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87화
187화
황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원과 제철법만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여진족들이 4윤작법을 손에 넣은 상황인데, 이것이 명나라에 넘어간다면 요동 일대는 농사짓기 힘든 척박한 땅이 아니라 스스로 식량을 생산해 낼 수 있는 농토가 되어버립니다. 그걸 토대로 인구까지 늘어난다면 명나라가 요동을 놓으려 해도 놓아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도가 진지한 표정으로 중신들을 보며 말했다.
"방법은 하나요. 명나라가 요동을 확실하게 확보하려 들게 된다면 그 이유는 요동의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오. 그렇다면 명나라가 요동을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럴 걱정도 없지 않겠소?"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조선이 주도적으로 군대를 움직여서 금나라를 격파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명나라는 피해를 많이 본 것도 아니고, 놈들을 이기는 데에 어려움을 겪은 것도 아니니 이번 일을 그리 큰 사건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오. 그리되면 요동의 중요성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니 거기에 걸어 봐야지."
"하지만 조선이 주도적으로 움직여서 금나라를 격파하면 오히려 조선이 강한 것을 보고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요동을 확고히 확보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명나라가 그렇게 나올 수도 있소. 하지만 조선이 주도적으로 군대를 움직였다는 것은 격파 직후에 요동 일대에 조선의 군사력이 뻗어 있다는 얘기요. 애초에 명나라가 직접 원군을 요청한 지금이라면, 조선이 당당히 요동에 대군을 보낼 기회기도 하고 말이오."
조선이 적극적으로 군대를 보내어 여진족을 격파했는데도 명나라가 요동 일대를 이전보다 더 확실하게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려 하거나, 더 나가서 조선을 견제한다면 무력을 쓸 수도 있다는 뜻이 담긴 이도의 그 말에 좌중에 잠시 적막이 찾아왔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적막을 깬 황희의 조심스러운 말에 이도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력이라는 게 휘둘러야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오. 그저 여진족들을 모두 소탕한 다음 어떻게 할 것인지 얘기가 나왔을 때, 이제 해결되었으니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그냥 하는 것과, 방금 여진족들을 짓밟은 강한 군대를 옆에 두고 하는 것은 그 말의 힘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소?"
그 말에는 중신들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조선에서는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으레 불꽃놀이나 화포 사격을 보여 주곤 했다.
물론 원래 역사에서도 귀신을 퇴치하는 데에 화포를 쓰려 하고, 이후 일본에 의해 종을 치는 것으로 대체되기 전까지만 해도 새해를 맞이하면서 화포를 쏘고 불꽃놀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을 정도로 화약이 터지는 것 자체를 놀이로 여기고 즐겼던 조선인 만큼, 사신들에게도 조선 기준으로 즐거운 구경거리를 보여 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목적은 조선의 군사력을 사신들에게 과시하는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그 대상에는 명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도 재위 초만 해도 명나라 사신이 화포 쏘는 것을 보여 달라 하자 규모를 키워 불꽃놀이를 보여 주어, 사신이 구경하다 말고 놀라서 건물로 들어가게 만든 일도 있었다.
"이견이 없다면 그대로 진행하겠소. 우선 병력이 더 필요하게 되었으니 동북면의 회경군을 최소한만 남기고 전부 의주부로 옮겨 배치하시오. 야르하치 놈도 생각이 있다면 명나라와 조선이 요동으로 군사를 움직일 것이 분명한 이 상황에서 군사를 두만강 쪽으로 빼지는 않을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 또한 상황이 단순히 여진족을 치는 것이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복잡해졌으니, 다음번에 회경군이 압록강을 넘어 요동으로 갈 때는 양녕대군도 동행하라 지시하시오."
"예. 그런데 정말 지금 상황에서 명나라에 강하게 나가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상황이니 강하게 나가려는 것이오. 영락제 때만 해도 허탕을 치고 돌아올지언정 북원을 치러 대군을 끌고 원정을 나갔을 정도였소. 하지만 지금은 북원이 장성을 넘어 후방을 치는 바람에 급히 조선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 지경이지 않소. 명나라도 이전 같지 않은 것이지. 하지만 이대로 더 쇠락할지, 다시 이전처럼 강해질지는 알 수 없으니 확실한 기회인 지금을 노리는 것뿐이오."
"알겠습니다."
황희에게 지시를 내린 이도는 이방원을 떠올리게 하는 날카롭고도 빛나는 눈빛으로 좌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동북면 원정군의 이름을 조종의 경사스러운 땅을 되찾는다는 뜻으로 회경군이라 짓기를 정말 잘했소. 태조대왕께서 왕업을 일으키셨던 경사스러운 땅을 되찾은 것에 뒤이어서, 이제는 태조대왕께서 그 기개를 떨치셨던 요동의 땅으로 향할 군대에 정말로 어울리는 이름 아니겠소?"
* * *
1432년 6월 중순 모일.
의주부 의주목. 압록강 강변.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들이 하나둘 의주목 가까운 강변에 정박하고 인부들이 짐을 내리는 가운데, 잘 차려입은 청년 하나가 배에서 내렸다. 척동상단 대방 한명회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그간 잘 지냈는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본 한명회가 양녕을 발견하고는 환한 얼굴로 다가가 인사했다.
"저야 대군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히려 북방에 오래 계신 대군께 제가 안부를 물어야지요."
"나도 잘 지냈네. 군사들이 고생이지 내가 고생이랄 거 있나."
"그나저나 제가 오는 줄은 어떻게 알고 기다리신 겁니까?"
"사실 자네가 올 줄은 몰랐네. 이번에 보급되어 오는 물자들이 양도 많고 중요한 것들 아닌가. 그래서 내가 직접 나와서 살펴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자네가 내리는 것을 보고 말을 건 것일세."
"그런 것이었군요. 하긴, 이번 물자들이 중요한 것이니 확실하게 제때 전달되어야 한다는 말은 출발 직전까지도 들었습니다."
"조정에서도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군. 자, 아직 날이 추운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내 집무실로 가세."
* * *
잠시 후.
의주부 의주목. 회경군 임시 주둔지.
"이번에도 식량과 화약은 저번과 비슷하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이번에 가져온 물건들입니다. 대군께 보여 드리려고 견본을 따로 챙겨 왔지요."
"오, 고맙군."
한명회가 탁자 위에 꾸러미를 올려놓고 펼친 다음, 직사각형 판을 둥글게 휘어놓은 것 같은 물건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게 저번에 회경군 군단장께서 요청하셨던 화약 접시 바람막이라고 합니다. 잘 맞을지 모르겠군요."
"이거였군. 기다려 보게."
옆에 세워 두었던 자신의 조총을 가져온 양녕이 바람막이를 받아들고 화약 접시 옆에 밀어 넣었다.
딸깍, 소리를 내며 화약 접시의 앞쪽을 가려 주듯 결합된 바람막이를 만져 보던 양녕이 말했다.
"잘 맞는군. 완전히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고 약간 달그락거리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애초에 그것까지 정확하게 맞출 수는 없는 데다가 이 정도만 되어도 화약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게 막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야."
그 모습에 한명회가 신기한 듯 말했다.
"어떻게 한성부에서 만들어 온 것이 여기 계속 있던 대군의 조총에 이 정도로 잘 들어맞는 겁니까?"
"생산하면서 규격을 일치시켜서 그렇네. 같은 규격으로 생산된 조총 하나에 들어맞는다면 다른 조총에도 다 들어맞게 되어 있어. 이것도 마찬가지지."
이어서 양녕이 금속 원통이 옆으로 꺾어지듯 붙은 긴 칼날 하나를 꾸러미 안에서 집어 들어 총구에 씌우듯 끼우자 역시 딸깍하는 소리를 내며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가져오면서도 이 총검이라는 것이 손잡이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쓰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총 끝에 꽂아서 쓰는 것이었군요. 꼭 짧은 창 같습니다."
"그렇네. 적들이 기병을 주력으로 삼으니 돌격을 막는 게 중요한데, 이걸 쓰면 조총수들도 살수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돌격을 저지할 수 있지."
"규격화라는 게 이리도 유용한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신기하군요."
총검과 바람막이가 장착된 양녕의 조총을 유심히 보는 한명회에게 양녕이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한성부의 분위기는 어떤가? 여진족들이 금나라 재건을 선포한 것이나, 회경군이 여진족을 상대하러 요동으로 갈 것이라는 얘기는 지금쯤이면 다 퍼지고도 남았을 것 아닌가."
"한성부의 분위기라도 해도 다 다릅니다. 척동상단의 경영 상황을 보고하러 내수소나 이조에 갈 때 살펴보면 조정은 큰 전쟁을 앞둔 것처럼 긴장되어있고, 북방과 관련된 일을 많이 맡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법 아는 척동상단도 역시 긴장된 분위기지요.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전혀 아닙니다. 그저 조만간 나라에서 오랑캐들을 잡으러 간다더라 하는 얘기가 가끔 오가는 정도일 뿐입니다."
"신기하군. 백성들이 별 신경을 안 쓰는 이유가 있는가?"
"아무래도 지난 십여 년간 칠주도나 동북면으로 조선이 군대를 보내어 뻗어나가면 나갔지 공격을 당했던 적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번 회경군도 만들어진 지 시간이 제법 지났고 계속 멀리 떨어진 동북면에 있었습니다. 이번에 의주부로 재배치되긴 했지만, 한성부를 잠깐 지나갔을 뿐이지요."
"하긴, 자신들의 위험해지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접할 일도 많이 없는 데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관심이 안 갈 만도 하군."
"예. 차라리 이번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이것 때문이겠지요."
한명회는 꾸러미에서 옷 하나를 집어 들어 펼치며 말을 이었다.
"이것이 이번에 회경군에 보급될 겨울용 겉옷입니다."
"이거로군. 동북면에 주둔하는 동안 회경군 전원에게 방한용 옷이 이미 보급되긴 했지만, 요동이 생각보다 추우면 덧입을 수 있도록 간단한 구조로 만들어서 보내 달라 요청했던 것이지. 생각대로 잘 만들어졌군. 그런데 이게 무슨 관련이 있는가?"
"최근 동북면 여진족들이 전부 요동으로 가거나 국경 안쪽으로 들어온 탓에 면포를 사 갈 사람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방직감에서 생산된 면포가 오우치 가문에 팔고 나서도 제법 남았습니다. 중간에 생산을 줄인 덕에 실도 많이 남았지요. 이 겨울용 겉옷은 그 남는 면포와 실을 써서 한성부 여인들이 만든 것입니다."
"여인들이 만들었다고?"
"예. 척동상단 본부의 남는 방에 면포와 실을 갖춰 두고, 옷 만들 사람은 와서 만들면 한 벌 완성할 때마다 삯을 주겠다 했습니다. 겨울철에 부업 삼아서 하려는 여인들이 많아서 이렇게 많은 양이지만 금방 만들 수 있었지요. 그렇게 모인 여인들 사이에서 오간, 이 옷을 오랑캐 잡으러 가는 군인들이 입을 거라더라 하는 말이 사실상 한성부 백성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번 회경군 얘기의 거의 전부일 겁니다."
"이 많은 옷을 수량 맞춰서 제때 만들어오면서도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돈 벌 기회를 준 셈이로군. 아주 현명해. 누가 떠올린 방책인가?"
양녕의 질문에 한명회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제가 생각했습니다."
"하하하! 내가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군. 잘했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주게나."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이제 먹고 입고 싸울 것이 다 갖춰졌으니 한시름 덜었군. 자네 덕분이야. 어차피 저 많은 짐을 단숨에 내릴 수는 없으니 한성부로 되돌아가는 것은 내일이지? 다른 바쁜 일 없으면 오늘 밤은 오랜만에 나하고 술 한잔하면서 얘기나 나누세."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시름 덜었다 하심은……."
조심스럽게 묻는 한명회의 말에 양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역시 자네는 눈치가 빠르군. 맞네. 날이 풀리는 대로 요동을 향해 출정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