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88화
188화
1434년 4월 초순 모일.
의주부 의주목. 회경군 임시 주둔지.
날이 풀리고 마침내 명나라 조정에서 곧 새롭게 편성된 정로군이 요동으로 출정할 것이니 조선에서도 출정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여진족에게서 탈출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정리한, 적들의 상황이나 편제에 대해서 최대한 알아낸 내용을 참고하라며 보내주었다.
출정을 앞둔 회경군 지휘부는 그 내용을 토대로 앞으로의 방침을 짜기 위해 모여 있었다.
"버일러가 다스리는 네 개의 부로 구성된 나라라. 오랑캐들치고는 제법 나라 구색은 갖춘 것 같습니다."
김종서의 말에 양녕이 대답했다.
"얼핏 그럴싸해 보이지만 놈들은 이제 막 여진족을 규합한 상태요. 구색을 갖추기는 했으나 그 부라는 것이 조선이나 명나라의 군현에 비할 것은 아닐 것이고, 아마 고구려에서 부족들을 그대로 부로 개편했던 것을 따라 한 것 같소."
"하긴, 이 부 이름들이 지역 이름이긴 하지만 여진족 부족 이름이기도 하지요. 이 호이파라는 부족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긴 한데, 아무래도 무타우타의 부족에 야르하치가 새로 내려준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부족이 이름만 바꾼 셈이겠습니다."
"그렇소. 이 자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부 아래의 편제 역시 원래 각 부족에 복속되어있던 소부족들 그대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오. 군대 편제 역시 기껏해야 사냥 갈 때 무리를 짓던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겠지."
양녕의 말을 들은 중군사단장 겸 1보병여단장 황보인이 끄덕이며 말했다.
"여진족의 사냥 무리가 그대로 군대 편제가 되었다고 하면 한 부족 출신 사내들이 한 부대가 되는 셈이겠군요. 멀고 가까운 정도의 차이가 있어도 한 부족 안에서 혈연으로 이어진 사이이니 결집력이 대단할 것이고, 이미 여러 번 같이 사냥에 나섰던 적이 있으니 호흡도 잘 맞겠습니다. 상대하기 까다롭겠군요."
"그렇소. 하지만 반대로 다른 부대, 그러니까 다른 부족 출신들과 협력해서 작전을 하는 것은 잘되지 않을 것이오. 자기 부족 출신이 지휘관이라면 모르지만 다른 부족 출신이 지휘관이라면 제대로 말을 따르지 않을 테니 말이오."
"그렇다면 아마 부와 그 부에 속한 소부족들 단위로만 움직이겠군요. 부족들이 다른 부족의 말은 듣지 않는다 해도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버일러의 지시에는 따를 테니 말입니다."
김종서의 말에 양녕이 끄덕이고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소.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적들의 가장 큰 부대 단위인 부가 각각 어떤 특성이 있는지 분석해 그걸 토대로 적들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최대한 거기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오."
양녕은 탁자 위에 올려진 종이 위의 내용을 짚어 가며 말을 이었다.
"우선 야르하치가 이끄는 훌리가이부요. 야르하치가 대금황제를 자처했으니 야르하치가 버일러를 겸하는 훌리가이부는 저들 기준으로는 황족이자 수도 그 자체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하다고 해서 뒤에 물러나 있지만은 않을 것이오. 저번에 야르하치가 직접 기병을 이끌고 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전투에 참여하려 들 것 같소."
"아마 정예병력은 거기 다 있을 것 같습니다. 야르하치 본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나, 정예병력을 가까이 두고 본인이 빠르게 바로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나 말입니다."
"다음으로는 도르호치가 이끄는 훌룬부요. 이들은 저 북쪽 송화강 일대 평야에서 살던 이들이오. 농사가 어려운 곳에서 살아왔으니 사냥이 중심이었을 것이고, 그런 만큼 아마 기병에 능하겠지. 하지만 넓고 거친 송화강을 끼고 살았으니 배를 타는 데에도 능할 것이오. 혹시라도 병력을 배에 태우고 강을 따라 빠르게 움직여 후방을 기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오."
"요하가 놈들 손에 떨어진 상태니 강을 군대의 기동로로 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고려해 둬야겠군요."
"이어서 무타우타의 호이파부요. 숲과 산, 근접전에 능한 것이 우디거들의 특징이니, 샹기아 하다에서 도끼를 들고 돌격해 북로군 진영을 뚫었다는 게 아마 이들일 것 같소.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요동의 전투는 화포와 기병이 주력이 될 것임은 저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오. 제정신이라면 보병인 우디거들을 거기에 그냥 쓰지는 않겠지."
"그렇다고 안 쓰지는 않겠지요. 아마 명나라나 조선이 화포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굳혔을 경우에 먼저 보내서 기병이 뚫고 들어갈 돌격로를 만들 때 쓰거나, 아니면 기습하는 데에 쓸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분석에 장수들이 추가적인 분석을 내놓는 것을 흡족한 얼굴로 들으며 양녕이 설명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판차가 이끄는 오돌리부요. 명나라에서도 훌리가이부 만큼이나 오래 접했던 이들이라 그런지, 이들의 정체는 빨리 파악한 것 같소. 사르후에서 진천뢰와 대포를 동시에 쓴 것이 바로 이들이라 하오."
그 말에 김종서가 짧게 탄식하며 말했다.
"말 타는 재주가 뛰어났던 놈들이 이제는 화약까지 다룰 줄 알게 된 것이군요. 어쩌면 훌리가이부의 정예병력보다도 위험할 수 있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오. 일단 내 분석은 이 정도요. 칠주도에서 그랬듯 나는 군사를 움직이는 일에는 직접 나서지 않고 공들께 맡길 것이지만, 대신 내가 상황을 파악하고 조언을 할 수 있도록, 공들께서는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 대로 되도록 빨리 내게도 알려주기 바라오."
"물론입니다."
"대신 이번 요동 원정에서 한가지 내 뜻대로 했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 괜찮겠소?"
"무엇입니까?"
양녕은 조금 떨어진 곳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던 동권두와 등자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계호대대를 별동대로 쓰게 하고 싶소. 지금 계호대대의 겸임 대대장 자리가 도원수에게서 군단장께로 넘어온 상태니, 군단장께서만 승인해 주시면 문제없을 것이오."
그 말에 김종서가 잠시 생각하는 동안, 오히려 동권두가 놀란 표정으로 양녕에게 말했다.
"별동대라니, 저희가 그렇게 무력에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무력이 뛰어난 이들이면 본대의 전방에 세우지 별동대로 보내지 않네. 별동대는 무력이 아니라 맡기려는 특별한 임무를 잘 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맡겨야 하는 법이야. 그리고 자네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어."
"능력이라 하시면……."
"자네가 이끄는 회령중대는 여진족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짧지만 여기 요동 일대에서도 지내본 적이 있어 지리에도 익숙하네. 또 석주중대는 시가전에 능하지만 숲이 많은 요동의 산간지역에서도 비슷하게 활약할 수 있을 것이야."
양녕의 말을 듣던 김종서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무력이 아니라 그런 능력을 살리는 별동대라, 어떤 임무를 맡기시려는 겁니까?"
"적들의 후방을 다니며 농토나 식량, 건물이나 물자를 파괴하고, 중요한 인물들이나 그 가족을 암살하거나 납치하는 것이오."
"계호대대 전체를 합쳐도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은데, 숨어다니면서 할 수 있는 암살이나 납치는 몰라도, 농토나 건물을 파괴하고 다니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꼭 그렇지도 않소. 이번 원정에서는 인화살을 정말로 써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쓰지 않기로 하지 않았소?"
"예. 조총이나 총검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은 몰라도, 인화살은 요동의 강풍이 역풍으로 불 때 잘못 쓰면 아군이 위험해질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 그 존재가 알려질 경우 분명히 기술을 빼내려 들 것이니까요."
"그렇소. 하지만 명나라의 눈이 닿지 않는 후방에서라면 적당히 쓸 수 있지 않겠소? 강풍만 불면 흙먼지가 날릴 정도로 건조한 것이 요동이니, 인화살을 쓰면 밭이나 마을에 불을 내기 쉬울 것이오. 물자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체불명의 무기에 신경 쓰느라 적들이 전투에 온전히 집중하게 만들 수 없는 효과도 노릴 수 있소."
"괜찮군요. 적들의 후방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 조금 위험하긴 하겠지만, 두 사람이 받아들이겠다면 계호대대를 별동대로 써서 대군께서 말씀하신 임무를 맡기는 것은 저도 좋다 생각합니다."
"하겠습니다."
김종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 동권두의 표정에는 비장함과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위험한 일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을 맡겨 주신다고 하시는데 어찌 꺼리겠습니까.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동권두의 눈빛에 복수심이 언뜻 비치는 것을 본 양녕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야르하치를 따르는 여진족 놈들은 전부 직간접적으로 먼터무의 원수이니, 놈들의 마을을 태우고, 납치하고, 죽여서 복수할 기회라 이건가.'
"저도 하겠습니다. 저희의 무예가 이 어려운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다고 여기시어 맡겨 주시는 것이니, 석주중대 모두가 대군께 감사하며 이 임무를 맡을 것입니다."
등자사 역시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김종서가 양녕에게 말했다.
"그러면 계호대대를 별동대로 쓰는 것으로 결정된 것이로군요. 일단은 대군께서 말씀하신 임무를 맡기겠습니다. 혹시 추가로 지시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양녕은 동권두와 등자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거나, 달성하지는 못했더라도 위험한 상황이 되면 무리하지 말고 지체 없이 복귀하도록 하게. 후방에는 적장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도 있으니 말이야."
먼터무의 원수인 판차와 무타우타는 후방에 없을 것이고, 살아서 복귀한다면 그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는 양녕의 말을 이해한 동권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군. 반드시 명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 * *
며칠 뒤.
요동. 요동성 동남쪽.
"경략사에게 쫓겨나듯 떠나올 때만 해도 그냥 든든한 요새로만 느껴졌던 요동성인데, 적들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다시 보니 위압감이 엄청납니다."
높이 솟은 요동성 성벽을 본 김종서의 말에 양녕도 동의하듯 말했다.
"정말 그렇소. 어지간한 조선의 성벽은 엄두도 내지 못할 높이니 말이오."
요동성은 산세에 의존할 수 없는 평지성인 데다가 요동과 한반도 사이를 막은 산간지대의 입구에 해당하는 요충지에 지어진 탓에 방어를 위해 어마어마하게 높은 성벽을 두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를 점령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정로군과 회경군이 집결하는 것이야 그냥 이 근처에서 한다 치더라도, 요동성을 후방에 그대로 두고 북쪽으로 올라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소. 동쪽으로 산지가 있고 서쪽으로 요하가 흐르는 가운데를 요동성이 틀어막고 있으니, 보급로를 우회하기도 마땅치 않소."
"대체 태조대왕께서는 어떻게 이런 커다란 성을 하루 만에 함락시키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정로군이 요하를 건너오기를 기다린 다음 합류해서 요동성을 공격하는 게 나을까요?"
"그럴 것 없소. 삼한인들의 손으로 다시 요동성을 점령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굳이 명나라를 기다릴 것 없지. 안시성에서 애꾸가 된 당 태종도 요동성을 열흘 만에 함락시켰는데, 태조대왕의 뜻을 이으러 온 우리가 못 할 거 뭐 있겠소?"
자신있어 보이는 양녕의 말에 김종서가 물었다.
"방법이 있으십니까?"
"물론이오. 그것도 여럿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