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79화
179화
1432년 2월 하순 모일.
허투 알라 동북쪽(현 길림성 통화시).
이만주가 해서위에서 사들인 숭가리 강(송화강) 상류 서쪽의 땅은 요동 동부 산지에 펼쳐진 고원지대였다. 구릉이 많지만 고도는 철원평야와 비슷하고 면적은 훨씬 넓었으니 개척만 잘한다면 매우 유용한 땅이 될 수 있었다. 오늘 이만주가 판차와 무타우타를 대동하고 온 이유 역시 개척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날씨가 제법 추운데 벌목에는 문제가 없는가?"
"이 정도야 괜찮습니다. 그리고 원래 나무는 이렇게 겨울에 베는 게 좋아요. 봄 되고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베기도 힘들고 말리다가 죄다 비틀려 버리거든요. 그리고 겨울에는 강이 얼어 있어서 썰매로 옮기기도 좋습니다."
무타우타의 설명에 이만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 고원지대 서쪽에서 발원한 호이파 강(휘발하)이 고원 중앙을 가로질러 동쪽의 숭가리 강에 합류하고, 호이파 강에도 또 여러 지류가 있으니 겨울에 썰매로 오가는 것이나 다른 계절에 배로 오가는 것이나 두루 편하겠지. 그럼 베어 낸 목재를 이용한 일들은 잘 되어 가나?"
"예. 포섭된 우디거들이 모여들다 보니 한 부족에 기술이나 재주가 있는 놈이 하나씩만 있다 쳐도 엄청 많더라고요. 목책 기술자, 숯장이, 활 장인 등등이 서로 도와가면서 일하게 만들고, 철로 만든 도구까지 쓰게 해주니 갈수록 생산도 잘 됩니다."
"좋은 일이야. 이렇게 계속 나무를 베어 가며 개척하다가 날이 풀리면 그루터기만 남은 곳에 불을 놓아 화전을 일굴 걸세. 우리에게 포섭되어 이주해 온 여진족들에게 준다고 한 비옥한 농토가 바로 그렇게 만들 화전이니, 혹시라도 농토가 부족해서 못 주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금만 더 힘써 주게. 내 자네만 믿겠어."
"물론입니다."
무타우타의 대답에 이만주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부족 이름이 따로 없지?"
"예? 예. 뭐 워낙 부족 규모가 작기도 했고, 이름이 붙을 만큼 한 지역에서 오래 살지도 않았으니까요."
"이미 수허라는 성씨도 받았고, 여러 우디거들을 흡수해서 부족 규모도 커졌으니 이제 자네도 부족장으로 어디 내세울 만한 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마땅히 그럴듯한 이름이 있어야 할 것이야."
"부족 이름이요? 이미 건주우위가 있지 않나요?"
"그건 명나라에서 준 관직이지 부족명은 아니지 않은가. 어디 보자, 이 일대가 나무가 많아 우디거들이 적성을 살리기 좋으니 아예 자네가 우디거들하고 같이 이 일대에 자리를 잡게. 그리고 여진족 부족 이름은 으레 끼고 사는 강 이름에서 따오니, 호이파 강에서 따서 호이파 부족이라 하는 건 어떤가?"
그 말에 무타우타가 뛸 듯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호이파 부족이라,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명나라에서 관직도 받고, 성씨도 생기고, 부족도 커지고, 부족 이름까지 생기다니, 정말로 지휘사님을 따르기를 잘했습니다. 실망하시는 일 없게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흡족한 표정으로 무타우타를 보던 이만주가 판차에게 말했다.
"참, 조금 전에 잠깐 숯 굽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제철 쪽은 어떤가?"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직접 가서 보시지요."
* * *
잠시 후.
호이파 강 인근. 무쇠 작업장.
작업장 안은 계절마저 잊은 더위로 가득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사내들이 화로에 철광석과 숯을 삽으로 퍼 넣고 있었고, 옆에서는 화로에 연결된 풀무를 열심히 밟아 대고 있었다. 풀무를 열심히 밟던 한 사내가 다른 이들에게 외쳤다.
"반대쪽 풀무 더 밟아! 철광석 한 번에 너무 많이 넣지 마! 불 막혀!"
"알았어!"
한가지 이질적인 점은 작업장에 오가는 것이 여진말이 아니라 조선말이었다는 점이었다. 한참 떨어져서 그 모습을 보던 이만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별난 광경이군. 여진족하고 일본인이 조선말로 대화하고 있다니."
"둘 다 서로의 말을 모르는데 조선말은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요. 우스운 광경이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돌고 돌아 조선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 셈입니다."
"그건 그렇네. 조선에서 도망쳐서 온 자가 일본 출신에다가 저런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으니, 어떻게 보면 조선이 기술자도 구해 주고 말도 통하게 해준 셈이로군."
이만주와 판차가 말한 것처럼, 지금 풀무를 열심히 밟으며 지시하는 사내는 일본인이었다. 정확히는 양녕이 칠주도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처형은 면했지만, 노비가 되어 조선 각지로 흩어졌던 왜구 가문 출신 일본인이었다.
동북면으로 이주해 온 종친이나 입적서얼 집안에 하필이면 그런 배경을 가진 노비가 딸려 왔고, 어차피 밑바닥 중의 밑바닥 인생인 상황에서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해 탈출하여 이만주 세력에 합류한 것이다.
"덕분에 무쇠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게다가 저자가 가르쳐 준 화로와 풀무를 쓰니 무쇠를 연철로 만드는 것도 훨씬 개선되었습니다."
"아주 좋아. 그런데 저자는 조선에 잡혀 노비가 된 해적 아닌가. 해적이 어떻게 저런 제철 기술을 알고 있는지 혹시 아는가?"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때 풀무질을 할 때마다 불꽃이 솟아오르는 화로를 정신없이 구경하던 무타우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번에 조선을 피해 탈출해 온 우디거들한테 들은 건데, 조선군에 아구가 이끄는 여진족 부대 말고 일본인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도 새로 생겼다더라고요. 다들 큰 칼을 차고 다니는데 뽑아서 휘두르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단칼에 잘린다고 하는데 그거랑 관련 있는 거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일본 해적들이 칼질에 능하다는 걸 할아버지께 들은 기억이 나는군. 해적들도 칼을 차고 다닐 정도라면 마을마다 제철 기술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어. 그걸 왜 대장장이가 아니라 해적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 말에 판차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 나누시는 걸 듣다가 생각난 건데, 저 일본인이 무쇠를 만들기 전에 좀 특이한 짓을 했습니다."
"특이한 짓이라니? 뭔가?"
"화로에 둘러놓은 저 밧줄 보이십니까? 저 일본인이 감아 둔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로를 보강하려고 묶은 것인가 했는데, 계속 보다 보니 화로를 만들 때마다 저렇게 밧줄을 감고 앞에서 손뼉을 치더니 뭐라 중얼중얼하더군요."
"조선인이나 몽골인들이 신령을 모신 돌무더기에 밧줄을 둘러놓는 것과 비슷한 것 같은데."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저자가 참여해서 무쇠를 만드는 데 성공했을 때, 이건 함부로 쓰면 안 된다면서 제일 잘 만들어진 쇳덩어리 하나를 가져다가 저렇게 담아서 모셔 놨습니다."
작업장 한쪽에 놓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밧줄을 둘러놓은 버들고리를 가리키며 판차가 말을 이었다.
"그 뒤로도 항상 작업을 하기 전이면 저 앞에 가서 손뼉을 치고 중얼거리더군요. 쇠가 잘 만들어지게 해달라며 신령께 기도를 올리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는, 같이 일하는 여진족들도 작업 전에 같이 손뼉을 치며 기도를 올리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오호라. 그거 흥미롭군. 쇠를 녹여내는 게 신령에게 바치는 제사의 일종이라면 마을 사내들이 다 참여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어. 아마 그런 과정에서 배운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때 작업장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만주가 뒤를 돌아보자 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조선에서 사내 하나가 도망쳐 왔습니다. 일단 밥을 먹이고 따뜻한 방에서 재운 다음 상황을 알려드리러 온 겁니다."
그 말에 이만주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이 잘 풀리려니까 알아서 사람이 모이는군. 좋아, 가 보세."
* * *
한참 뒤.
허투 알라.
잠에서 깬 사내는 기지개를 쭉 켜고 일어나 앉아 옆을 돌아보았다가 순간 흠칫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가 셋이나 앉아 자신을 보고 있던 것이다.
"일어났군. 몸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나는 건주위의 지휘사 이만주다. 이쪽은 각각 건주좌위와 건주우위의 지휘사인 판차와 무타우타다."
그 말에 사내가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이만주가 말했다.
"너무 굳어 있을 것 없어. 쉬는 데 방해를 해서 좀 그렇긴 하지만 몇 가지만 묻겠네. 자네가 조선에서 도망쳐왔다고 들었는데, 혹시 뭐 쓸 만한 기술을 알고 있는 게 있는가?"
이만주의 말을 들은 사내가 갑자기 긴장하더니 말했다.
"기술이라 하시면…… 만드는 방법을 아는 물건이 있습니다. 혹시 재료로 쓸 대나무가 좀 있습니까?"
"대나무? 이 추운 데에서 무슨 대나무가 자라겠나. 기껏해야 조릿대일세."
"그럼 혹시 삼끈은 있습니까?"
"그것도 추워서 안 자라네. 우리가 삼베라도 만들 수 있었으면 포목을 교역하려고 그 난리도 안 치겠지."
그 말에 사내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 이만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왜 이렇게 긴장하나 했더니, 설마 쓸 만한 기술이 없으면 우리가 버리거나 다시 조선으로 보낼까 봐 그러는가?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긴장하지 말고 우선 대체 뭘 만들려는 건지 차분히 말해 보게."
조금 긴장이 풀린 사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겁니다. 부시끈이라고 하는데, 대나무 몸통에 삼끈이 들어있고 부싯돌하고 부시쇠를 같이 묶어서 가지고 다닙니다. 쓸 때는 이렇게 씁니다."
사내는 부시끈을 능숙하게 다루더니 금방 불씨를 만들어 냈다. 삼끈 끝에서 작게 연기를 피워 올리는 불씨를 본 이만주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부시끈이라. 구조나 원리가 어렵지 않지만 불씨를 쉽게 만들 수 있으니, 재료를 구해 만들 수만 있다면 겨울이 심하게 추운 이곳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이겠어."
"굳이 따뜻한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구할 것 없이 여기서 나는 재료로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몸통은 대나무 대신 속이 빈 새 뼈 같은 걸 쓰면 될 것이고, 불이 붙어야 하는 끈 부분은 자작나무 껍질을 가늘게 잘라 엮어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냥 끈보다도 불이 더 잘 붙겠지요."
판차의 말에 이만주는 일리가 있다는 듯 끄덕이고 사내에게 말했다.
"좋아. 그 부시끈이라는 게 매우 쓸모가 있어 보이는군. 사람을 붙여줄 테니 여기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 보게. 성공만 하면 마땅히 그만한 대접을 해줄 것이야. 혹시 또 아는 기술이 있는가?"
사람까지 붙여 준다는 그 말에 드디어 안심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화약 다루는 법을 조금 알고 있습니다."
화약이라는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사내에게 집중되고, 이만주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조법은?"
"제조법은 모릅니다."
사내가 눈치를 보며 대답하자 옆에서 무타우타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좋다 말았네. 만들지를 못하는데 쓰는 법이 무슨 소용이람."
"반대로 생각하십시오, 무타우타. 만약 우리가 화약을 손에 넣었을 때 사용법을 안다면 유용하게 쓸 수 있지만, 사용법을 모른다면 제대로 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설프게 다루다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판차 말이 맞네. 익혀 둬서 나쁠 건 없지. 그나저나 대체 자네는 무슨 일을 하기에 화약 사용법을 알고, 또 무슨 일이 있어서 여기로 도망을 온 겐가?"
사내가 이만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군인입니다. 압록강 강변 요새에 있었는데 어제 큰 사고를 쳐 버렸지요. 어차피 들키면 죽을죄라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똑같다 생각해서 혼자서 목숨 걸고 압록강을 건너 도망쳐 온 겁니다."
"그런 거였구먼. 안심하게. 자네는 우리가 잘 보호해 주겠네."
이만주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다독여 주었다. 그러다가 슬쩍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그렇다면 자네 조선군의 무기나 전법에 대해서도 잘 알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