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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85화 (18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85화

185화

1432년 6월 초순 모일.

요동. 연산관 북쪽 모처.

김종서가 이끄는 회경군은 무사히 동로군과 합류해 북쪽으로 사르후를 향해 진군하는 중이었다. 곧 전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긴장감 탓에 아무 말도 없는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동로군 총병관이 나란히 말을 타고 가던 김종서에게 물었다.

"사실 조선군의 무장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오. 궁수들이 들고 있는 활은 짧지만 매우 강해 보이고, 기병들은 무장이 단단하고 기율이 잡혀있는 것이 인상적이구려."

"감사합니다. 상국을 돕기 위해서 나라 안의 정예병들을 데려온 것이라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삼한이 예로부터 활과 기병에 뛰어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 이해가 가는데, 저 병사들이 든 가느다란 것은 설마 화포요?"

총병관이 조총을 가리키며 질문하자 김종서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만들기는 까다로우나 배우기 쉽고 위력도 강한 것이 조총이다. 만일 조총의 유용성이 명나라에도 알려진다면 인구에서 나오는 수공업 능력으로 만들기 까다롭다는 점을 무시하고 대량생산 할 수 있었고, 그렇게 생산된 조총으로 군대를 훈련한다면 조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하고 강력한 군대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조선 땅에서는 구리와 유황이 많이 나지 않습니다. 초석을 많이 만드는 기술도 없어서 화약도 부족하지요. 그래서 큰 포를 마음껏 쏠 수가 없어서 화약이 적게 들어가는 저런 작은 화포를 만들어서 쓰고 있습니다."

"허허, 그거 큰일이구려. 위력은 충분하오?"

"예. 활로 보조하면 충분히 전투에 쓸 수 있습니다."

"다행이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작은 것이나마 화포로 무장한 병사들까지 보내 주다니, 실로 조선은 대명의 충성스러운 번국이오. 이번 토벌도 잘 부탁하겠소."

"예, 물론입니다."

급히 둘러댄 말에 총병관이 속아 넘어간 것은 물론 조선을 호평하기까지 하자 김종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대군께서 염초밭 조성하는 법을 만드신 이후로도, 틈만 나면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초석을 팔아달라는 청을 보내어 명나라가 조선의 초석 생산이 늘어난 것을 알지 못하게 만드신 주상전하의 혜안 덕분에 속여넘길 수 있었다.'

그때 행군 대열 저 앞에서 말 탄 무관 하나가 급히 다가와 총병관에게 말했다.

"북쪽 전방에 적이 나타났습니다. 전부 기병대로 구성되어 있고, 대금이라 적힌 황색 깃발을 치켜들고 오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대금황제를 참칭한 야르하치가 직접 이끄는 부대인 것 같습니다."

"놈이 직접 여기로 온단 말인가? 설마 본거지 코앞인 사르후에 많은 병력이 집결하는 것을 보고 이쪽으로 달아난 것인가?"

"저…… 그것이……."

"뭔가? 적이 다가오는 상황이니 빨리 말하게."

총병관의 재촉에 무관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작게 말했다.

"저들이 치켜들고 오는 깃발이 더 있습니다. 전부 서로군과 북로군이 쓰던 깃발들입니다."

그 말에 총병관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옆에서 듣던 김종서도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설마……."

말을 하던 총병관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 적들은 대병력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군과 북로군을 격파한 다음 동로군마저 각개격파할 생각으로 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기가 떨어지는 말을 총사령관이 입 밖으로 낼 수 없으니 말을 하다 만 것이었지만, 적과 대치하고 그들이 든 깃발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순간 동로군의 사기는 떨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야르하치 역시 그것을 노리고 노획한 깃발들을 앞세우고 오는 것일 터였다.

"총병관. 빨리 적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종서의 말에 총병관이 두려움을 떨쳐내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말했다.

"물론이오. 조선군은 공께 맡기겠소."

그 말과 동시에 총병관과 김종서가 각자 부대를 이끌고 전개해 야르하치를 막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좋다. 지금부터 방진을 짠다! 칠주도를 평정한 조선군의 위용을 저 오랑캐 놈들에게 보여 주자!"

"와아아아아!"

사기를 북돋는 말을 한 김종서는 장군들의 통제 속에 군관과 군교들이 분주하게 병사들을 움직여 방진을 짜는 것을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이들이 이미 칠주도에서 여러 번 실전을 겪어 경험이 있는 것은 알고 있다. 지금 움직이는 것만 보아도 규율이 갖추어져 있어 믿음직스럽지. 하지만 이곳은 칠주도가 아니다. 환경도 적들도 달라. 칠주도에서는 적들의 기병대를 여러 번 막아 냈다고 하지만 과연 말에 능한 여진족들의 대규모 기병대도 잘 막아 낼 수 있을까.'

김종서가 걱정하는 동안 이미 동로군과 회경군 모두 방진을 완성했고, 야르하치의 부대 역시 들고 있는 깃발들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다가와 있었다.

김종서 옆에서 부대를 통솔하던 1보병여단장 황보인이 목청을 올려 외쳤다.

"놈들의 활은 조선의 활만큼 멀리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말을 타고 빠르게 접근해서 쏘고 빠지는 게 놈들이 전술이지! 그러니 접근했을 때 조총수들이 쏴서 막아 내고, 근접하면 살수들이 조총수를 방어하도록 해라! 궁수들은 계속 꾸준히 보조해 주도록!"

"예!"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병사들이 외쳤지만, 접근하던 야르하치의 부대는 갑자기 속도를 줄이더니 측면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지? 돌격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많다고 판단한 건가?"

"어쩌면 측면이나 후면을 노리고 도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속도가 너무 느리지만 말입니다."

김종서와 황보인이 의문을 품은 그 순간, 강한 북서풍이 불었다. 요동의 말라붙은 흙먼지가 강한 북서풍에 날려 희뿌연 덩어리가 되어 동로군과 회경군을 덮쳤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본 야르하치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와하하하! 제대로 걸렸구나! 이 지역 기후가 어떤지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지! 자, 놈들이 요동의 흙먼지에 시야가 가려진 지금이 기회다! 돌격!"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점점 커져 오는 함성과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황보인이 외쳤다.

"놈들이 온다! 마지막으로 놈들이 보였던 방향을 향해 방포!"

적이 어디까지 왔는지는 보이지 않지만, 교대로 사격하다 보면 적들이 그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계산으로 내린 지시였다.

그러나 황보인이 지시를 내렸음에도 조총의 포성은 얼마 들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영악한 오랑캐 놈!"

상황을 파악한 김종서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병사들에게 지시가 전달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병사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흙먼지 섞인 북서풍이 불어오면서 화약 접시에 담긴 화약에 흙가루가 섞여 들어가 제대로 터지지 않기도 하고, 화약 접시의 화약은 제대로 터졌지만 흙가루가 점화구를 막아 불발이 나거나 아예 강풍에 화약 접시 내용물이 통째로 날려가 버린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적들이 접근한다! 살수들은 대비해라!"

모래바람 사이로 날아오는 화살에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하자 황보인은 오늘 여기서 죽을 각오를 하고 갑옷 끈을 다시 튼튼하게 묶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3보병여단을 이끄는 홍사석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관에는 나 대신 내가 즐겨 입던 옷이 들어가겠군."

화살이 얼굴 바로 옆을 스쳐 날아가는 상황에서도 시큰둥하게 말한 김종서가 허리춤에서 환도를 뽑아 들었다. 이윽고 모래바람이 천천히 걷히며 이쪽으로 돌격해오는 야르하치의 부대가 보였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속도가 줄어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병들이 계속 옆을 살피고 있던 것이다.

"저쪽, 저쪽을 보십시오!"

황보인이 놀란 얼굴로 가리킨 곳을 본 김종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는 날아든 모래바람을 기병의 기동력으로 우회해 통째로 피해 버린 2기병여단이 야르하치의 부대 측면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궁기병연대가 계속 화살을 쏘아댄 덕분에 야르하치의 부대가 제대로 돌격을 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좋아! 다음으로 넘어간다!"

2기병연대장 이징옥의 지시와 동시에 우렁찬 태평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방에서 돌격하던 경기병연대가 말을 돌려 야르하치의 부대의 후방을 노리기 위해 기동해 빠져나가고, 그 뒤에서 나타난 중기병연대가 야르하치의 부대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그 선두에서 직접 부대를 이끌던 이징옥이 손에 든 편곤을 높이 치켜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이 야르하치라는 오랑캐 놈이로구나! 별 대단한 세력도 갖추지 못한 놈이 감히 대금황제를 참칭하다니, 이 이징옥이 혼쭐을 내주마!"

그 모습에 야르하치가 혀를 찼다. 저 정도로 중무장한 중기병과 맞붙는다면 경기병이라고 할 수 있는 야르하치의 부대는 그대로 분쇄될 것이 뻔했다.

"계획 변경이다! 옆으로 기수를 돌려 빠져나간다! 놈들은 중무장을 했으니 말이 느려서 우리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야!"

야르하치의 부대가 방향을 틀어 이징옥이 돌격해 오는 반대 방향으로 퇴각을 시도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침 모래바람도 다 걷힌 것을 확인한 김종서가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외쳤다.

"화약 접시를 손으로 쓸어 전부 털어 버리고 새로 화약을 부어라! 준비가 되는 대로 각자 조준사격 개시!"

야르하치의 부대가 퇴각을 시도했다지만 질주 도중에 바로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다. 급하게 선회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야르하치의 부대를 향해 준비를 마친 회경군 조총수들의 총알과 궁수들의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 * *

며칠 뒤.

요동성. 회경군 임시 주둔지.

가까스로 야르하치의 부대를 격퇴한 동로군과 회경군은 사르후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요동성에 와 있었다. 이미 서로군과 북로군이 모두 격파된 마당에 사르후에 집결하러 가는 것은 의미가 없기도 했고, 괜히 이동하다가는 야르하치의 부대가 다시 습격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 상황에서 빠르게 판단하고 퇴각한 걸 보면 그 야르하치라는 놈이 보통 놈은 아닙니다. 조총수와 궁수들이 사격 준비를 하는 데에 시간이 걸려서 몇 놈 쏘아 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2기병연대도 제대로 추격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황보인의 말에 김종서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 그렇소. 그나저나 대군께서 두루마리에 적어 주신 대로 요동의 바람이 매우 거세니, 앞으로 요동에서 화기를 쓰려면 바람 대비를 잘해야겠소."

그때 천막 입구에서 동로군 총병관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여기 앉으시지요."

김종서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지만 총병관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괜찮소. 알릴 게 있어서 온 것이라 금방 다시 갈 것이오."

"총병관께서 직접 알리러 오시다니, 대체 무엇입니까?"

"정로군 경략사께서 지시를 내리셨소. 날이 밝는 대로 조선군 전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오."

뜻밖의 지시에 놀란 김종서가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원군더러 되돌아가라니, 대체 무슨 이유입니까?"

총병관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보고가 들어왔소. 삼만위, 철령위, 심양중위가 모두 놈들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이오. 여기 요동성 이북의 모든 땅이 여진족에게 넘어간 셈이지."

"그렇다면 더더욱 저희가 남아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놈들이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주민들을 끌고 갔다 하오."

뒤이어 총병관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김종서는 긴장감에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삼한 혈통 주민들만은 그대로 남아 있게 하고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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