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82화
182화
아룩타이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야르하치에게 물었다.
"천하를 넷으로 쪼갠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요. 명나라, 정확히는 중국인들은 온 세상을 하나로 묶어 천하라고 하고, 그들의 황제가 그 모든 것의 주인이라 말하오. 하지만 그렇다고 온 세상이 명나라에 복속된 것도 아니고, 애초에 복속시켜 본 적도 없소. 오히려 온 세상을 한 번이라도 복속시켰던 건 중국인들이 아니라 그대 몽골인들 아니오."
칭찬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으며 아룩타이가 말했다.
"뭐, 그건 그렇지."
"그렇다면 둘 중 하나요. 중국인들이 천하를 지배할 자격이 없거나, 아니면 그들이 지배하는 만큼이 딱 그들의 천하거나."
"특이한 발상이군."
"세상은 드넓은 땅이고 그 땅 곳곳에는 저마다 다른 말을 쓰고 다른 옷을 입는 이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소. 그렇기에 초원에는 몽골인이 있고, 숲과 강에는 여진족이 있고, 해동에는 삼한인이 있고, 중원에는 중국인이 있는 것이오. 그렇게 나눠진 땅은 곧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천하이니, 천하마다 천자가 하나씩 있는 게 맞지 않겠소?"
"설마 넷으로 쪼갠다는 게……."
"아마 타이시께서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오. 명나라가 중국인들의 천하를 벗어나 다른 이들의 천하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고, 북원, 대금, 명나라, 조선의 네 천자가 세상에 대등하게 서게 만들어 균형을 잡을 것이오."
경악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는 아룩타이를 보며 야르하치가 말을 이었다.
"커다란 세 세력이 버티고 서는 것을 꼭 청동 솥이 세 다리로 버티고 서서 균형을 잡는 것과 같다 하여 정립이라고 하지 않소. 하지만 내가 명나라 땅을 가끔 오가며 본 바로는 다리가 넷 달린 청동 솥도 많더이다. 애초에 솥 정(鼎)자도 잘 보면 다리가 넷이지 않소? 그렇다면 네 천자를 세우는 것을 정립이라 부르지 못할 것도 없을 것이오."
아룩타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우리 몽골인들은 초원으로 밀려난 뒤로는 황제의 칭호를 잠시 접어두고 칸만을 칭하고, 삼한의 역대 나라들 역시 왕보다 높다 하여 대왕을 칭했지만, 황제라 한 적은 없소. 지금 그대가 황제를 칭한 것만으로도 명나라가 충분히 반발할 것인데, 거기다가 천자를 둘이나 더 세우겠다 하면 그걸 막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생각할 엄두도 나지 않소."
야르하치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나라가 반발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우스운 일이오. 송나라 때에 세상에 천자가 몇이나 있었소? 많았을 때는 송나라도, 금나라도, 고려도, 요나라(서요)도, 하나라(서하)도, 대리국도, 저 멀리 안남국마저도 천자를 칭하였소. 그러나 자기 아들을 자처하는 놈이 너무 많다고 하늘이 무너져 떨어지기라도 했소? 아니. 송나라를 무너뜨린 것은 그 천자국들 사이의 균형을 직접 무너뜨린 자신들의 멍청함이었소."
아룩타이가 끄덕이며 말했다.
"요나라를 꺾겠다고 금나라를 키웠고, 또 그 금나라를 꺾겠다고 우리 몽골에 힘을 실어 주었지. 결과적으로 세첸 칸(쿠빌라이)께서 송나라를 멸망시키셨고 말이오."
"그렇소. 명나라가 역사에서 배울 줄 안다면 섣불리 이이제이랍시고 다른 천자국을 멸하러 들었다가, 솥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처럼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자신들도 망하는 짓을 또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오."
"반대일 수도 있지 않소? 중국인 자신들이 외교를 엉망으로 해서 송나라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은 잘못이 없는데 야만인들이 감히 천자를 칭해서 자신들이 화를 당한 거라 생각할 수도 있소. 남 탓으로 돌리고 우기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잘하는 짓 아니오. 그리 생각한다면 오히려 다른 나라가 천자를 칭하는 족족 군사를 보낼 것이오."
"그렇기에 더 네 천자국을 정립시켜야 하오. 천자국들이 불안하게 세워진 상황이라면 정말로 명나라가 전부 꺾어 버리고 다시 또 자신들만이 천자국이라 할 수 있소. 하지만 네 천자국이 균형을 잡아 버린다면, 명나라도 감히 야만인들이 천자를 칭한다며 성벽 뒤에 숨어 악다구니를 쓰고 발악을 할지언정 섣불리 군사를 움직여 균형을 깰 수 없을 것이오. 송나라 꼴이 나기 싫다면 말이오. 그렇게 균형이 잡히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혹시 또 아시오? 저들도 세상에 여러 천하와 여러 천자가 있음을 받아들일지?"
아이락을 마시는 것도 잊고 야르하치의 말에 집중하던 아룩타이가 말했다.
"명나라를 길들일 셈이오?"
"길들여야 한다면 길들일 것이오. 애초에 우리 여진족은 강가에서는 농사를 짓고, 초원에서는 가축을 키웠소. 숲에서는 사냥을 하고 바다에 나가서는 고기를 잡았지. 이 세상 온갖 환경을 다 길들이며 살아왔는데 그 세상의 일부인 명나라라고 못 길들이겠소?"
"으하하하하!"
야르하치의 말에 아룩타이가 호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크고 우렁차고 오래 웃는지, 아룩타이의 개가 주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짖으며 게르로 뛰어 들어올 정도였다.
그 상황에 야르하치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내 얘기가 그리 재밌을 정도요? 하긴 내가 들어도 너무 거창한 소리긴 하오."
아룩타이는 겨우 웃음을 멈추고 심호흡하면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더니 말했다.
"아니오. 재밌어서가 아니라 그대의 포부가 실로 거물이라서 웃은 것이오. 애초에 재밌다고 웃을 리가 없지. 갓 자기 동족을 하나로 합친 사내가 온 세상을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할 때, 세상 모든 이가 믿지 않고 웃더라도 몽골인들만은 그렇지 않으리란 것은 그대도 알지 않소."
"이런, 차라리 재밌다고 웃는 게 나았을 정도로 과분한 칭찬이로군."
"과분하기는. 대금황제이자 여진족들의 한께 이 정도 대우는 하는 게 옳지 않겠소. 그러니 칸께는 내가 말씀드리겠소.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니 정말로 한을 칭할 만한 그릇의 사내였고, 앞으로도 칸과 한으로서 대등하게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말이오."
기대 이상의 말에 야르하치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고맙소. 내가 타이시께 큰 도움을 받는구려."
"우리를 위해서도 하는 일이오. 그나저나 이리 오신 김에 바로 첫 협력을 해야겠군"
"첫 협력이라, 무엇이오?"
"우리 기병대가 최근 장성 남쪽에 갔다가 알게 된 걸 말해 주겠소."
그 말에 야르하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성을 뚫었단 말이오?"
"뚫고 말고 할 것도 없소. 명나라의 장성이 전부 거용관이나 산해관처럼 철옹성은 아니오. 대다수는 흙만 뭉쳐 쌓아 만든 성벽이라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다 무너져 내려 위에 올라가 있을 수조차 없소. 남쪽에서 끌려와 추위에 약한 병사들이 그런 성벽 아래에서 오들오들 떨며 지키는 곳이 더 많지. 그냥 말을 타고 지나가도 막는 이가 없고, 아예 병사들이 재물을 모아서 우리에게 바치며 해치지만 말아달라 할 정도요."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로군. 그래서 알아낸 것은 무엇이오?"
"명나라가 장성 수비 병력 일부까지 빼서 원정군을 만들고 있다고 하오. 처음에는 오이라트 놈들하고 작당해서 우리를 노리려나 했는데, 오늘 한을 만나고서 그 이유를 알았소."
그 말에 야르하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혹시 병력이 대강 어느 정도 되는지도 아시오?"
"그것까지는 모르오. 하지만 그 오합지졸인 장성 수비 병력까지 데려다 만드는 원정군이 제대로 된 이들일 리는 없겠지."
"하긴 그렇소. 아무래도 인구가 많은 남쪽에서 병사들을 데려오기보다는 그냥 수도 근처에서 해결하려는 것 같구려."
"내 생각도 그렇소. 혹시라도 우리가 움직이면 장성 수비 병력을 다시 그대로 두고 다른 잘 싸우는 놈들을 모아서 원정군을 꾸릴 수 있으니 우리는 한동안 가만히 있겠소. 부디 잘 상대하시길 바라오."
"고맙소. 놈들이 우리 쪽에 오면 우리도 바로 사람을 보내 알릴 테니, 타이시께서도 놈들의 약해진 장성을 넘어서 소득 많이 올리시길 바라오."
그렇게 말한 두 야심가가 서로를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 * *
1432년 5월 하순 모일.
명나라 북직례 영평부. 산해관.
명나라에서 파악한 야르하치의 세력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진족이 하나로 뭉쳤다면 요동에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대금의 부활을 선포하고 황제까지 참칭한 지금 상황은 명나라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에서는 긴급히 원정군을 만들어 오랑캐를 정벌한다는 뜻으로 정로군이라 명명했다. 총지휘관인 경략사와 그 아래 지휘관인 여러 총병관을 임명해 제법 구색도 갖추었다.
"정로군 총 병력은 20만이오. 그런ㄷ 사실 야르하치라는 여진족 놈이 겁을 먹고 항복하거나, 조선이 혹시라도 놈들과 손을 잡는 일이 없게끔 서류상으로 부풀린 것이고, 실제로는 다 합쳐서 8만 정도요. 각 총병관께서는 알아두시오. 괜히 발설하지는 마시고."
"물론이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총병관 한 사람당 2만명 정도를 운용하는 셈이군요."
병력을 부풀렸다고 얘기하는 경략사도 듣는 총병관들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렇게 부풀리는 게 흔히 있는 일이기도 했고, 애초에 야르하치를 멸하는 데에는 지금 동원된 8만이라는 병력도 너무 과한 것 아닐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일이 되면 드디어 산해관을 나서서 요동으로 갈 것인데,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소."
"무엇입니까?"
"어차피 산해관을 나서서 한동안은 산과 바다로 좌우가 막힌 좁은 길만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소. 하지만 거기를 빠져나가서 땅이 넓어지면 병사를 어떻게 운용할지 고민할 거리가 많지 않소."
총병관 하나가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씀이셨군요. 하긴 요하가 워낙 거칠고, 땅도 엉망이지요."
요하는 요동 평야 일대의 수많은 하천이 합쳐서 만들어진 거대한 하천이었다. 그런 만큼 강물에 쓸려 내려오는 토사의 양도 어마어마해서 고대부터 요하 하구는 요택, 즉 요하 뻘밭이라 불렸다.
원래 역사에서도 21세기에 요하 중류 강줄기를 억지로 나누어 다른 하천인 쌍대자하에 합류시켜 요하를 둘로 만들고서야 겨우 수해를 줄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소. 땅이 질고 강줄기가 거세니 한데 모여서 도하하기가 어렵소. 게다가 요하를 건너도 야르하치 놈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건너야 하는 강이 한둘이 아니오. 8만이나 되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그 병사들이 쓸 보급품도 옮겨야 하니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가 걱정이오."
경략사의 말을 듣던 다른 총병관이 말했다.
"원래 대군을 운용할 때는 나누어서 이동한 다음 싸우기 전에 합치는 것이 정석이지 않습니까. 그리 나누면 보급선도 나누어지니 부담도 덜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병력을 나누면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지 않소?"
"애초에 총병관 숫자대로 넷으로 나누더라도 한 부대당 2만에 달합니다. 수도 적은 오랑캐 놈들이 겁 없이 달려들었다가는 바위에 던져진 계란 꼴이 될 뿐이지요."
경략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지만……. 하긴 설령 한 부대가 당하더라도 나머지 부대가 바로 합치면 괜찮을 테니 별 일없겠지. 알겠소. 그럼 요하까지 간 다음 부대를 넷으로 나누어서 이동하고, 야르하치의 근거지 근처에 가서 집결하겠소. 총병관들께서는 미리 병사들에게 알리고 준비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