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78화 (17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78화

178화

"요동도사를 써먹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요동도사가 나서서 알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오. 이만주 세력이 조선 쪽 여진족들을 습격하러 오는 빈도가 전보다 늘었고, 무기나 갑옷도 철제로 잘 갖췄더라고 알려 주는 것이지."

최윤덕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 두 가지면 조선이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군요. 아니, 오히려 알고 있어야 이상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를 하면서, 습격하러 오는 빈도가 늘어난 걸 보니 혹시라도 해서위와 협력이라도 하거나 다른 여진족들을 포섭해서 인구가 늘어나 여유가 생긴 건 아닌지, 명나라에서 철을 많이 팔았을 리가 없는데 철제 장비로 무장한 걸 보니 제철 기술을 습득한 건 아닌지 걱정된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이오."

"만에 하나라도 그게 사실이라면 가장 발등에 불이 떨어질 사람은 요동도사일 테니, 직접 나서서 열심히 조사하겠군요."

"그렇소. 물론 만약 너무 정확하게 맞추기라도 하면 우리도 의심받을 테니 좀 터무니없는 추측도 넣어서 일부러 틀리기도 해야 하겠지만, 잘만 하면 이만주 세력의 상황을 명나라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소."

"이만주 세력은 요동만이 아니라 조선과도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당연히 조선에도 자신들이 알아낸 걸 알려 주고 협력을 요청하겠지요. 그런데 그 부분에서 좀 걸리는 게 있습니다."

약간 걱정스러운 듯한 최윤덕의 표정을 본 양녕이 되물었다.

"무엇이오?"

"알아낸 내용을 명나라가 숨기기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북원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요동의 여진족들을 피신시킬 때도 조선에는 최대한 숨기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황제가 친정을 나섰다가 실패하는 추태를 보였고 피신시키는 곳도 조선 쪽이었으니 그런 것이지만, 이번에는 이만주가 몰래 세를 키운 것이니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지 않겠소?"

"하지만 이만주 세력도 결국 요동도사의 관할이지 않습니까. 여진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추궁을 받게 될까 두려워한 요동도사가 자기 선에서 숨겨버릴 수는 있지요. 명나라의 최선이 요동도사의 최선은 아니지 않습니까."

최윤덕의 말에 양녕도 약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듣고 보니 아예 그럴 일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겠구려. 그저 요동도사가 그만큼 멍청이는 아니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소. 어찌 되건 일단 나는 바로 한성부에 가서 조정에 지금까지의 상황을 알리고, 요동도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리겠소."

* * *

1431년 12월 중순 모일.

허투 알라. 이만주의 집.

두 달 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허투 알라를 찾은 도르호치는 바로 이만주의 집으로 안내받았다.

"왔군. 들어오게."

집 앞에서 기다리던 이만주의 뒤를 따라 집에 들어와서 의자에 앉으며 도르호치가 말했다.

"나는 널 매번 집 앞 공터에서 맞이했는데 너는 나를 이렇게 집에 들여보내 주면 내가 꼭 손님 대접을 제대로 안 하는 놈이 된 거 같은데."

"허허, 별걸 다 신경 쓰는군. 이 날씨에 밖에서 맞이하다가 둘이 사이좋게 얼어 죽을 일 있나? 날씨가 좋으면 밖에서 맞이하는 거고, 궂으면 안에서 맞이하는 거지. 이상한 거 신경을 쓰지 말고 이거나 마시게."

이만주는 화롯가에 두었던 주전자를 가져오더니, 미리 탁자에 올려두었던 잔 두 개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액체를 따르기 시작했다.

"뼈하고 고기를 고아낸 물이네. 마시면서 몸 좀 녹이게."

"고맙군. 그런데 집 앞에 나와서 기다리던 것도 그렇고, 미리 잔까지 꺼내놓은 것도 그렇고, 내가 올 걸 예상하고 있었나?"

이만주는 반대편 의자에 앉아 잔을 들고 내용물을 홀짝이며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올 거라는 예상을 못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양녕의 건의를 받아들인 조선 조정의 통지를 받자마자 요동도사는 행동에 나섰다. 병사를 대동한 관원들이 거의 동시에 해서위와 건주위에 들이닥친 것이다. 조선이 통지한 내용을 참고한 덕에 건주위가 무쇠 농기구로 연철을 만들던 것은 물론이고 해서위가 자신들이 사들인 무쇠 농기구를 건주위에 팔아넘기던 것도 발각되어 버렸다.

"그래. 우리 둘이 작당한 게 빨리도 들킨 덕에 둘 다 교역이 아예 끊겨 버려서 급하게 달려왔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어차피 숙이고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네. 우리가 그럼 이제 그만 친하게 지내고 다시 싸우겠다고 하면 명나라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 말을 믿어주겠는가?"

"그거야 당연하지. 그 방법은 생각도 안 했어."

그 말을 하고 잔을 들어 내용물을 마시는 도르호치를 보며 이만주가 말했다.

"어째 생각보다 걱정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군?"

"작년에 네가 와서 한 말을 보복 예고라고 생각했었다 말했었지? 그 뒤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싶어서 최대한 명나라와 교역해서 물자를 쌓아뒀다. 그걸 명나라 도움을 받아서 너희를 막는 데에 쓰는 게 아니라, 너희와 협력하다 명나라와 교역이 끊긴 걸 버티는 데에 쓸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말이야."

"잘했다. 그럼 우리가 도와줘야 할 일은 딱히 없겠군."

"그래. 그건 걱정하지 말고 내가 물어본 거에나 답해라.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지난번 찾아왔을 때 명나라가 견제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내가 물었더니 다 방법이 있고 계획이 앞당겨질 뿐이라고 했었지? 이제 그 계획이라는 걸 들려줄 때가 된 거 같은데."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계획이라는 게 세워 놓는다고 그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상황을 봐 가면서 고칠 수도 있고, 미리 여러 개 세워 놓기도 해야 하는 법이지."

"한 번에 끝까지 다 말해주지는 않겠다는 거군. 알겠으니까 그만 돌려 말하고 당장 뭘 할지만 말해."

"이해가 빨라서 좋군."

씨익 웃은 이만주가 말을 이었다.

"우선 사방으로 다니면서 다른 부족들을 포섭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 거점인 숭가리 강(송화강) 일대의 부족들을 최대한 끌어들이고, 우리는 우리대로 고미 샹기아 알리(백두산) 서쪽의 부족들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거지."

"끌어들인다고? 이 상황에?"

"왜. 문제 있나?"

"당연한 거 아닌가? 우리가 명나라와 교역한 물건을 팔아 주기는커녕 명나라에 밉보여서 기존 교역마저 다 끊겨 버린 상황인데 누가 우리 편에 붙어? 얻을 거라고는 하나도 없고 자기네도 덩달아 명나라에 찍힐 위험만 있잖아."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도르호치의 말에 이만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대야. 교역이 끊겼기 때문에 더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상황이다. 여럿이서 갑옷 입고 무기 차고 말을 타고 가서 우리하고 협력하라고 설득하는 거야."

"그게 무슨 설득이야! 위협이지!"

이만주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위협이지. 그런데 같은 위협이면 명나라에 밉보여 교역 끊긴 놈들이 하는 쪽이 더 위험하지 않겠나?"

"그게 무슨……. 뒤가 없으니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생각하게 만든다는 건가? 나름대로 그럴싸하긴 하군."

"그래. 물론 그렇게 위협만 하면 반발을 살 테니 유화책도 써야지. 우리하고 협력할 마음이 들었다면 날이 풀리는 대로 지금 살던 곳을 떠나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하는 거다. 그러면 비옥한 농토도 주고 농사짓는 법도 가르쳐 주고 철제 도구도 싸게 팔아 준다고 하는 거지. 이것도 역시 교역이 끊어져서 더 효과가 좋을 거야."

"교역이 끊어졌는데도 오히려 우리가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많이 제공해 줄 수 있다, 즉 명나라가 교역을 끊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자급자족이 되고도 남는 상태다, 뭐 그런 건가. 일리 있는 얘기군."

"그래. 명나라는 지금 교역을 끊으면 우리가 곤란해할 거라 생각하고 있을 거야. 아마 물자가 부족해져서 건주와 해서가 서로 약탈하고 싸우게 되길 기대하는 거겠지. 겨우내 물자를 소비한 다음에야 그런 상황이 될 거라 생각할 테니, 적어도 봄이 올 때까지는 명나라도 추가로 뭔가 더 손을 쓰진 않을 거다. 그 틈을 타는 거지."

이만주의 말이 끝나고 잠시 가만히 생각하던 도르호치가 입을 열었다.

"그 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딱히 손해볼 건 없겠군. 좋아. 네 말대로 하지."

"좋아. 그럼 믿고 맡기마."

"그나저나 포섭된 부족이 근처로 이주해 오면 비옥한 농토도 주고 농사짓는 법도 가르쳐 준다 그랬지? 어차피 우리는 사람이 부족하면 부족했지 땅이 부족하지는 않으니 줄 땅이야 많다 치고, 가르쳐 준다는 농사짓는 법은 대체 뭐냐?"

"안 그래도 지금 말하려고 했다. 농사를 계속 지으면서도 지력이 쇠하지 않고, 사람 먹을 것과 가축 먹일 것을 고르게 재배하는 방법이야. 조선에서 알아 온 농법이지. 지금 너 혼자서 듣고 돌아간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조만간 사람을 보내서 가르쳐 주마."

대충 끄덕거린 도르하치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라. 대신 오늘 다른 건 몰라도 네가 어지간한 놈이라는 건 확실히 알아서 돌아가겠구나."

"내가 뭘?"

"내가 너희를 버리고 혼자서 명나라에 숙이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너를 찾아와 협력을 구하기를, 그러니까 한배를 타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드러내고 나서야 그 농법을 가르쳐 주려고 숨겨두고 있던 거였지?"

이만주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거래를 시작하면서 준 연철은 도구를 만드는 데 쓰면 그만이지만, 농법은 한 번 알면 계속 쓸 수 있는 거 아냐. 당연히 같은 편이 된 다음 가르쳐 줘야지."

"그리고 숭가리 강 상류 서쪽 땅도 그 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우리한테서 산 거였고?"

"그래. 강을 끼고 있어서 농사짓기 아주 좋은 땅이거든. 왜, 물러 달라고 하고 싶어졌나?"

"내가 이미 끝난 거래를 물러 달라고 할 놈으로 보이나? 그리고 애초에 물러 달라고 할 수 없게 다 계획해 두고 거래하러 왔던 거 아냐?"

"맞아. 명나라에 발각되고 우리 두 세력이 협력하게 되어서 땅을 두고 아웅다웅할 여유가 없게 되는 상황, 아니면 사 온 땅에 우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아서 너희가 힘으로도 뺏을 수 없게 되는 상황. 이 둘 중 하나라도 확실히 일어난 다음에야 그 농법을 가르쳐 줄 계획이었지."

도르호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무서운 놈이야. 절대로 적으로 돌리면 안 되겠어."

"칭찬 고맙군."

"그리고 어차피 같은 배까지 탔으니, 하려면 아예 제대로 해야겠지? 대체 무슨 계획을 어디까지 짰는지는 모르겠지만 널 한번 믿고 걸어 보겠다."

도르호치가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이만주에게 말했다.

"훌룬 부족의 부족장이자 나라 가문의 수장, 나치불루의 아들인 이 도르호치가 네가 어디까지 가는지 따라가 보겠다."

이만주가 마시던 잔을 든 채로 말없이 가만히 있자 도르호치가 다시 말했다.

"왜, 마음에 안 드냐?"

"아니, 뜻밖의 상황이라서 잠깐 당황했을 뿐이야. 앞으로도 계속 협력해 준다면 나야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지. 그럼 어디 확실하게 같은 편이 된 김에 내 계획을 좀 더 말해주마. 놀라지 말고 잘 들어라."

이만주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고는 차분하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만주의 말이 이어질수록 도르호치의 얼굴에는 충격과 놀라움, 두려움이 드러났지만, 맨 마지막에 남은 것은 기대감으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0