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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84화 (18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84화

184화

폭발하는 나무통은 하나로 끝이 아니었다. 연달아서 요새 안 곳곳에 나무통이 떨어져 폭발하고, 사방으로 튀는 파편과 연기, 피와 살점에 병사들이 혼비백산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를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통제하려던 장수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지금 여진족 놈들은 금나라의 재건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금나라의 대표적인 화약 무기 중 하나라고 하면…….'

"진천뢰다! 안에 심지가 타들어 가면 터지는 구조다! 심지가 다 타기 전에 나무통을 도로 주워 먼 곳으로 던져 버려라!"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달려간 장수가 마침 떨어지는 나무통 하나를 붙잡아 그대로 다시 날아온 방향으로 던졌다. 허공을 날아 멀리 떨어진 나무통은 한참 바닥을 구르기만 할 뿐 터지지는 않았다.

"봐라! 놈들의 무기가 허술해서 제대로 안 터지는 것도 있다! 겁먹지 말고 대처해라!"

그 말에 자신을 얻은 병사들이 투구를 고쳐 쓰고 사방으로 달려 나갔다.

장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래도 국경에 가까운 경사(북경)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라 사기를 회복하는 것도 빠르고 통제가 잘 되어서 다행이다. 놈들은 아마 무순성에서 화약을 손에 넣었겠지. 어떻게 사용법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천뢰 정도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이번에는 폭음과 함께 날아온 돌덩어리가 작업하던 병사들을 날려 버리는 것을 보고 장수가 창백해진 얼굴로 외쳤다.

"화, 화포다!"

* * *

같은 시각.

사르후 남쪽 구릉.

이 모든 상황을 준비하고 지켜보고 있던 판차는 요새 안의 혼란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중간에 눈치채면 계획이 꼬일 수 있어서 약간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우리가 화약을 쓸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은 아예 생각 안 한 모양이군요. 그랬으니 그 뻔히 보이는 것들을 다 놓쳤겠지요."

내통자를 이용해 무순성을 점령한 판차의 오돌리부가 가장 먼저 서두른 것은 주민들을 모두 끌고 가는 것이었다. 농사를 짓게 할 인력이 부족해서 끌고 가려는 게 주목적이었지만, 앞으로의 계획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다음으로 철물이란 철물은 보이는 대로 긁어 가고, 마지막으로 챙긴 것이 화약과 화포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성벽 위에 대포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을 텐데, 성벽이 무너진 것에만 신경을 쓴 모양입니다."

옆에 있던 회경군 탈영병 출신 사내의 말에 판차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을 보는 동쪽 성벽을 중심으로 무너뜨렸으니, 성을 점령해도 제대로 쓸 수 없게 허물었다는 것은 파악했겠지요. 하지만 성벽 위가 전부 엉망이 되어 있으니 대포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것이고, 성벽을 허문 목적에 성벽 위에 설치된 대포를 빠르게 끌어 내릴 비탈을 만들기 위한 것도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못 했을 겁니다. 화약도 대포도 짐작을 못 했으니 저렇게 요새에 좋다고 들어갔겠지요."

만들던 요새를 버리고 도망친 것 역시 판차의 계략이었다. 애초에 요새를 다 만들지 못했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거기까지만 만든 것이었다. 그 상태로 주둔하다가 명나라군이 오면 비우고 도망가서, 자연스럽게 명나라군이 요새를 점령하고 보강을 시작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여기서 조준하기 좋은 위치에 미리 요새를 만들어서 다른 곳에 집결하지 않고 그곳으로 모이게 유도했다는 것, 그리고 요새 안을 향해서 미리 대포와 진천뢰를 조준해 두었다는 것을 알면 절대로 안 들어갔을 겁니다. 버일러께서 짜신 작전이 정말로 대단합니다."

사내의 말에 판차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가 화약 사용법을 우리에게 전해 주지 않았다면 시작도 못 했을 계획입니다. 자, 그럼 이제 돌격하겠습니다."

"괜찮을까요?"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저들은 적에게 포를 쏘아본 적은 있을지 몰라도 적이 쏘는 포를 맞아 본 적은 없는 군대입니다. 처음 겪는 일에 정신이 없을 것이니 돌격하기에는 지금이 최적이지요."

이어서 판차가 병사들을 향해 돌아서서 외쳤다.

"진천뢰 투척과 화포 사격을 멈춰라! 돌격! 돌격이다!"

"와아아아아!"

돌격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구릉지 아래에 매복 중이던 오돌리부 기병대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요새 안에 있던 장수 하나가 외쳤다.

"놈들이 온다! 죽고 싶지 않다면 안 뚫리게들 막아!"

그 외침에 병사들이 요새 중간마다 완성되지 않아 뚫린 곳에 모여들어 밀집 대형을 짜고 방어 준비를 했다.

요새에 접근하는 기병대가 화살을 꺼내어 시위에 메기자 병사들이 다들 긴장했지만, 정작 기병대의 화살이 날아간 곳은 병사들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

"뭐야. 왜 요새를 쏘는 거야?"

한 병사가 중얼거린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오돌리부가 버리고 간 요새에는 만들다 만 구간도 있지만, 완성된 구간도 있었다. 요새를 점령한 서로군은 그 구간은 내버려 두고 다른 구간 보강에 집중했지만, 그것이 실책이었다.

그 구간은 완성된 구간이 아니라 완성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숨겨둔 구간이었다. 튼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밧줄 몇 개에 의지하고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서로군이 그 구간에 손대지 않은 것을 확인한 기병대가 넓은 날이 달린 화살을 쏘아 그 밧줄을 끊어내자 단번에 우르르 무너지며 큰 입구를 만들어 냈다.

"좋아, 계획대로 열렸다! 요새 안에 들어가서 전부 도륙을 내라!"

"와아아아아!"

"요새가 뚫렸다! 빨리 막아!"

사르후 일대에 오돌리부 기병대의 함성과 서로군의 비명이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1432년 6월 초순 모일.

요동. 철령위 인근 모처.

북쪽에서 남쪽으로 사르후를 향해가던 북로군 총병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서로군은 사르후를 점령하러 들어갔다가 놈들에게 당했고, 자네는 지금 상황을 우리 북로군에 알리라는 명을 받고 겨우 빠져나와 이렇게 왔다는 것이군."

다른 병사가 다친 팔에 붕대를 감아 줄 때마다 작게 찡그리면서, 전령으로 온 무관이 대답했다.

"예.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네도 다쳐가면서 빠져나왔을 정도면 큰 기대는 할 수 없겠지. 혹시 조선군과 합류한 다음 사르후로 가기로 한 동로군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대로 사르후로 향하면 큰일 아닌가."

"그것도 모릅니다. 아마 다른 전령이 가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 뿐입니다."

"이런. 대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이마를 짚으며 입 모양만으로 서로군 총병관을 욕하는 북로군 총병관에게 무관이 말했다.

"이곳 상황은 어떻습니까?"

"해서여진 놈들이 기병을 몰고 계속 견제하러 들고 있네. 이동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화살을 쏟아붓고 냅다 달아나니, 다치는 병사도 나오고 사기도 떨어지고 행군 속도도 느려져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큰일이군요."

"게다가 지금 자네가 알려 준 대로라면 여진족 놈들이 무순성에서 노획한 화약도 쓰는 게 확실하고, 서로군을 막아 낸 부대가 이쪽으로 와서 해서여진 놈들하고 협공을 시도할 수도 있어."

"어떻게든 해야겠습니다."

총병관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미 지시는 내려두었네. 우선은 이곳 샹기아 하다에 하루 정도 머물면서 상황을 보려고 하네."

"바로 구원하러 가시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보병이 중심이고 저들은 기병이 중심이네. 만일 저들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다면 구원하러 가는 도중에 맞닥뜨려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어."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선 여기서 기다려보는 거지. 다른 곳으로도 전령을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여기는 자네가 확실히 왔지 않은가. 만일 여기에만 보낸 것이라면 무사히 탈출한 다른 서로군 병력도 여기로 향할 가능성이 크네. 그들이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또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좀 더 파악한 다음 움직이는 게 현명할 것이야."

그때 장수 하나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르후 쪽에서 온 기병대인가?"

"아닙니다. 아군 진지 뒤쪽 구릉지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총병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해서여진 기병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막기 위해서 가파른 구릉지를 등지고 진지를 만든 것인데, 그 구릉지 위에 적이 나타난 것이다.

"구릉지 위에? 무장과 규모는?"

"둘 다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병이라는 것만 확인됩니다."

"아무래도 보병을 먼저 투입해서 우리 방어선을 약하게 만들고 그다음 기병으로 뚫을 생각이겠군. 그대로 맞춰줄 수는 없지. 여기까지 무순성의 대포를 가져왔을 리는 없고, 쓴다면 진천뢰인데 그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네. 내 지시대로 물항아리는 곳곳에 두었지?"

"예, 물론입니다."

"좋아. 이대로 놈들의 공세를 막아내고 역공을 노린다. 다들 준비하도록!"

"예!"

총병관의 지시에 짧고 우렁차게 대답한 장수들이 일제히 천막 밖으로 나갔다.

* * *

잠시 후.

북로군 진지.

진지 북쪽의 가파른 구릉지를 사이에 두고 북로군 병사들과 여진족 부대가 대치 중이었다.

"떨어진다! 물 준비!"

무관의 지시 직후에 구릉 쪽에서 날아온 진천뢰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달려가 물을 붓고 뒤로 빠졌다. 시간이 지나도 진천뢰에 아무 반응도 없자 병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집어 든 다음 옆에 판 구덩이에 던져넣었다. 그 모습에 무관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역시 사방으로 터져야 해서 나무통을 치밀하게 만들지 못하니 물을 부으면 속까지 들어가 버리는군. 어디 아무리 던져봐라. 너희가 보병으로 돌파를 시도할 만큼 틈이 생기나."

무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진천뢰가 날아왔다. 이번에도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물을 부었지만, 하필 물통에 물이 얼마 없었던 탓에 나무통 겉만이 적셔졌다.

물을 붓던 병사가 기겁해서 후다닥 물러났지만, 다행히도 폭발하지는 않았다. 무관이 안도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빨리 물을 다시 채워놔라. 그나저나 저놈들이 대체 무순성에서 화약을 얼마나 들고 갔기에 이렇게 계속 던져대는 거지? 슬슬 떨어질……."

말을 하던 무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진천뢰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간 무관이 진천뢰를 구덩이에 가져다 넣으려 다가오던 병사를 옆으로 밀어내더니, 발을 힘껏 굴러 진천뢰를 박살 냈다. 지켜보던 병사 모두가 깜짝 놀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서진 진천뢰 조각을 뒤적인 무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빈 통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설마……."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무관이 구릉 쪽을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수많은 진천뢰가 동시에 날아오고 있었다.

바닥에 진천뢰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물을 부어 끄기에는 수도 많고, 지금까지 섞여 날아온 가짜 진천뢰에 붓느라 물통의 물도 부족해진 탓에 제대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결국 미처 끄지 못한 진천뢰들이 하나둘 터지며 병사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약 연기가 가득 피어올라 샹기아 하다, 즉 연기 절벽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 된 그곳으로 판차가 이끄는 호이파부의 우디거 출신 보병들이 도끼를 하나씩 들고 돌격해 들어갔다. 저 멀리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훌룬부 기병대가 질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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