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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86화 (18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86화

186화

"삼한 혈통 주민들은 남겨두었다 하시면……."

"말 그대로요. 가까스로 탈출한 이들 말에 따르면 각 지역을 점령한 여진족들이 삼한 혈통 주민들은 모두 남겨두어 자신들을 도와가며 같이 살게 하고, 나머지 명나라 출신 주민들은 모두 끌고 갔다 하오."

얘기를 듣던 김종서의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조선이 여진족과 내통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계략이 분명했다.

"조선이 그런 마음을 품었을 리가 없는 것은 총병관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긴장한 김종서의 말에 동로군 총병관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물론이오. 야르하치의 부대가 모래바람을 이용해 공격하던 것도, 조선군이 용감하게 싸워 그걸 막아 낸 것도 바로 옆에서 봤으니까. 하지만 결정권을 가진 경략사는 그 모습을 못 봤지 않소. 내가 아무리 말해도 듣지를 않소."

총병관이 목소리를 낮추며 이어 말했다.

"경략사는 지금 자신이 판단을 그르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같소. 무관인 우리와 달리 문관 출신인지라 다시 조정에 돌아가야 하니 이번 일로 진급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겠지."

"그래서 저희로군요."

"그렇소. 조선이 여진족과 내통한 탓에 정로군이 각개격파 당한 것이라면 자신의 책임이 아니게 되니까. 게다가 서로군 총병관도 탈출해서 여기로 오고 있다는 말이 있소. 아마 그 역시 집결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움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조선 탓을 하겠지. 그 꼴을 생각하면 차라리 지금 바로 조선으로 돌아가 있는 게 그대들에게 나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씁쓸한 표정의 총병관이 천막을 나서자 김종서가 이마를 감싸 쥐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 * *

1432년 6월 중순 모일.

의주부 의주목. 회경군 임시 주둔지.

회경군을 이끌고 돌아온 김종서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양녕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정로군 부대는 격파했지만 회경군만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한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서 조선이 자신들과 내통한 것처럼 만들다니. 칠주도 정벌 때 쇼니 가문의 부대는 몰살하고 시부카와 가문의 부대는 일부를 살려 보내 적들을 분열시켰던 생각이 나는군. 그때는 내가 책략을 쓰는 쪽이었고, 지금은 당한 쪽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오. 그나저나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 이이제이를 쓰려 들다니, 역시 보통 오랑캐 놈이 아니오."

"상황도 따라주었지요. 살아남은 정로군 부대와 회경군이 퇴각한 곳이 하필 요동성인데, 요동성은 국초에 조선이 군사를 움직여 점령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명나라와 날을 세웠던 곳 아닙니까. 이미 무순성이 내통으로 함락된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내통한 것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성안에 들어온 회경군이 정로군을 급습하고 요동성을 점령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양녕이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속아 넘어간 경략사도 어지간히 생각이 없소. 애초에 여진족이 뭉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에 명나라와 같이 나누어서 통제하던 것이 조선 아니오. 그런 조선이 미쳤다고 여진족이 뭉쳐서 금나라의 재건을 선포하고 칭제건원 하는 것을 묵인하고 내통까지 하겠소? 오히려 두만강 일대에서 사고치고 요동으로 달아난 판차와 무타우타를 그대로 받아 주고 건주우위까지 주어 여진족들이 뭉칠 기회를 준 것은 명나라지 않소."

"경략사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니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이겠지요. 차라리 경략사만 그런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명나라 조정도 다 저 모양일까 걱정입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양녕과 김종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오. 우선 지금 정황으로 보면 놈들이 무순성을 점령하기 전에 이미 화약 사용법을 알고 있던 것 같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옛 금나라에서 만든 적 있는 무기라고 하지만 진천뢰를 그렇게 바로 만들어서 활용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아마 화약 사용법을 아는 조선 병사가 놈들에게 잡혀 가면서 전해진 것 같습니다."

"그렇소. 그리고 요동은 중원이 아니라 장성 바깥의 땅인 데다가, 북원과 여진족을 마주한 최전방이라는 이유로 군현이 아니라 위와 주를 설치해 군사들 위주로 거주하고 있지 않소. 그런데 지금 요동의 많은 지역이 여진족들에게 점령되었으니, 어쩌면 거기서 잡혀간 군사들을 통해 화약의 제조법까지 넘어갔을 수도 있다 생각하오."

"염초와 숯은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유황은 땅에서 캐어야 하는 것이니 구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칠주도처럼 아예 유황 덩어리가 나지는 않겠지만, 유황 섞인 돌이 있다면 가열해서 뽑아낼 수 있소. 심지어 유황은 약재로도 쓰이는 것이라서 딱히 그 제조법이 비밀도 아니지 않소. 잡혀간 이들 중에 의원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오."

김종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놈들이 화약 사용법을 알고 있고 이미 노획해 간 화약도 많을 텐데, 거기다 더해서 제조법까지 익혔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그렇소. 그러니 그 내용을 명나라에 알릴 것이오. 그럼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좀 정신을 차리겠지."

"화약 사용법이 조선 병사를 통해서 이미 넘어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조선에 책임을 묻는 것 아닙니까?"

"그런 얘기는 굳이 안 꺼내면 되오. 어차피 무순성 주민은 전부 끌려가서 증인도 없지 않소. 무순성이 점령되면서 화약 사용법과 제조법이 모두 놈들 손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말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러면 되겠군요. 조선이 중대한 기밀인 화약 제조법을 여진족에 넘겼을 리가 없으니, 내통 의심도 좀 덜어지겠습니다."

양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얘기로 넘어갔다.

"다음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은 놈들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려 할까 하는 것이오. 지금 요동성 이북이 전부 점령되었다고 하지만 요동성은 그야말로 철옹성 같은 요새요. 공성전에 능한 것도 아니고 이제 막 화포 사용법을 배웠을 뿐인 여진족 놈들이 쉽게 함락시킬 수 없지. 아마 요동성은 그대로 두고 요하를 따라가며 요동성 서남쪽의 해주위와 개주위를 점령할 것 같소."

"해주위와 개주위가 점령되면 요하가 완전히 놈들 손에 떨어지고, 요동성이 중원과 완전히 고립될 뿐만 아니라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육로도 끊기겠군요."

"육로만 끊기는 것이 아니오. 여진족은 배를 타는 데에도 능하오. 놈들이 요하 하구를 점령하고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오기 시작하면 해로로도 다니기 어려워지오. 명나라와 조선 사이를 이간질한 다음 그렇게 연결을 끊어 버리고 나면, 오해가 풀리더라도 이미 소통하기 어려워지오."

"그 내용도 명나라에 알려야겠군요."

"그렇소. 물론 놈들이 요하를 점령하고 요동성을 고립시킨다고 해서 그게 꼭 조선과 내통하지 않은 것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소. 하지만 우리는 명나라에 그 내용을 알린 다음 경략사의 지시대로 압록강 남쪽에서 꼼짝 않고 있을 것이오. 정로군이 아무리 패배해 죽어 나가고 요동의 요새들이 하나둘씩 여진족 손에 떨어진다 해도 먼저 요청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도우러 가지 않을 것이오."

"그러다가 여진족이 정말로 요동을 다 점령하면 조선도 위험해지는 것 아닙니까?"

"그게 목적이오. 여진족이 요동을 집어삼키는 동안 조선이 땅 한 뼘도 얻지 않으면서 압록강 남쪽에서 지시대로 방어만 굳히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경략사나 명나라 조정이 멍청하더라도 조선이 얻는 것 하나 없이 위험해질 뿐인 조건으로 여진족과 내통을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겠지."

"만일 그렇게 되도록 저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목소리를 낮춘 김종서의 질문에 양녕 역시 주위를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 상황이 되도록 여진족을 통제하지도 못하고 우리를 믿지도 않는다면 능력으로건 신뢰로건 명나라에 앞으로 더 기대할 것은 없소."

* * *

1432년 8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그로부터 두어 달 뒤, 명나라 조정에서 보낸 칙서가 한성부에 도착했다. 중신들을 모아 그 내용을 논하던 이도가 짧게 말했다.

"역시 괜히 영락제가 후계자로 점찍어둔 게 아닌가 보오. 판단이 매우 정확하군."

칙서의 내용은 이번 여진족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황제인 선덕제가 직접 설명하고 지시한 것이었다.

내용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잘못된 전략으로 병사들을 상하게 하고 패배했으면서도 적의 조악한 이간책에 걸려 조선의 원군을 물리게 해 두 나라의 신의까지 상하게 만든 경략사와 서로군 총병관은 참수되었고 곧 새로운 사람을 임명해서 보낼 것이라는 내용과, 조선 역시 그때 호응해서 다시 원군을 보내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늦은 판단입니다. 이미 해주위와 개주위는 물론이고 요동성까지 놈들의 손에 떨어진 덕분에, 이번 칙서도 육로가 아니라 해로로 오지 않았습니까."

영의정 황희의 말에 이도가 답했다.

"판단이 늦은 것은 맞소. 그나마도 명나라가 군사를 움직인 틈을 타서 북원이 후방을 습격하자 조선에 도움을 청하고자 부랴부랴 결정한 것이라는 말도 있지. 하지만 명나라의 국력은 판단이 늦어서 생긴 문제마저 뒤집어 버릴 수 있을 정도요. 작정하고 병사들을 모아 요동으로 보낸다면 아무리 야르하치가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막아 낼 수 없겠지.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오."

"명나라가 다시 요동을 확보한다면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그 뒤로는 여진족 관리도 정신을 차리고 잘하려 할 것입니다."

좌의정 맹사성의 말에 이도가 작게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이전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차라리 낫소. 이번에 크게 당한 명나라는 좌상 말대로 여진족을 제대로 통제하기 위해 요동을 이전보다 더 확실하게 확보하려 들 수도 있소. 지금은 드문드문 요새가 있을 뿐인 요동변장을 아예 장성처럼 높은 성벽으로 모두 이어 버릴지도 모르지. 그렇게 된다면 장성이 산해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요동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장성은 중원의 기준이지 않소?"

그 말에 중신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이도가 이어 말했다.

"그렇소. 중원으로 여겨지는 영역에 요동마저 들어가게 되오. 그리된다면 요동을 산동성에 부속된 지역으로 두지 않고 새롭게 성을 설치하겠지. 그렇게 되고 나면 조선은 다시는 요동을 노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머리 위에 명나라가 버티고 선 꼴이 되오."

이도에 이어서 양녕도 입을 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동 일대에는 석탄이나 철광을 비롯한 온갖 광물이 풍부합니다. 무순 근처에서는 땅을 파기만 해도 석탄이 나온다는 말도 있지요. 이번에 여진족이 온갖 기술을 습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술이라는 것이 영원히 지킬 수가 없는 것인데, 만일 명나라가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 상황에서 소석탄을 쓴 제철법이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명나라가 다시는 요동을 놓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요동의 수많은 광물이 전부 명나라의 힘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 말에 중신들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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