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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83화 (18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83화

183화

1432년 6월 초순 모일.

의주부 의주목. 압록강 남안.

압록강 강변에는 의주부에 옮겨져 배치되어있던 회경군 병력이 모두 모여있었다. 심란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던 양녕이 회경군단장 김종서에게 말했다.

"설마 명나라가 이렇게 바로 병력을 보내라고 할 줄은 몰랐소. 한 달 정도 걸려서 동북면에서 여기까지 옮겨 왔는데 이렇게 바로 요동으로 가야 하니, 병사들이 지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오."

명나라는 정로군을 요동으로 보내면서 조선에도 원군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일단은 제후국을 자처하고 있기도 했고, 같이 여진족을 나누어 관리하던 사이기도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였다.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요동으로 보내어 참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정예병력 위주로 모아서 왔으니, 여기 도착해서 쉰 며칠 동안 충분히 체력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명나라의 원군 요청에 조선에서는 의주부에 대기시켜 두었던 병력을 바로 보내기로 했다. 전투가 예상되는 상황이니 정예병력을 보내야 하는데 이미 정예병력 대다수는 회경군으로 소집되어 있었고, 그 회경군에서 빠듯하게 수비 병력만을 남기고 의주부로 배치한 상황이니 애초에 다른 병력을 모아서 보낼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양녕이 심란한 표정을 짓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체력이 회복되었다면 다행이오. 이거 원, 내가 따라가면 그나마 좀 걱정이 덜 될 것 같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문제구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전까지와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양녕은 물론이고 조정에서도 가능하다면 양녕을 요동으로 함께 보내 만약의 상황에 대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양녕의 중요성은 폐세자로만 여겨지던 칠주도 정벌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커진 상태였다. 게다가 부족 단위로 흩어진 오랑캐들만 상대하면 되던 동북면과 달리 여진족이 집결해 후금의 재건을 선포한 지금의 요동은 그런 양녕을 보내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곳이었다.

"미련은 남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 여기 있는 병력에는 칠주도에서 키쿠치 가문과 오토모 가문의 기병대를 상대해 본 적 있는 군관이나 군교, 병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오. 그들을 적재적소에 쓴다면 오랑캐들의 기병대도 능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받으시오."

양녕이 김종서에게 건네준 것은 종이 두루마리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도원수께서는 동북면에 남아있으니 이번에 요동으로 출진하는 회경군의 총사령관은 군단장인 공이시지 않소."

"그렇지요."

"요동 회경군 총사령관으로서 염두에 두어야 할 요동의 지리나 환경, 적들의 예상되는 전법, 거기에 대처하는 법 등을 최대한 정리해 보았소. 요동에서 진군하는 동안 틈틈이 읽으시고 참고하시기 바라오."

"감사합니다, 대군. 사실 저도 중요한 자리를 맡아 대군을 이끌게 되어 걱정되었는데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환한 표정의 김종서에게 양녕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대신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이 두루마리의 내용이 절대로 명나라에 넘어가서는 안 되오."

김종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어차피 명나라의 원군으로 가는 것이니 이 내용을 명나라에도 알려 주면 오랑캐들을 벌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요동의 상황이나 오랑캐들의 전법을 알고 있다면 명나라가 조선을 오해할 수 있을 거리가 한둘이 아니지 않소?"

"아, 그렇군요."

"그런데 또 그런 것들을 모른다고 하면서 적들의 전법에 대처하는 법을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말이오."

"이제 이해했습니다. 이 두루마리의 내용은 저만 잘 익혀 두고 대처법을 쓰겠습니다. 어차피 명나라 군대에 비하면 지금 가는 회경군은 수가 그리 많지 않으니 제가 적들의 전법에 잘 대처하더라도 그냥 판단을 잘했거나 운이 좋았다는 식으로 넘길 수 있겠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두루마리 내용을 다 이해하거나 혹시라도 들킬 것 같아지면 그대로 태워 버리겠습니다."

"좋소. 그럼 내가 더 공에게 말씀드릴 것은 없소.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길 바라오."

"예, 대군.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개선하겠습니다."

김종서의 말에 말없이 끄덕여 대답한 양녕은 김종서가 회경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널 준비를 시작하는 것을 여전히 심란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 * *

며칠 뒤.

요동. 혼하 북쪽. 무순성 인근.

산해관에서 계획한 대로 명나라의 정로군은 넷으로 나누어 진격하고 있었다. 그중의 가장 먼저 가서 합류 지점을 확보하고 기다리기로 했던 서로군이 무순성 근처에 도착해서 본 것은 예상 밖의 광경이었다.

"그러면 성안에 아무도 없단 말인가?"

서로군 총병관이 놀라서 앞에 있는 장수에게 물었다. 무순성에 접근했는데도 아무도 나와보지 않는 데다가 멀리서 보아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 척후병들을 이끌고 성안을 확인하라고 보냈던 장수였다.

"예. 싸우고 저항한 흔적이 있었지만 그런 것치고 시체는 얼마 없었습니다. 성문이 전부 열려 있긴 했지만 억지로 뚫고 들어온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내통자가 성문을 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끌려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발 늦었군. 그런데 성문을 피 흘리지 않고 열었는데 왜 저렇게 성벽은 곳곳이 무너져있는 것인가?"

"저도 정확한 이유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성을 지키는 요충지 부분, 그것도 동쪽 성벽 중심으로 무너진 것을 보아서는 저희가 와서 무순성을 점령하더라도 제대로 쓸 수 없게 허물어 버린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그게 맞는 것 같군. 영악한 오랑캐 놈이야."

서로군 총병관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다른 장수 하나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무순성 동쪽을 살펴보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던 장수였다.

"크,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숨이 넘어가게 뛰어왔는가? 빨리 말해 보게."

걱정은 고사하고 핀잔이라도 주듯 재촉하는 총병관의 말에 장수가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무순성 동쪽에 있는 요새 관문인 무순관도 성문이 열려 있고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성벽도 무너져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뭐야? 그게 사실인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무순관 동쪽을 살펴보고 온 병사들 말에 따르면 사르후 지역에 여진족들이 요새를 만들고 있다 합니다."

먼저 보고 중이던 장수가 그 말에 놀라 총병관에게 말했다.

"사르후면 정로군이 집결하기로 한 장소 아닙니까. 놈들이 먼저 선수를 쳤군요. 큰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긴. 당장 가야지."

총병관의 대답에 다른 장수도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다른 부대들과 합류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게다가 무순관 너머는 이전부터도 여진족들의 영역이었습니다. 매복일지 함정일지는 몰라도 무언가 준비를 해놓았을 겁니다."

"반대일세. 아직 합류하기 전이니까 가는 게야. 정로군이 저 사르후라는 지역에 집결하기로 한 이유는 저곳이 야르하치놈의 본거지인 허투 알라 코앞의 요충지기 때문일세. 그런 중요한 지역이라 집결지로 삼은 것인데 놈들이 먼저 점령해 방어선을 만드는 걸 지켜만 볼 생각인가?"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지금 요새를 만드는 중이라는 건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것이야. 지금 빨리 가서 돌파하지 않으면 요새가 완성되고 자네가 말한 것처럼 매복에 함정까지 갖춰질지 모르네."

그 말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생각했는지 장수들이 더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총병관이 좌중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좋아. 사르후면 혼하 남쪽에 있지? 적들 근처에 가서 도하를 할 수는 없으니 이대로 무순성 남쪽으로 가서 혼하를 건넌다. 바로 준비하도록."

장수들 사이에 불안감이 퍼지는 것도 모른 채, 서로군 총병관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 * *

한참 뒤.

혼하 남안. 사르후 서쪽.

총병관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혼하를 건너라는 지시를 했지만, 혼하는 그리 쉽게 볼 만한 하천이 아니었다. 온갖 토사가 뒤섞여 거칠게 흐른다 해서 혼하(渾河)라 불려왔고, 여진족들이 부르는 이름인 후너허 역시 혼하라는 이름에서 나왔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악명 높은 강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좀 힘들었군.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잖아."

자기 잘못이라고 하기만 해 보라는 듯한 눈빛을 한 총병관의 그 뻔뻔한 말에 장수들이 저마다 속으로 욕을 했다. 원래도 힘든 혼하 도하를 재촉하기까지 한 덕에 병사들 모두 도하를 마치고 지쳐버렸고, 건너는 과정에서 물을 뒤집어서 쓰거나 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강에 빠져서 떠내려간 병사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탓이 아니라는 총병관을 곱게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기 앞이 사르후입니다."

서로군 총병관 옆에서 가던 장수 하나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긴가. 정말로 여진족들이 요새를 만들고 있…… 으잉?"

"어? 놈들이 도망가는데요?"

장수의 말대로 사르후에서 요새를 만들고 있던 여진족들은 서로군의 모습을 보자마자 혼비백산해서 요새를 내버려 두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뜻밖의 상황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수들도 당황해서 하는데, 서로군 총병관이 혼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 보게. 내 말대로 요새가 완성되기 전에 밀고 들어오니까 놈들이 요새를 버리고 갔지 않는가. 이제 저 요새를 우리가 점령하고 완성해서 써먹으면 그만이야. 집결지에 먼저 도착해서 요새까지 뺏어 완성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나중에 분명히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걸세. 내 그러면 자네들에게도 뭐 하나씩 챙겨주겠네. 뭣들 하나? 빨리 가서 점령하지 않고."

* * *

잠시 후.

사르후.

그 무리한 도하가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는 사실에 총병관을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진 장수들과 병사들은 군말 없이 지시대로 요새에 입성해 공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와중에도 연장은 전부 다 챙겨서 달아났단 말인가? 놈들이 쇠가 귀하긴 한가 보군."

요새 보강을 감독하던 장수의 말에 병사가 말했다.

"그래도 목재들은 못 들고 가서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그것도 요새 만들 곳 근처에 모아서 쌓아 놓아서 수량 파악도 쉽습니다."

"어디 보자……. 정말이로군."

자신의 부대가 맡은 구간 근처에 쌓여있는 목재를 보던 장수가 문득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저 정도 목재 양이면 그냥 완성되지 않은 구간에 가져다 몇 개씩 쌓아만 두어도 제법 벽 구실은 하지 않나? 왜 냅다 버리고 갔는지 모르겠군."

"이렇게 많은 병력이 벌써 올 거란 걸 예상 못 했겠지요. 그리고 목재를 쌓아 벽으로 삼아 버틴다고 해도 이 병력 앞에서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차라리 판단을 빨리한 게 놈들에게는 영리한 판단입니다."

"하긴 그거야 그렇겠군. 그래도 이대로 허투 알라 앞 요충지를 아예 버리지는 않을 걸세. 병력을 더 데리고 오건 기습을 하건 되찾으러 올 가능성이 크니 거기 대비하려면 빨리 요새를 완성해야 하네. 잡담은 이쯤 하고 자네도 서두르도록."

"예."

병사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고 장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공사 상황을 감독하기 시작했다.

그때 작은 나무통 하나가 허공을 날아와 작업하는 병사들 사이에 떨어졌다.

"으악! 깜짝이야!"

"이게 뭐야? 어디서 온 거지?"

작업하던 병사들이 그 나무통을 둘러싸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던 장수가 자기도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가까이 다가가려고 발걸음을 뗀 그 순간, 나무통이 굉음과 파편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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