런데 의심에 빠지면 그 의지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역으로 작용해 버리지."
"어쩌면 정말로 항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하더라도 상관없소. 이미 적들의 의지가 많이 꺾였을 테니 함락시키기는 더 수월해졌을 것이오."
* * *
다음 날.
요동. 요동성 성문 앞.
"마지막 항복 권고는 안 해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지금까지 항복을 안 했다면 할 생각이 없는 것이야. 싸울 마음을 먹은 놈들인데 괜히 성문 앞까지 갔다가 화살 맞을 필요는 없지."
군관의 말에 대답한 김종서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청동제 대포 몇 문이 성문을 겨누고 있었다. 김종서가 있는 이쪽 성문만이 아니라 요동성의 모든 성문에 이처럼 대포가 겨누어져 있을 것이었다. 그 모습을 든든하다는 듯 본 김종서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어제 중으로 항복하지 않으면 오늘 아침에는 내 목소리가 아니라 조선의 대포 소리를 들을 거라 엄포를 놓았으니, 그 말을 지켜줘야지.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신호와 동시에 방포하게!"
"예!"
김종서가 다시 말을 돌려 진영 뒤쪽으로 향하고, 모든 대포가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군관이 외쳤다.
"신호 화살을 터뜨려라! 터지는 것과 동시에 방포!"
이윽고 하늘로 쏘아 올려진 화살이 사방으로 불꽃을 날리며 터지고, 청동 대포들이 굉음을 내며 포탄을 성문으로 날려 보냈다. 불꽃 신호를 본 다른 성문의 대포들도 사격을 차례대로 개시하면서, 요동성 전체가 지축이 뒤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모습을 진영 뒤에서 보던 양녕이 작게 말했다.
"잘 되면 좋겠군."
조선인만큼은 아니지만 여진족 역시 활에 능하다. 쓰는 활의 성능은 조선 활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높은 성벽에서 아래를 향해 쏜다면 위력은 충분했다. 게다가 요동성은 평지에 지어졌다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성벽을 높게 만들었으니 애초에 성벽을 올라 공격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대포를 성벽 너머로 쏘아 공격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적들의 방어병력이 적고 성은 크니 성안에는 사람이 없는 공간이 많을 터였다. 기껏 쏘아 넘긴 포탄이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떨어진다면 화약 낭비일 뿐이었다.
"잘 될 것입니다. 애초에 성문을 뚫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습니까."
어느새 진영 뒤로 돌아온 김종서가 그렇게 말하면서 양녕 옆에 섰다.
김종서의 말대로 회경군이 선택한 공성 방법은 성문 돌파였다. 거대한 요동성 성벽을 대포로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화약 소모도 많아서, 결국 야르하치가 원하는 대로 될 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성문을 동시에 공격한다면 적들은 적은 방어병력을 성문마다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성문에 구멍이 생겼다! 다음 단계 준비!"
쉴 새 없이 포탄을 두들겨 맞은 성문이 마침내 너덜너덜해진 것을 본 군관의 지시에, 대기 중이던 모든 병사가 일사불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같잖은 나무통 진천뢰로 몇 번 재미를 봤다고 기고만장해진 저놈들에게 조선의 비격진천뢰 맛을 보여 줘라! 방포!"
청동 대포의 포구에서 날아간 비격진천뢰 몇 발이 이미 다 부서진 것이나 다름없던 성문의 나무판자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폭음이 연달아 몇 번 들렸다. 일부러 비격진천뢰마다 심지 길이를 조금씩 다르게 해서, 먼저 터진 비격진천뢰의 폭발이 다른 비격진천뢰를 튕겨 보내게 해 더 넓은 면적을 공격하려는 작전이었다.
"이제 성문을 돌파한다!"
조란환이 장전된 산탄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미리 준비 중이던 기병들의 뒤에 타고 성문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성문 위를 지키던 여진족 병사들이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화살을 쏘기 시작했지만, 뒤이어 회경군 포병들이 쏜 포탄들이 문루를 뚫고 지나가는 바람에 무너져내린 지붕에 깔려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문루 옆에 나와 있던 덕분에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여진족 병사들은 여전히 화살을 들고 견제를 시도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저격 개시! 굳이 확실히 죽이지 않아도 된다! 놈들이 화살을 쏘러 몸을 내밀지 못하게만 만들면 충분해!"
"예!"
군관의 지시에 대답한 병사들이 일반 조총과는 길이부터가 남다른 조총을 하나씩 들고 성벽 위를 겨누기 시작했다.
철제 조총이 보급되기 시작했다지만 여전히 청동제 조총의 정밀함을 따라오려면 먼 상황이었다. 그래서 철제 조총이 보급되며 회수된 청동제 총열들은 녹여서 대포를 만드는 대신 긴 총열로 만들어 저격용 조총, 통칭 천보총을 만든 것이었다.
"오늘 저녁밥은 요동성에서 먹겠군! 전군 진격!"
기병들의 뒤에 타고 천보총 포수들의 엄호를 받으며 성문에 근접한 산탄총 포수들이 말에서 내려 성문으로 진입하는 동안, 회경군 보병부대가 천천히 요동성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