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81화
181화
1432년 4월 하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아직 많이 이른 아침이었지만 사정전에는 이도와 양녕, 중신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대금황제를 자처하는 이만주, 곧 여진 이름 야르하치의 국서가 도착하자마자 긴급하게 소집한 것이었다.
"이만주, 그러니까 야르하치를 제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간 접한 행적을 보아서는 결코 무식한 일개 오랑캐가 아닙니다. 아무런 기반도 없이 이런 짓을 할 가능성은 얼마 없다 생각합니다."
예조판서 신상에 이어 영의정 황희도 말했다.
"요동도사를 통해 해서위와 내통하는 것이나 제철 기술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내긴 했으나, 지금 이 국서를 받아보니 해서위와는 이번에 아예 세력을 합칠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고, 철 생산도 생각보다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또 조선에서 숨긴 데다가 마침 겨울이었던지라 요동도사는 알아내지 못했겠지만, 아무래도 4윤작법도 써먹는 중인 것 같습니다."
"거참. 대체 어떻게 그렇게 온갖 기술을 빨리 익힌 건지 모르겠소."
이도의 말에 양녕이 대답했다.
"약간 짐작되는 것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동북면에 이주해 온 이들 중에서는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가끔 있습니다. 겨울 추위가 엄청난 곳이기도 하고, 범은 물론이고 늑대며 표범도 심심찮게 돌아다니는 지역인지라 철저하게 수색할 수가 없어서 대부분 죽었다 생각하고 실종된 날을 기일로 삼는 경우가 많지요."
"그 사람들이 죽은 게 아니라 저들에게 가 있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예. 습격이나 정탐하러 왔던 놈들과 마주쳐 버려서 입막음 겸 인력으로 쓸 목적으로 납치당한 경우도 있겠지만 제 발로 넘어간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자들을 통해 기술을 발전시켰을 가능성이 있지요."
그 말에 옆에서 듣던 중신 몇이 심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도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된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소. 그리고 아직 경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놈이 보통 영악한 게 아니오. 국서를 보면 스스로 황제라 하고 여러 용어 역시 천자국의 것을 썼지만, 연호는 따로 정하지 않았소."
좌의정 맹사성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전조 고려에서도 건원칭제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하던 것 아닙니까? 천자국의 수많은 예법을 썼고 심지어 죄인을 사면할 때에는 대사천하, 즉 천자로서 천하의 죄인들을 사면한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번에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모든 용어를 그대로 쓴 가운데에서도 눈에 띄는 강한 표현이지요."
우의정 허조가 이어서 말했다.
"맞습니다. 고려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조선에서도 비슷하게 하고 있지요. 당장 조정의 체계만 보더라도 괜히 시비를 걸 우려가 있어 명나라와 겹치는 부라는 명칭은 쓰지 않지만, 엄연한 황제국인 수나라에서 썼던 조라는 명칭을 써서 이조니 호조니 칭하지 않습니까. 또 환구단을 두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고 말입니다."
이도가 작게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좌상과 우상의 말이 모두 맞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결코 명나라의 아랫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주인임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인지라 그 이상으로는 하지 않소. 조선 안에서야 태조대왕께서도 만세 삼창을 들으시며 즉위하셨고, 사찰 원패에도 으레 주상전하수만세라 적고, 임금을 주상이라 칭하고, 명나라 사람이 들어갈 일 없는 종묘는 아예 처음부터 일곱 칸으로 지었을 정도지만,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나 국서가 오갈 때는 철저히 제후국 예법을 지키는 것처럼 하지 않소. 사실 명나라도 얼추 알고는 있겠지만, 자신들 앞에서 숨긴다는 것 자체가 명나라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니 괜히 건드리지는 않고 있을 뿐일 것이오."
이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즉 천자의 예법을 쓰는 것은 우위를 얻고자 함이고 제후의 예법을 쓰는 것은 실리를 얻고자 함이오. 다른 예법은 몰라도 대놓고 칭제건원 하는 순간 명나라에서 짓밟으려 들 테니 조선이나 안남(베트남)이나 안에서는 천자의 예법을 쓰면서도 명나라에게는 제후국을 자처해 조공으로 이득을 보고 있지. 그런데 지금 야르하치가 하는 것은 많이 다르오. 이번에 보낸 국서에서 대놓고 황제를 칭하면서도, 우위를 얻으려 하기는커녕 마치 대등한 상대에게 보내는 것처럼 써서 보냈소."
"어떻게 써서 보냈기에 그렇습니까?"
"대금황제가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국서라 썼으면서도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썼소. 그리고 국서와 같이 준마 몇 필을 같이 보냈는데, 하사한다는 표현도 아니고, 조공한다는 표현은 더더욱 아니고 선물로 보낸다는 표현을 썼소."
상식을 벗어나는 내용에 혼란스러운 표정이 된 허조가 말했다.
"저들이 오랑캐라 예법에 무지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위고 아래인지 따지는 건 힘 싸움이 일상인 오랑캐들이 더하지 않소. 예법에 무지했다면 오히려 그냥 대놓고 우리를 아랫것으로 취급하듯 썼거나 아예 표현이 중구난방이었지, 이렇게 일관되게 대등한 느낌으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건 그렇습니다. 하기야 애초에 천자국인 금나라를 이었다고 하면서 황제를 칭해 놓고서, 굳이 짐이라는 호칭을 두고 자기 이름을 그대로 쓰지는 않을 테니 의도한 것이겠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오. 자신을 황제로 칭하면서도 몇 곳에서는 대금의 한, 즉 칸이라는 칭호도 같이 썼소. 칸이라는 것이 황제의 칭호지만 왕의 칭호로도 쓰이지 않소."
"국서를 받고 처리하면서도 반감이 덜하고, 답서를 보낼 때 황제가 아니라 한에게 보낸다고 하면 조선에서도 명분상 부담이 덜합니다. 명나라의 눈치도 조금이나마 덜 보이겠지요. 천자의 예법을 쓰면서도 조선을 대등하게 대해서 실리도 얻으려는 것일까요? 발상이 정말이지 특이합니다."
예법에 흥미를 보이는 허조에게 황희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답서를 보낼 수도 없소. 저들이 명나라에 국서를 어떻게 보냈는지, 그걸 받아 본 명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아직 모르지 않소. 명나라에는 제후국의 예법을 지켜서 보내고 실리를 얻으려 했을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금나라를 이었다며 대금국을 칭한 마당에 그리하지는 않았을 것 같소. 그리고 만약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에서도 황제를 운운했다면 명나라가 처음에는 당황하겠지만……."
"천자를 칭했다는 것에 분노할 것이고, 여진족이 이미 금나라의 이름을 걸고 많이 모였고 앞으로 그 이름에 이끌려 더 결집할 여지가 생겼다는 것에 두려워하겠지. 그러나 그렇게 황제라 칭하는 국서를 받았다 해도 명나라가 어느 정도로 강하게 나올지 불확실한 것은 여전하니 우리는 최대한 상황을 지켜봐야 하오. 최대한의 대비를 하면서 말이오."
이도는 이어서 중신들을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우선 대종백께서는 명나라와 여진족의 동향을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한성부와 의주부 사이의 역참에 발 빠른 말들을 준비해두고, 정세를 읽는 데에 능한 예조 관원을 의주부에 파견해 두시오."
"예, 전하."
"대사마께서는 만일 요동 쪽에서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동북면의 회경군을 방어에 문제가 되지 않는 정도만 남겨 두고 의주부에 옮겨 배치하시오."
"예, 전하."
그렇게 이도가 지시 내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양녕은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여러 영향을 끼치고 원래 역사와 많이 달라진 탓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읽어 내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흐름은 달라졌어도 사람이나 상황까지 모조리 바뀐 것은 아니야.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아니, 대응해 주마.'
* * *
1432년 4월 하순 모일.
몽골 초원.
북원의 칸인 아다이 칸의 타이시(재상), 아룩타이의 게르에는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근본도 없는 놈이 한을 칭했다고 박대당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흔쾌히 만나 주시는구려."
야르하치의 말에 아룩타이는 미소 띤 얼굴로 손수 아이락을 따라 주며 말했다.
"허허허. 여진족이 대금을 세웠던 것은 칭기즈 칸께서 우리 몽골을 하나로 통합하시기보다도 한참 전이고, 먼저 중국을 짓밟아 주었던 것 역시 여진족이오. 그런 여진족들이 다시 뭉쳤다면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고 그들을 뭉치게 한 사람도 보통 사람은 아니겠지. 힘만이 전부인 이 초원에서 사람 보는 눈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 늙은이가 어찌 그런 사람을 몰라보고 박대하겠소?"
"칭찬 고맙소."
"그래서 우리를 이렇게 직접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오?"
"협력을 요청하고자 하오."
"협력이라……. 무슨 협력이오?"
"지금 명나라가 다시 오이라트를 지원하면서 북원을 견제 중이라고 알고 있소. 내가 대금국을 다시 세웠다는 국서도 보냈으니 조만간 우리도 견제하려 들겠지. 그렇게 서로 견제받는 사이끼리 도움을 주고받는 게 좋지 않겠소?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더라도, 명나라가 군사를 움직이는 것이 확인될 때마다 소식을 전해 주는 정도라도 말이오."
그 말에 아룩타이의 하얗게 센 눈썹 아래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빛났다.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말이오?"
"명나라의 수도를 기준으로 동북쪽에는 우리 대금이 있고 서북쪽에는 북원이 있소. 그런데 그 세 세력 사이에는 넓은 산지가 가로막고 있지 않소이까."
"그렇소."
"그러니 명나라가 수도에 군사를 모은 다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북원을 노리고 서북쪽으로 거용관을 지나거나 대금을 노리고 동북쪽으로 산해관을 지나거나 둘 중 하나뿐이오. 북원과 싸우러 가다가 그대로 산지를 뚫고 대금으로 향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명나라가 한쪽으로 군사를 보내면 반대쪽이 비어 버리는 데다가 쉽게 군사를 그쪽으로 다시 보낼 수도 없으니, 공격받으면 서로에게 알려 주어 뒤를 노리게 하자, 이것이로군."
"맞소. 그저 상대를 위해서 명나라의 후방을 쳐 군사를 물리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오. 군사가 빠진 쪽을 쳐서 좀 더 많은 것을 안전히 약탈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소."
아룩타이는 야르하치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군. 좋소. 그리하겠소."
"고맙소. 그럼 우리 쪽 역참들에 알려서 북원에서 소식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라 알려 두겠소. 북원에서도 그리해 주시겠소?"
"물론 그리해야지. 그럼 협력도 성사된 김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
"무엇이오?"
"지금 칸께서 바쁘셔서 타이시인 내가 대신 만나러 왔지만, 원래는 칸께 국서를 보내지 않았소?"
"그랬소."
"국서에서 스스로 대금황제이자 여진족들의 한이라 칭하면서도, 대원황제이자 몽골인들의 칸께 보낸다고 적었고 그 내용도 매우 정중했지.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 초원에서 칸을 칭하는 이들이라면 서로 적대하는 것이 당연한데 꼭 대등한 관계끼리 대하는 것처럼 특이한 국서를 보냈으니, 칸께서도 이제 막 한을 칭한 세력이라 해서 무시하지 않고 관심을 보이시며 타이시인 나를 직접 보내신 것이오. 바로 그 부분에서 궁금한 것인데, 혹시 명나라에도 이렇게 대등한 사이에 보내는 것처럼 국서를 보냈소?"
야르하치는 아이락을 한 모금 마시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오. 조선에도 그렇게 보냈소."
"진짜였군. 하지만 중국인들은 자신들 외에는 황제를 칭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소. 이미 보냈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차라리 황제 말고 한이라고만 칭하는 게 명나라가 군사를 일으킬 위험이 적지 않겠소?"
"알고 있소. 하지만 이유가 있기에 그걸 알고서도 황제를 칭한 것이오."
"이유라니?"
야르하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중국인들의 그 잘난 천하를 넷으로 쪼개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